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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국제 :: Worldpost

한중수교와 대만관계로 바라본 남북한의 미래

(사진 출처: 프레시안, http://image.pressian.com/images/2010/08/23/40100823111331.jpg)

출처: 동관한국상공회 (http://dgkorean.com/bbs/zboard.php?id=dasin&no=455)
날짜: 2007-07-14 13:08:27

한중 수교 15주년이 40일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중국측에서 양국 수교 비사가 공개되고 있다.

한.중 수교 회담 당시 실무협상대표단의 일원이었고 초대 주한 중국대사를 지낸 장팅옌(張庭延)은 베이징(北京)에서 발행되는 세계신문보(世界新聞報)에 연재중인 중.한수교시리즈에서 수교협상의 전모를 밝혔다. 장 전대사는 12일 현재 2번까지 나온 시리즈에서 한중수교의 필요성을 먼저 느낀 측은 아시안게임 개최를 간절히 원한 중국이었다고 털어놓았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유치를 위해선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이사국이며 아시아 스포츠강국인 한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수적이었다는 것.

다음은 시리즈의 요약이다.

중국은 각종 국제 행사에서 한국과의 교류에 활발히 나서면서 86서울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후 1992년 첸치천(錢其琛) 당시 중국 외교 부장의 방한으로 한.중수교의 중요 전기를 마련했다. 노태우(盧泰愚)당시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제3차 장관급 회의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첸 부장을 별도로 접견, 한.중 관계 수교의 희망을 피력했다.

APEC 회원 가입을 위해 중국 외교총수가 50년간 적대국이던 한국을 방문한 것도 이례적이어서 한.중 관계 변화 가능성을 놓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노대통령이 첸 부장을 단독 접견한 것도 파격적이어서 수교 협상 분위기는 무르익었음을 시사했다.

한국은 이미 1983년 국내에 불시착한 중국 민항기 사건과 1985년 어뢰정 사건를 신속하게 처리하며 수교를 원하는 중국 측에 화답했다.  수교 협상의 물꼬를 튼 것은 1992년 4월 이상옥 외교장관의 중국 방문.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명분이었지만 사실상 양국 수교협상을 위한 외교장관 회담이 방중의 주목적이었다.

이상옥 장관과 첸 부장은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열린 회담에서 수교 협상 착수에 합의했다. 양측 실무대표단은 수석대표는 차관급으로 하고 부대표는 대사급으로 하기로 했다. 이밖에 대표단원은 각각 6-7명선이었다.  한국측 수석 대표는 노창희 차관, 부대표는 권병현 대사로 구성됐고 중국측은 쉬둔신(徐敦信) 부부장과 장루이제(張瑞杰) 대사가 각각 수석대표와 부대표를 맡았다.

양측 대표단은 92년 5월과 6월 베이징 댜오위타이 14호각에서 각각 1,2차 협상을 한데 이어 3차는 서울로 장소를 옮겼다.  한국측은 수교 협상 진행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노태우대통령과 청와대 외교 안보 수석, 그리고 외무장관등 3명에 불과할 정도로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다.  한국측 회담 대표단은 회담이 없을때도 댜오위타이 밖을 나선 적이 없고 베이징에 출장올 때 가족에게 행선지를 비밀에 부쳐 부인들은 여름철과 겨울철 옷을 모두 챙겨줘야 했다.

수교 협상의 큰 걸림돌은 역시 대만문제와 북한 문제였다.

한국은 곡절끝에 마침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하고 대만과 단교하기로 했다.  중국은 빠른 시일내에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바라는 한민족의 염원을 존중하고 한민족 자체적인 평화통일을 지원키로 했다.  중국은 한.중수교발표이전에 첸치천 부장을 평양에 파견, 고 김일성 주석에게 수교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구했다. 첸치천 부장은 10대 외교비사라는 회고록에서 당시 김일성 주석이 침통해했던 사실을 밝혔다.

반면 한국은 대만에 한.중 수교 사실을 마지막 순간까지 비밀로 했고 마침내 막판에 이를 눈치챈 대만측이 한.중 수교 이틀전인 92년 8월22일 먼저 한국과 단교를 선언했다.

한중수교 직전까지 대만과 중국의 관계는 한국과 북한의 그것과 비슷했다.  이념과 외교적 이해의 차이로 인해 서로의 입장이 양립할 수 없었던 현실 아래서 공존하고 있었 나라들.  하지만, 특정 국가를 "외교적인" 관점에서 인정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대만이나 중국, 한국, 북한은 현실적으로 각각 독립된 국가의 개념이다.  즉, 한국이 아무리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하더라도, 대만과의 모든 외교를 중국 만을 통해서 하지는 않는다.  비공식적이긴 해도 일본과 대만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으며, 미국은 닉슨 정권 시절 중국과 수교하기는 했어도 대만 관계법을 지정해 놓는 등, 현재까지 직접적인 외교 채널을 유지하고 있다.

한중수교는 1992년에 이루어졌다.  나는 아직도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기 때문에 이 수교는 베를린 장벽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약간의 장면과 자막들만 어렴풋이 생각날 뿐이다.  따라서, 그저 내가 어느 정도 글자를 읽을 수 있고 국제 정치외교에 관심을 가질 나이가 되어서야 그 당시의 기록들을 조사하고 나름대로 결과를 유추하며 분석을 해보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2010년이 끝나가는 현재의 시점에서 현재의 국제 정세을 고려한다면, 한중관계 - 비록 여러가지 대립이 있기는 하지만 - 그래도 상당히 끈끈한 편이다.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 것은 분명히 정부의 현명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현재 한중관계의 긍정적 지표들을 보여주는 예이다.

미국과 일본을 합친 것보다 많은 상호 교역액, 500억 달러에 달하는 대중 투자, 5만개에 육박하는 대중국 진출 기업, 100만 명에 가까운 중국 상주인구, 주당 830여 편에 달하는 항공편, 중국은 명실상부한 우리나라의 제1 교역 파트너, 그리고 양국을 교차하는 한류와 중국 붐, 수교 이후 50여 차례에 이르는 양국 정상의 만남, '전략적 협력 동반자'라는 외교적으로는 최고 수준의 쌍방 관계… (출처: 프레시안, 2010-08-23)

대표적인 일중간의 갈등, 한국과 대만도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다 (사진 출처: 독도본부, http://www.dokdocenter.org/)

물론 양국 사이에 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늘분쟁같은 무역적 대립으로 부터 동북공정이나 최근의 한글 키보드 표준같은 문화적인 분쟁까지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다만, 그런 대립들을 살펴보았을 때,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중국이 관여된 다른 외교분쟁들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평화적이며 원만한 대립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가장 최근의 예로 어선과 순시선의 충돌로 인해 경제 대립까지 벌어지고 있는 일중간의 무역 분쟁이나, 좀더 큰 스케일에서 미중간의 환율 대립 문제가 있다.  중국 투자경험이 있는 전문적인 경제인들의 의견은 다소 다를 수도 있지만, 이런 문제들에 비해 한중관계는 상당히 양호하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따라서 현재 중국과의 관계는 상당히 원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는 1992년의 수교를 통해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조금 이야기를 비틀어서 그 수교의 방법을 논해 싶다.

동관한국상공회에서 인용한 위의 기사에도 언급되어있지만, 수교 당시 중국은 북한에 미리 통고를 해둔 상태였다.  소련 시절부터 끈끈하게 이어져온 두 나라의 관계는 같은 공산국가이면서도 동구권의 다른 위성국가들과는 달리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꾸려왔다.  (그 과정에서 소련의 통제가 없었기 때문에 벌어졌던 문화대혁명 같은 사건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중수교당시 중국은 북한에 '명분 상의' 예의를 최대한 차려주었다.  외교 특사를 보냄은 물론이고, 남·북한 동시 수교국인 현재의 입장에서도 중국은 이를테면 북한이 믿을 수 있는 마지막 조력자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반면에 동아시아 자유주의 이념 아래서 함께 했었던 한국과 대만의 단교 당시 상황과 현재의 관계는 어떤가?

자유진영의 한 국가인 남한이 공산권의 중국과 수교를 시도했다는 점을 명제로 규정하면, 이 수교 과정이 공개적일 수 없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한국은 이미 미중수교라는 선례를 보지 않았던가.  당시 한국의 외교적 위상을 생각한다면 미국이 책정한 대만 관계법 같은 것까지는 기대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 단교후 대만에게 안 좋은 인상을 줄 필요는 없었다.  비슷한 입장이었던 일본도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대만에 단교를 통보했지만, 현재까지도 대만은 일본에 호의적인 입장이다.  이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최소한 대만이 남한보다는 일본에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고려해본다면, 대만과 일본의 문화적 동질성이나 그 관계에서 나오는 경제적 이해관계보다도 '스스로 친구를 잃어서 좋을 것이 없는' 대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케이스이다.  왜 한국은 대만과 이런 관계로 남지 못했는가?

분명히 대만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한 시도는 국내에도 있었을 것이다.  일단 수교 자체가 극비로 진행된 것 자체가 대만을 자극시키지 않는다는 의도를 다분히 포함할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끝까지 잘 비밀로 몰고 갔어야하지 않을까.  극비로 진행되던 수교 과정은 결국 수교 이틀 전, 대만에서 기정사실화 되어버렸고, 이를 눈치 챈 대만은 미리 한국에 단교를 통보한다.  즉, 한국은 자존심을 구겼다.  수교의 과정에서 보통사람노태우 정권이 다른 것들은 다 잘해놓고, 왜 이 부분만큼은 마지막까지 비밀을 지켜내지 못한걸까?  아니면, 어차피 대만은 언젠가는 중국에 흡수 합병될테니 그냥 놔두어도 된다고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생각하셨던 걸까?  원래 이런 일들은 다들 어른의 사정이 있는 법일 것이다.

과거의 유엔 상임이사국의 지위까지 보유했던 대만은, 그러나 이제는 외교적으로 전세계 이곳 저곳에서 무시당하는 수준까지 내려오고 말았다.  그나마, 중소기업 기반의 중고급 전자기술로 아직 나라가 무너질 것 같은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 중에는 자력으로 대기업화를 이루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언젠가 일본과 한국의 하청업체가 되거나 중국의 기업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긴 해도, 대만은 아직 중국 본토에서 주창하는 '하나의 중국' 을 거부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는 나라다.  지금은 중국의 세력이 커졌으니 국제적으로 대만이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적어도 대만인들의 이런 자주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이 쪽도 문제가 많다.  천수이볜의 임기가 끝났을 때, 그는 민진당의 비리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수감되었다.  작년 겨울 선거에서 민진당은 다시 약진을 하기도 했지만, 현재 대만의 정치권은 국민당으로 돌아온 상태.  문제는, 이 국민당이 장제스의 후신들인 것을 감안하면 중국에 다소 적대적인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들의 당색은 기본적으로 중국 본토와의 대립은 피하고 있다, 오히려 비교적 왼쪽에 있다고 볼 수도 있는 민진당이 훨씬 이런 것에 적대적이었다, 어느 나라의 친북좌파 세력들과는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대로 가다가는 중국의 대만성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양안관계를 남북관계에 대입해보고자 한다.  '하나의 중국' 을 굳이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중국 본토의 공산당 이외에 다른 세력이 중국을 대표할 수 없다는 정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만과 중국 양쪽에 동시외교를 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남북한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걸까?  정치권이나 군사권에서나 우리는 가상 주적을 북한으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나 대중에 무언가의 대북관련 뉴스가 발표되어질 때는 '유사시' 라던지 '제 2차 남북전쟁' 이라던지의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부정적 요소에 대한 언급을 되도록 삼가야 하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이 말을 풀어쓰자면, '공식적으로는 적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적이 아니다' 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이를 국제적으로 보자면 남과 북의 통일보다는 중국의 대만 흡수가 좀더 쉬워보인다.  우리와 달리, 이 쪽은 양립이 불가능한 관계이기 때문에 정 안되는 상황이 온다면 전쟁을 벌일 명분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시작하면 된다.

대만관계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UN동시가입안'을 마련한 것은 노태우 정부의 외교적 성과중 하나이다. 다만 이로 인해 남과 북이 별개의 국가로 인식되어지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남북한은 왠지 이제는 각각 다른 나라가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동시에 UN에 가입한 것은 물론이고, 150개도 넘는 다른 나라들과 역시 동시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이를 돌려 말하자면 150개도 넘는 외국에서 남한과 북한을 다른 나라로 인식한다는 개념이 된다.  이는 현재 남한의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해 국민이 명확하게 알 수 없었던 미스터리나, 최근 보내는 구호 물자들, 중단된 금강산 관광, 군사 훈련에 대한 항의 등등.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어떻게 보면 분열된 국가가 아닌 그저 지리적으로 가까운 두개 이상의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외교적 문제로 비춰지는 것은 왜일까?  이런 식으로 관계가 지속된다면 그저 남북한의 '서먹서먹한 남'의 관계가 되어버릴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대신 전쟁이 일어날 일은 의외로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현재의 한일관계처럼.

개인적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국가에 대한 외교관계는 현재의 한일관계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전쟁 (군사나 경제등 모든 방면으로) 까지는 가지 않으면서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민간 수준에서는 협력하는 것, 또한 양국의 문화적, 경제적 차이가 크지 않으며 서로에게 이익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는 한중관계에서는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도 잘 살고 있는 한국이지만, 한중관계가 아무리 발전되어도 한일관계처럼은 될 수 없다.  북중관계는 북한이 약자에 있는 입장이지만 한미관계만큼이나 아직은 충분히 끈끈한 상태이다.  따라서, 남북관계의 이상향은 한일관계가 아니다.  도데체 우리는 북한과 어떤 관계를 수립해야 하는가?

약간의 부연 설명을 하고자 한다.  지금의 중국은 짝퉁이나 만들고 세계구급으로 놀림거리를 제공하곤 하지만, 그들이 역사적으로 끼쳐온 다방면의 문화적 영향은 절대 무시할 수 없으며, 불과 2, 3세기만 거슬러 올라가도 세계 초강대국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미 중국은 강대국이다.  인구 1위, 무역규모 1위, 외환보유고 1위, 경제규모 세계 2위이며 최근 보여지는 일말의 지표를 보면 개개인의 경제력은 아직 모자랄지 몰라도, 국가 규모의 실질적 영향력은 이미 일본의 그것을 능가한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나 북한 문제까지 걸려있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런 중국의 지위를 어느정도 인정해야만 하는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한중관계는 외교적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다.  또한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지난 날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중국과 견고한 외교관계를 구축해왔다.  그런데 한국의 우방은 일본과 미국이지 절대로 북한과 중국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중국과 미국.  한국에게 있어 외교적으로 중요한 이 두 나라가 공산진영 붕괴후 전세계 곳곳에서 대립하는 상태이다.  최근에는 환율 전쟁 비슷한 것들까지 벌어짐으로서 주변에 있던 한국과 일본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런 두 나라의 외교적 역학 관계 (러시아는 배제) 도 남북한의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리고 현재의 시점에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어쩌면 연방제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다만, 중국이 여전히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까지 완벽히 제칠 수 있는가는 별도의 문제. 경제규모의 추월은 대략 2027년경으로 예상되지만 미국의 군사력과 기술력, 국민들의 삶의 질은 중국에 비해 압도적이며, 지난 100년간 세계를 주름잡았던 경력을 중국이 그리 쉽게 따라잡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게다가 중국의 인구때문에 오는 문제는 실로 엄청나서, 최소한 6억 이상의 사람들은 아프리카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또한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지금 중국이 무역시장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노리는 인도, 브라질 등 신흥대국과의 경쟁에서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고려하면 중국에 장밋빛 미래만이 있다고 해도 현 세대가 죽을 때까지는 중국보다는 미국이다.  따라서 정말 중국이 2027년경에 미국의 국력을 추월할 것인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전문가도 있다.그전에 성장이 둔화되어 주저앉을 것이라 보는 시선.  (출처: 엔하위키)

글의 방향이 러시아를 제외한 동북아 외교로 집중되어진 것 같다.  여담이지만, 북한은 예전에 이집트에 치안유지의 명목으로 일부 병력을 파견한 적이 있다.  당시에 한국과 이집트는 아직 영사급 관계였고, 중동 국가들과는 외교적으로 많이 가까워지기 전이었다.  (동구권과의 교류 물꼬를 튼 것도 김우중 같은 민간의 경제인들이었지 아직 정부가 공식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니었다)  그런데, 북한의 호의를 잊지 않은 이집트는 이후에도 무바라크 정권이 북한의 김일성이 서거하기 전까지 남한과의 외교 관계를 영사급 이상으로 격상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국과 이집트가 대사급 관계를 수립한 것은 김일성 서거 다음 해인 1995년이다.  미국은 우방의 지도자였던 장개석의 사망 4년 뒤에 미중수교를 했고, 한국은 명목상으로는 어쨌든 92년에 단교 '당하기' 전 까지는 대만과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이렇게 따져보면, 한국은 분명히 할만큼 한 것 같은데 왜 대만한테 그렇게 욕을 먹었을까.  역시 외교는 잘 하는 사람들이 해야된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앞으로 대만의 위상이 국제무대에서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단교를 당하든 단교를 우리측에서 먼저 하든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우리만 욕 먹는건 기분 나쁘다.

현재의 남북관계에서는 이런 점들을 배제한 채 - 궁극적인 목적이 통일이든 아니든 - 대한민국 정부가 잘 풀어나가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수 많은 외교전이 벌어지는 동아시아에서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가능한 현명하게 계속 대처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