본문 바로가기

EDITORIAL/문화 & 예술 :: Culture & Art

동과 서의 만남, 손에 손잡고 - 1988년 서울 올림픽

사진 출처: http://edge27.egloos.com/3870095

1988년은 20여년 간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대한민국에 있어서 뜻 깊은 한 해였다.  경기도 과천에 서울랜드가 개장하였고, 삼성동 COEX 자리에 무역센터가 완공되었으며, 전두환 정권을 기점으로 반민주 군사정권은 그 마지막을 고했다. 이어, 노태우 대통령이 민간인 신분으로 당선되면서 평화적인 정권이양이 이루어진 해였다. 물론 이런 과정들이 성공하기 전에 대한민국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20여년 동안 수없이 겪어야 했다. 두 번의 군사 정변이 있었고 6월 항쟁이나 전태일 평화시장 분신사건, 박종철 치사사건 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운동들도 거세게 일어났지만, 한편으로는 안정적인 산업화, 그리고 경제적인 발전을 통해 대한민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 전세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하고 있었다.

성장하는 경제력과, 지정학적 위치, 그리고 이념의 대립에 따른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이 공화국은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거의 동시에 헤내며 이제는 세계인들에게 자신들의 업적과 성과를 과시할 수 있는 행사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내부적인 일들을 차치하더라도 그들의 서울이 수년 전 일본의 나고야를 52대 27로 따돌리고 올림픽을 유치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당시 대한민국은 냉전이 지속되고 있던 시기에서 동과 서, 제 1세계와 제 2세계, 그리고 제 3세계까지 아우르는 이 초대형 규모의 행사를 진행하기 위한 역량을 아직 증명한 적이 없었고, 따라서 세계는 - 심지어는 자국민들 마저도 - 대한민국의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1988년 서울 올림픽에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그리고 IOC (국제 올림픽 위원회) 의 입장에서도 대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난관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세계급 규모의 대회를 개최한 적이 없었던 대한민국은 일본에게 1986년 아시안 게임을 보장받는 대신 (당시 북한의 평양이 경쟁 상대였다) 1988년 올림픽 신청을 포기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은 이를 거절했다.  절대로 서울을 지지하지 않을 공산권 국가들의 입장과 북한의 각종 외교적 음해, 그리고 대한민국 내부의 정치적 혼란들은 서울에게 쉽사리 기회를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북한은 1987년까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평양-서울 올림픽이 되어야한다는 등의 공동 개최론을 주장하기도 했고, 일본을 지지하기도 했으며, 급기야는 올림픽 보이콧 운동까지 시도했다.  이 당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역시 김현희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이런 북한과의 관계가 테러 발생 가능성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를 생각해보자) 과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 불거진 올림픽 아테네 영구 개최설 등으로 잠시 서울 올림픽 개최가 흔들리기도 했다.  특히 1987년의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엄청난 의미를 상징했지만, 이는 국제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한국 내의 정치적 혼란을 증명하는 사례였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미국의 LA와 독일의 베를린에서 유치권을 가져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한국은 6.29 선언으로 군사정권이 끝나고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면서 예정대로 성공적인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었다.

# Cold War - 냉전 (冷戰)
1987년의 전세계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자면 냉전의 끝 무렵에 가깝지만 당시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은 아직도 첨예한 대립을 하던 시기였다.  올림픽의 역사로만 따지면 1980년에는 러시아 (당시 소련) 의 모스크바 올림픽이 있었고 1984년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있었지만, 양 진영은 상대방의 올림픽이 개최될 때마다 집단 보이콧을 했다.  국제 정세에 따라 대한민국도 1980년에는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으며, 수 많은 자유 진영 국가들의 보이콧을 기억한 공산 진영 국가들은 같은 해 열렸던 뉴욕의 레이크플레시드 동계올림픽에는 참가했지만 이후 84년의 LA 올림픽에서는 집단으로 불참하였다.  (1980년의 모스크바 올림픽 폐회식에서, 마지막 과정에 차기 개최지의 국기를 게양하는 행사가 있는데, 이 당시 미국 정부의 국기게양과 국가연주 거부로 인해 모스크바 올림픽 위원회 측은 차기 개최지였던 LA의 깃발과 시가를 연주해야만 했다)

이렇듯 서울 올림픽 이전의 두 대회는 반쪽자리 올림픽이 되어버렸고, 이는 자유 진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대한민국에게도 호재로 작용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10년 전 양 진영 사이에 데탕트(detant)라는 화해 무드가 조성되었긴 했지만, 사이가 다시 벌어진지는 오래였다, 그 것도 더욱 더.  하지만 서울 올림픽은 결과적으로 사상 최다의 참가국 (159개국) 과 최대의 참가 인원 (8,465명) 을 유치할 수 있었다.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데탕트의 실패로 인한 양 진영의 대립은, 1988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냉전시대가 녹아가고 화해의 무드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부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북한은 반대했지만, 남한에서의 개최, 그리고 그 성공적인 올림픽의 시작에서 올림픽 주제곡 손에 손잡고 (Hand in Hand) 가 가지는 의미는 그 당시 전세계에 공개되었던 어떤 음악들보다도 세계평화에 대해 가지는 상징성이 있었다.


# 손에 손잡고 (Hand in Hand)
개회식에서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잡고"는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Giovanni Giorgio Moroder, 미국의 작사가 Tom Whitlock, 그리고 한국의 작사가 김문환에 의해 탄생된 4분 13초의 노래이다.  노래에 대해 논하기 전, 동영상을 틀고 가사를 보도록 하자.

하늘 높이 솟는 불
우리들 가슴 고동치게 하네
이제 모두 다 일어나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길 나서자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 잡고

어디서나 언제나
우리의 가슴 불타게 하자
하늘 향해 팔 벌려
고요한 아침 밝혀주는 평화 누리자

See the fire in the sky
We feel the beating of our hearts together
This is our time to rise above
We know the chance is here to live forever for all time

Hand in hand we stand all across the land
We can make this world a better place in which to live
Hand in hand we can start to understand
Breaking down the walls that come between us for all time
Arirang

Everytime we give it all
We feel the flame etenally inside us
Lift our hands up to the sky
The morning calm helps us to live in harmony for all time 

필자는 어려서 잘 몰랐다

이 노래는 공개 당시 독일, 일본, 홍콩, 스위스, 스페인을 비롯한 17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또한 현재 유튜브에서도 관련 동영상까지 합쳐 100만 명이 넘어가는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최고의 올림픽 주제곡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코리아나가 서 있는 무대 주위를 돌고 있는 독수리와, 곰, 그리고 호랑이가 손에 손을 잡고 무대를 도는 퍼포먼스가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위 동영상의 4분 9초정도에서 볼 수 있으며, 이는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와 소련을 상징하는 불곰, 그리고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호랑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상당한 퀄리티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냉전 시대를 살아가던 1988년 당시 세계인들의 염원이었던 세계 평화에 관한 가사 내용은 말 그대로 그들을 고무시켰는 지도 모르겠다.  (냉전 당시의 사람들이 늘 3차 세계대전이나 핵전쟁의 가능성을 염두해 두며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가야만 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대한민국 한정으로 2차 남북전쟁도 포함해서)

이 노래가 선정되는 과정 초기에 대한민국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인데 왜 외국 작곡가의 곡을 공식 주제곡으로 사용하느냐는 비난 여론이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노래는 무조건 한국어로 불리워져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고, 시대적 배경에 맞춰 당시 많은 가수들이 서울 올림픽을 주제로 한 곡들을 많이 내기도 했으며, 우리나라에도 작곡을 의뢰할 수 있는 작곡가들이 있는데 굳이 왜 외국인 작곡가의 곡을 주제곡으로 사용한단 말인가.  (간단한 예로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당시 브라운아이즈, 박정현, 케미스트리, 그리고 소웰루가 불렀던 Let's Get Together Now" 라는 공식 주제가 외에도 한국에서 클론의 "발로 차" 등을 생각해보면 된다)  주제곡 선정 과정 초반에는 80년 대에 활동했던 가수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 라는 노래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올림픽 조직 위원회는 당시 국내에서 만들어졌던 모든 올림픽 관련 곡들과 "손에 손잡고"를 비교 감상하는 이벤트를 열어버렸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워낙 "손에 손잡고" 의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결국은 공식 주제가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미국은 예외로 '손에 손잡고' 대신 미국 국내용으로 NBC가 故 Whitney Houston의 'One Moment in Time'을 대회 주제곡으로 사용했다)
 

사진 출처: http://blog.paran.com/wingon76/39322127

# 동과 서의 만남
대한민국이 진영에 상관 없이 공산주의 국가들과 대대적으로 수교하기 시작한 것이 1989년부터라고 하니 이 부분에서 올림픽의 영향력이 없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한중수교는 1992년에 이루어졌다)  혹자들은 서울 올림픽이 동구권 와해와 국제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외교력을 높이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하는데, 북한의 왜곡된 선전으로 인해 대한민국을 '헐벗고 굶주린 채 오늘 내일 망해가는 나라'로 알고 있던 동유럽 공산 국가들과 그 국민들이 서울 올림픽을 통해 상당한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알게 되자 공산 정권에 회의감을 갖게 된 것이고, 이 것이 공산 진영 와해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이 모든 공산 국가들보다 경제력으로 앞서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동독과 소련의 1인당 GNP는 1987년에는 아직 대한민국의 2배를 넘고 있었다)

이렇듯 올림픽을 상징하는 주제곡 '손에 손잡고' 는 복잡한 정치적, 이념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던 세계가 하나로 될 수 있음을 그 운율 속에서 보여주었다.

# 올림픽의 의의 
반면에 대한민국의 내부 사정을 살펴보았을 때, 화합과 평화의 축제인 올림픽이 여러가지 민주화 운동을 거치고 이제 막 전두환의 제5 공화국이 종식된 땅에서 개최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전두환 대통령은 끝까지 올림픽을 핑계로 직선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기도 했었다.  올림픽 유치시도 역시 3S라는 그의 우민화 정책 - 영화와 스포츠, 섹스로 대표되는 - 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물론 개최 자체는 그 전의 박정희 대통령때도 계속 언급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제5 공화국의 퇴진을 불러온 6월 항쟁과 6.29 선언의 명분들 중 하나가 '민주화 없이 (또는 혼란스러운 정국의 상황에서는) 도저히 올림픽을 치를 수 없다' 라는 점이었기 때문에 올림픽 유치는 전두환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정권의 몰락에 기여하는 셈이 되었다.  교황청은 당시 한국의 인권이 해결되지 않으면 올림픽 보이콧 운동을 시작할 의사가 있었으며, 또한 당시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반열에 올라있던 Jesse Jackson 목사는 '한국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미국 정부에 보이콧을 요구할 것'이라고 당시 주미 한국 대사에게 전달한 적도 있었다.  (출처: 쌍팔년도식 손님맞이는 이제 그만~ - 한겨레 21)  만약 6월 항쟁이 6.29 선언이라는 평화적인 결과가 아닌 1980년의 광주사태 처럼 유혈사태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면,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은 이전의 두 올림픽처럼 실패한 올림픽이 되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전두환 정권때에 올림픽이 유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태우가 '외국 관중들이 전두환을 보고 야유를 하면 국제망신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전두환을 올림픽 개최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아이러니한 일도 있었다. 결국 전두환은 자기 집에서 TV로 노태우가 올림픽 개회선언을 하는 걸 봐야했다. 재주는 전두환이 부리고 받아먹는건 노태우 이 때부터 전두환과 노태우의 관계는 험악일로를 걷게된다. 결국 화합의 대제전인 올림픽이 두 사람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은 것. 이것이 결국 백담사행의 서막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불완전하지만, 5공 청산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출처: 1998 서울 올림픽 - 엔하위키)


대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한국의 경제 발전을 전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성공과 4년 후 동구권의 몰락 과정을 통해 한국의 운동권은 크게 쇠퇴한다.  이 운동권 인사들은 올림픽 개최에 대한 반대 운동도 전개하고, 북한이 주장한 남북공동개최까지 지지했던 덕에 더욱 커다란 역풍을 맞은 것이다.  본격적으로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정책보다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중산층이 구체화된 것도 올림픽의 여파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남북간의 체제 경쟁 속에서 대한민국이 북한을 완벽하게 눌렀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며, 그 이후에도 따라온 여러가지 국제적 행사들 (월드컵, G20 등) 과 함께 88 올림픽은 국가 이미지의 일부가 되었다.  (같은 시기 엔고와 삼저호황도 함께 몰아닥쳐서 대한민국이 당시 누린 경제적 효과는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반면에 이런 성공에는 부작용도 있었는데,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투자 덕분에, 결과적으로 시장에는 물가 폭등이 찾아오고, 주택 문제가 생겨나면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부동산 문제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1980년대 말부터 한국은 이미 극심한 주택난과 물가 폭등으로 인해 새롭게 자리잡은 중산층, 그리고 서민들의 경제에 후유증이 오게 된다.  올림픽으로 인한 거품 경제는 주가를 1000 선까지 돌파하게 만들었지만, 바로 무너지는 등, 국민과 기업들이 소유한 동산과 부동산 양쪽에서 버블이 생기기 시작한다.  주택으로 생긴 문제들은 이후 수도권의 대규모 신도시 건설 (일산, 분당, 중동 등) 로 일단 모면하지만, 1997년의 IMF 외환 위기까지 그 여파가 남아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또한 올림픽은 월드컵과는 달리 취지 자체가 '국가'가 아닌 '도시' 단위로 유치하는 개념이었다.  물론 특정 도시가 개최를 희망할 때 국가 차원에서 지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 차원의 중요성을 가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1976년 캐나다의 몬트리올 올림픽은 사상 최악의 적자를 내었고, 이는 전세계로 하여금 올림픽 개최의 경제성에 회의감을 가져다 주었다.  (이후에 캐나다는 벤쿠버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10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고, 여기에는 IOC의 지원금이 4억 9천만 달러가 투입되었지만 캐나다 정부는 그래도 적자를 해소하지 못한 채 벤쿠버와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의 세금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인해 정반대로 급변했다.  특히 국가적인 차원의 지원이 올림픽 유치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다는 개념, 그리고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가 국가의 위신을 높일 수 있다는 개념이 생겨나면서, 1998년 당시 한국과 경제적으로 크게 다를 것이 없었던 국가들이 올림픽 유치를 위해 국가적인 역량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이 때부터 올림픽을 노리기 시작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이런 추세는 급기야 2012년 하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영국의 Tony Blair 총리가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하거나, 2014년 동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이나 러시아의 Vladimir Putin이 직접 참석하는 사태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사진 출처: http://gong-jja.tistory.com/213

# 동에서 서를 생각하다
대한민국은 서울 올림픽을 통해 동구권 국가들에게 자유 진영의 우수성을 증명할 수 있었고, 이런 사실들이 동구권의 몰락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학설들이 있다는 것은 위에서도 설명했다.  그렇다면, 해외여행이 아직 자유롭지않아 동구권을 그저 북한과 같이 '우리의 주적들의 동지들' 로 생각했을 일반 시민들, 혹은 '우리가 언젠가 따라가야할 이상적인 이념을 신봉하는 국가들' 로 보았을 극좌 운동권 활동가들에게는 이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가 어떻게 비춰졌을까?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공산 진영의 붕괴는, 국내의 일부 강경했던 좌파 그룹들의 속성들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후에 진보적인 인사들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속성이 늘어났으며,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사민주의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대표적인 예로 민중당의 이재오, 김문수 등이 있으며, 이후에 이들은 김영삼의 권유로 민주자유당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또한 제4, 제5 공화국 시절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민주적 언론인의 대명사로 명성을 떨쳤던 조갑제가 완전히 정치적인 전향을 하게 된 계기가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경영사례를 몸소 체험한 다음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다.

또한 올림픽 당시 소련 대표팀은 대한민국으로부터 엄청난 응원을 받았는데, 특히 일본과 소련의 경기에서는 대한민국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았다.  이 당시에는 아직 냉전이 끝나지 않은 데다가 대한항공기 격추사건이 일어난지 5년이 채 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소련의 참가를 위해 국내외적으로 노력했고, 결국 소련도 개방적인 성향을 가졌던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올림픽 참가를 결정했으며, 이에 따라 수많은 동구권 국가들이 따라왔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소련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련은 남자 농구 준결승전에서 미국을 따돌리고 (이 때도 우리 국민들의 응원을 받았다) 결승에 올라가 금메달까지 획득했다.  (이후에 미국이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NBA 스타들을 총출동시켜 우승을 차지하기는 한다)

1. 이 당시 대한민국은 인공기 게양을 댓가로 북한의 참여를 종용하기도 했지만 북한은 거절한다.
2. 북한의 김일성은 러시아의 고르바초프에 서울 올림픽 불참을 제의하지만 거절 당한다.

사회주의의 정점이었던 소련이 북한을 버리고 대한민국 개최의 올림픽 참가를 결정한 것과, 미국이 아닌 소련을 응원하는 대한민국 관중들의 모습은 대한민국에게 가져다주는 미국의 의미와 소련의 의미에 대한 사회적인 고찰을 하게 만들었다.  이는 전세계인들로 하여금 개방적이고 다각도로 이루어지는 국제 정세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마련해 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일련의 과정에서 남북한의 체제경쟁 속에서 남한이 승리했음을 알게되어 충격을 받고 전향한 운동권 학생들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이런 이념과 사상의 대립, 갈등 해소의 과정들 속에서 가려졌던 대한민국 내부의 문제점들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는데, 경기장 건설 및 환경정비라는 명목으로 수십만 주민이 길거리로 내몰렸고 심지어는 성화봉송 중에 불량주택이 보이면 곤란하다며 전국의 성화봉송 루트의 판자집을 전부 무단 철거해버렸다. 부랑자, 거지, 정신장애인들은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거리에서 보이면 잡혀가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뒤에 나오는 장애인 올림픽을 생각하면 안습.


올림픽 선수들이 입국하는 관문 공항인 김포국제공항과 주 간선도로가 되는 경인고속도로 주변의 판자촌 및 빈민가는 이 때 철거된다. 아울러 사격 경기가 열리는 태릉 국제사격장 인근의 빈민가 및 황량한 부지도 있어 보이기 위해 개발된다. 이는 오늘날 각각 목동과 상계동의 아파트 단지가 되는 곳인데, 이 과정을 통해 허허벌판이던 양천구와 노원구는 급격하게 풍경이 달라져 주거 단지이자,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곳으로 탈바꿈한다. 아울러 부천의 원미, 오정 일대도 역시 개발 바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빈민가에 있던 사람들은 밀려나서 난곡이나 시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 때 쫓겨난 철거민들이 생존권을 위해 단체들을 만들게 되며, 이들 중 과격파가 바로 전철연이다. 즉, 광주대단지사건을 통해 표면화된 철거민 문제와 철거민 운동이 비로소 본격화된 것이 바로 88올림픽 준비 과정이었다.

서양의 이목을 의식해 (도시 내에서) 개고기가 금지된 때도 이 때. 수많은 보신탕 집들이 문을 닫았고 보신탕이라는 이름 대신 사철탕으로 이름을 바꾸어 음지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또 외국인 관광객이 우리나라 음식을 모르기 때문에 서울시 내 음식점에서는 필수적으로 점포 내에 플라스틱 음식 모형을 비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점주들이 이를 갖추느라 고생하기도 했다.  (출처: 1998 서울 올림픽 - 엔하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