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의 총성: (1) 비스마르크와 동맹체계

Posted by 안녕이야기
2011.02.01 22:01 EDITORIAL/국제 :: Worldpost
사라예보의 총성 은 미국 UC Berkeley 대학교에서 역사학부 교수로 계신 David Wetzel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집필 하게되었습니다. 강의를 통해 배우고 느꼈던 부분을 필자의 필체와 방식으로 표현된 연재물임을 이렇게 밝힙니다. 

1970년도의 한국은 격동의 시기였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울려퍼진 몇발의 총성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15년에 가까운 유신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국사의 한 장을 차지했던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양극으로 나뉘지만, 1980대에 들어설 당시 한국이 어느정도의 산업화를 이룬 국가라는 점은 부정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1970년대, 다른 국가에서 역시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이 시점에 이 두 초강대국들은 이미 지구밖으로 위성을 쏘아 올릴만큼 진보적인 과학 기술을 가진 기술대국으로 자리잡았다. 일본 역시, 2차대전의 참패에 뒤따른 민주화 작업을 통해 제국주의국가에서 의회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다. 1970년대에 들어설때쯤, 동남아시아에 있는 웬만한 나라들 역시도 식민지주의에서 해방함으로써, 각자 홀로서기를 위한 몸부림을 치는 중에 있었다.
 
이와 같이, 1970년대 쯤이면,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어느정도 문명화가 이루어 지고, 품격있는 삶의 질을 추구하는 노력을 하는 과정에 있을거라 느끼는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보인다. 그렇기에, 1970년도 당시,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엄청난 문명적 퇴보는 더욱 경악스러운 사건으로 다가온다.

1975년 봄의 캄보디아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캄보디아는, 2차대전 이후 팽배했던 반식민지화 정책으로 인해 해방된 여러 나라들중에 하나였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지속되어 왔던 하나의 체제가 바뀌는 변환점은 주로 분열과 다툼의 여지를 제공하기 마련이다.
 
1953년, 캄보디아의 정치적 공백을 노로돔 시아누크라는 사람이 채우게 된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수상으로서 시아누크의 행적들은 그다지 대중의 환영을 받을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권력남용으로 인한 부패한 정권, 시민들의 의견이 억압받는 사회, 대중들은 이런 시아누크의 체제에 불만을 품기 시작해고, 결국 1970년, 론 놀 이라는 군인장교가 일으킨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내어주게 된다.

오랜 식민지 정책으로 인한 억압, 해방이후 찾아온 시아누크의 독재정치로 인해 캄보디아 사람들은 하루빨리 캄보디아에도 민주주의가 찾아와 공정하고 안정된 사회가 자리잡길 소망했다. 그렇기에,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차지한 론 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하루빨리 누군가 나타나 좀더 나은 사회를 건설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론 놀은 그런 민심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당시 냉전전쟁으로 인해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공산화를 극도로 우려했던 미국정부에게, 캄보디아를 공산국가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전폭적인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나갈수 있었다.

이런 론 놀의 정부는 1975년 까지 지속되었다. 허나 론 놀의 지속적이고 일방적인 요구에 미국이 살짝 주저하기 시작했고, 그 틈에 캄보디아에선 내전이 일어났다. 론 놀은 패배하였고,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신흥세력이 드디어 그림자에서 빛으로 나올수있었다. 오랫동안 론 놀 정부에 반대하고, 속히 공정한 사회가 도래하길 바랬던 민중들에게 이 새로운 집단은 “해방자” 로 불리우며 환영하였다.

1975년 봄,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 펜에 “크메르 루즈”가 찾아왔다.
 


by 안녕이야기


1914 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프란츠 퍼디난드 대공은 오스트리아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세르비아의 프린칩 이라는 19살 청년에게 죽음을 맞게 되고, 그로부터 한달 후 쯤인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전달하면서 복잡하게 얽혀있던 동맹체계들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1890년, 독일제국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황제 빌헬름 2세에 의해 해임당하면서, 그가 이룩해놓은 동맹체계 역시 분해의 위기를 맞는다. 이 동맹체계는 크게 2개의 방어동맹으로 이루 어져 있는데, 1882년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와 맺은 3국 동맹과, 1887년에 러시아와 맺은 재보장조약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개의 방어동맹으로 인해, 독일은 전시상황에서 적대국에게 둘러쌓이는 최악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모면함과 동시에,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던 프랑스를 격리시키는 이점까지도 누릴수 있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함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의 탄생을 공표하는데 아무것도 할수 없었던 프랑스는 그때부터 독일에 대한 깊은 앙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잘 파악했던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탄생 이후 그의 정책기반을 독일제국의 안정과 유지에 두었고, 거미줄같은 복잡한 동맹관계를 통해, 독일의 적을 줄여나감과 동시에, 프랑스가 유럽대륙의 구석에 홀로 고립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독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그렇기 때문에, 1890년에 일어난 비스마르크의 해임은, 독일제국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던 동맹체계의 존속 자체에 위협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비스마르크의 후임자였던 카프리비는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을 갱신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러시아와의 동맹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러시아에게 있어서, 독일은 유일한 동맹국이었고, 재보장조약의 만료는 러시아의 국방에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치열한 유럽의 패권싸움에서 생존하기위해 동맹국의 존재는 필수적이었고, 러시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러시아가 택한 결정은 어찌보면 당연한것이었다. 바로 프랑스와의 동맹을 택한것이다.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길 원했고, 그로인해 1894년 러시아와 프랑스간의 동맹이 체결되었다. 이 소식은 독일에게는 충격이었다. 바로 비스마르크가 전심으로 원했던 프랑스의 고립상태가 풀렸고, 이것은 곳 전쟁이 발발할 경우, 독일이 상대해야 할 적진이 양쪽에 있어서 병력분산이 불가피해지게 된것이다. 

러시아와의 귀중한 동맹을 잃어버린 독일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3국 동맹을 대하는 이탈리아의 태도가 회의적이 된것이다. 프랑스와 영토에 대한 갈등으로 인해 할수없이 오스트리아와 독일과 동맹을 맺었던 이탈리아는, 1902년즈음들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프랑스와의 갈등을 상당부분 해소함으로써, 사실상 3국동맹에 등을 돌리게 된것이다. 이런 이탈리아의 태도는 훗날 1905년에 모로코에서 열린 알헤시라스 회담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뜻을 달리함으로써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정리하자면, 1890년에 비스마르크의 해임이후 그가 오랜 노력끝에 일구어 놓은 동맹체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막강했던 유럽에서의 독일의 위치가 심하게 위협을 받게된다.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서 두 전면 전쟁의 위험을 안게 된 독일은, 자국의 안보와 유럽대륙에서의 입지유지를 위해, 이 시점부터 상당히 위험하면서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펼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주변 강국들로 하여금 더욱 독일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시키는 계기로 역작용하게 되버린다. 독일이 펼쳤던 공격적인 정책과 그로 인해 형성된 3국 협상에 대해서는 2부에서 더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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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숲틱
    • 2011.02.01 22:48 신고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세계사, 이제는 다 잊어먹어서 가물가물한데 이렇게 다시 읽어보니 새롭고 흥미롭네요 ㅎㅎ 다음 글 기대할게요!
  1. 비스마르크는 참 대단한 노인네였는데 결국 직위때문에 말년에는 견제를 많이 받은듯 합니다.. 재상이 아니라 독재자였다면 세계대전 같은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최소한 독일에게는 세계대전의 결과가 다른 방향으로 적용되었을 것 같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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