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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Episode/비화

UC 버클리의 자유언론운동 (Free Speech Movement)

Moffit Library와 Main Stack, 그리고 FSM Cafe로 이어져 있는 FSM 정문

버클리 학생들 중 모핏 도서관(Moffit Library) 앞의 자유언론운동까페(Free Speech Movement Café)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남들보다 좀 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스프라울 광장(SproulPlaza)에 있는 동그란 원에 적힌 글을 보고 궁금해했을 것이다. 1960년대 버클리를뜨겁게 달궜던 자유 언론 운동(Free Speech Movement; FSM)은 1960년대 시민 운동을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Free Speech Circle. 버클리 대학 정문 앞 스프라울 광장에 있다

FSM의 근원은 1950~60년대의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이었다. 남부에서흑인들의 불복종 운동에 크게 자극 받은 북부의 백인 학생들은 점차 사회 문제에 눈을 뜨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버클리에서도 SLATE나 SNCC와같은 학생 단체들이 학교 바깥의 사회 문제, 특히 인종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단체들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학생들이 북적이는 뱅크로프트(Bancroft)와텔레그래프(Telegraph) 교차로에서 기금을 모으고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섰다. 그런데 1964년 9월학교측은 교내에서 모든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는 새로운 학칙을 발표한다. 이에 따라 학생 단체들로 하여금뱅크로프트-텔레그래프 교차로에서 철수하도록 명령했는데, 당시관습적으로 뱅크로프트-텔레그래프 교차로는 버클리 시 소유라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학생들은 순순히 따르지않았다. 학교 당국은 40년대와 50년대 사이 새더 게이트(Sather Gate)와 뱅크로프트 사이의땅을 매입했었다는 사실을 끄집어내어 새로운 학칙을 정당화하려고 했는데, 이 뒤에는 시민 운동의 확장을꺼리던 오클랜드 트리뷴과 같은 보수적인 단체들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FSM의 비공식적 리더 중 하나였던 마리오 사비오(Mario Savio)는 당시 21세의 철학과 3학년으로, 흑인 차별 철폐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새로운 학칙을 철회하기 위해 왼쪽으로는 독립 사회주의자(IndependentSocialists)로부터 오른쪽으로는 청년 공화당원(Young Republicans)까지광범위한 학생 단체들의 연대와 단결된 청원과 호소가 있었지만 학교 당국은 완고했고 학칙은 시행됐다. 결국학생 단체들은 아예 학칙을 어기는 것으로 직접 행동에 돌입했다. 1964년 10월 1일 결국 인종 평등 회의(CORE)의선전물을 나눠주던 잭 웨인버그(Jack Weinberg)를 학교 경찰이 연행하면서 FSM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웨인버그는 캠퍼스 내에서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새로운 학칙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경찰차 안으로 연행되는 도중 누군가 “앉자!”고 외쳤고 모여 있던 수백명의 학생들이 경찰차를 둘러싸고 앉았다. 이는경찰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웨인버그의 연행을 막기 위해 경찰차를 둘러싸고 연좌농성에 들어간 학생들

32시간의 농성 끝에 웨인버그는 풀려나고, 학교 당국은 캠퍼스 내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새 학칙을 다시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약속했다. 이후 FSM은 다수의 학생들과 교수들의 지지를 얻어내며 3개월 가량 지속되었다. FSM은 처음에는 미국 헌법에서 상당히 보수적인 부분에 속하는 "언론 자유"라는 주제를 가지고 시작했으나 점차 교육 체계, 관료제, 사회 체제를 비판하는 신좌파적인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흑인 차별에 대해 분노하던 학생들은 점차 자신들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뜨게 되었고, 그동안 쌓여 왔던 억울함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산업에서 요구하는 기술과 인재를 공급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했고, 캘리포니아 대학, 그 중에서도 버클리는 총아라고 할 수 있었다. 정부는 버클리에 대해 아낌없는 지원을 퍼부었고, 1959년 총장이던 클락 커(Clark Kerr)에 의해 캘리포니아 주 고등학교에서 상위 1/8 안에 속하는 학생들에게만 입학을 허가하는 정책이 통과되면서 버클리는 돈과 인재가 몰리는 거대한 학교가 되었다. 하지만 버클리는 점차 기업 및 연방 정부에서 요구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해결하는 지식 공장으로 변해갔고, 학부생에 대한 처우는 엉망이 되어갔다. 지금도 버클리는 교수와 학생 사이 비율이 매우 낮은 편이지만, 1960년대는 이 비율이 1:20까지 내려갔다. 당시 입학한 신입생들은 수백명이 모여서 대학원생이 교수 대신 가르치는 수업을 들어야 했다. 또한 당시 학교 당국의 인식은 상당히 구시대적인 것이라서, 학교는 학생들에게 "부모를 대신하는 in loco parentis" 역할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교수들 또한 충성 서약(loyalty oath)을 하지 않으면 강단에 설 수 없었다. 이처럼 학교 당국이 학생들과 교수들에 대해 고압적인 자세를 고수하며, 소통을 거부했던 것이다.

경찰차 사건 이후 3개월 동안 버클리에서는 학교-학생 뿐만 아니라 학생-학생, 학생-교수 간에도 많은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언론의 자유는 물론, 그동안 모두가 침묵하고 있던 시스템적인 문제에 대한 담론이 많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학칙"에 대한 학교 당국과의 협상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2월 2일, 약 1500명~4000명의 학생들이 교섭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스프라울 홀을 점거하기 위해 모였다. 점거에 들어가기 직전 마리오 사비오(Mario Savio)는 전설적인 연설을 한다.

(연설문의 내용은 http://www.fsm-a.org/stacks/mario/mario_speech.html에서 볼 수 있다.)

연설이 끝나고 약 천여명의 학생들이 학생들은 먹을 것과 공부할 것, 기타와 영화를 들고 스프라울 홀 안에 들어갔다. 점거 동안 스프라울 홀은 평화롭고 질서정연했으나, 대학 본부 점령은 그 자체만으로도 학교 당국의 권위와 나아가서 기존 사회 질서에 균열을 내는 혁명적이고도 불온한 것이었다.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버클리 캠퍼스 내에 주 경찰과 주 방위군을 출동시켰고, 학생들을 연행하여 3일만에 무려 773명이 체포되고 점거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다음날 농성자들의 체포 소식을 전해들은 학생들은 분노하여 즉시 동맹휴학에 들어간다. 이때 교수 대신 격무에 시달리던 대학원생들은 물론,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교수들도 가담하여 휴학에 참여하는 인원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결국 캘리포니아 대학 이사회는 당시 버클리 총장 스트롱을 해임하고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한다. 단결된 힘이 마침내 승리를 얻어낸 것이다.

새더 게이트 앞의 학생과 교수들, 아직까지 버클리 철학과 교수를 맡고 있는 John Searle 교수(FREE SPEECH 피켓 뒤)가 보인다.

FSM은 1960년대 학생운동의 분수령과 같아서 이후의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히피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FSM 이후 버클리는 6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학생/교수들이 어떤 사상이나 사실도 자유롭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는 생각(Academic Freedom)이 버클리에 깊게 뿌리내게 되었다. 자율적인 분위기, 학생회(ASUC)의 큰 권한, 민주적인 의사결정체제, 역동성 등 혁명은 끝났지만 혁명이 남긴 성과는 셀 수 없이 많다. 그것이 아마 우리가 캠퍼스 곳곳에 FSM과 관련된 기념물을 두는 이유일 것이다.

※ FSM과 관련된 자료를 더 보려면 FSM Cafe 또는 Moffit FSM Archive을 가면 된다. 이 글은 안효상씨의 논문위키피디아를 주로 참고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