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영화, 그 짙고 옅음의 미학

Posted by #252636
2016.02.23 01:14 OFFICIAL PRESS/콜라보 인 더 한칼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우리 눈이 수용할 수 있는 모든 다채로움의 미묘한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 기술의 발달로 현재 각종 미디어에서 그 수많은 빛깔들을 그대로 재현해 낼 수 있게 되었지만, 과거에는 명암의 차이만 투박하게 표현하는 것이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 우리의 부모님, 더 나아가 조부모님 세대에는 오히려 그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흑과 백이 가지는 특유의 매력은 단순히 기술의 한계에 갇혀있던 옛날 옛적의 시대성을 초월한다. 현재 캘리그래피나 사진을 비롯한 많은 예술 영역에서도 흑색 계열의 잉크나 흑백 필터만이 낼 수 있는 분위기를 활용한 예를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영화 마니아층 사이에서 고전 흑백영화들이 아직까지도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흑백 영화의 매력에 홀딱 빠져있을 수많은 사람들 혹은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지 고민하고 있을 주변인들을 생각하며 우리 두 사람은 흑백영화 두 점의 이야기와 함께 <콜라보 인 더 한칼> 시리즈물의 첫 발을 힘차게 내디뎌본다.


곽혜연의 흑백영화 이야기: 카사블랑카 Casablanca (1942)

[1]


필자를 흑백영화의 묘미에 처음 빠져들게 한 로맨스 영화. 제2차 세계대전 때 모로코의 도시 카사블랑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제작 당시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실제로 카사블랑카에서 촬영하지는 못 했다. 제작 환경의 어려움이 무색할 만큼 뛰어난 연출력으로 각종 아카데미상을 휩쓸었으며, 무엇보다 이전까지 갱스터 영화의 조연으로만 출연하던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를 미국 남자들의 워너비로 자리매김하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험프리 보가트에게 홀딱 빠진 것은 비단 남자들뿐만이 아니다. 필자를 포함한 수많은 여성들이 이 영화의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공항신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그의 모습에 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차갑게 떠나보내는 듯 보여도,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우직함과 그 뒤에 조용히 비치는 애절함이 배어 나오던 그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상남자’의 눈빛이 유난히 강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 물론 보가트의 표정 연기가 탁월한 덕도 있지만 — 흑백영화로서 스크린 전체에 걸친 현란한 색채의 향연 대신 흑과 백의 극명한 대조로 관객의 시선을 그의 눈동자에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컬러영화였다면 우리는 그의 멋스러운 트렌치코트와 페도라에 감탄하고 자욱한 안개에 싸인 공항 배경을 감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배경 요소들을 영화가 끝난 후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상상해 보도록 하고, 영화를 보는 중에는 그 부수적인 조각들을 그의 매혹적인 눈빛에서 최대한 멀리 분리시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오직 흑백영화만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분위기에 맞춰 우리 스스로 머릿속에서 회색빛 스크린 위에 알록달록하게, 혹은 부드럽고 잔잔하게, 색칠놀이를 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흑백영화가 시청자들에게 주는 자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고 누군가 이 영화를 컬러로 리메이크하자고 한다면, 필자는 호기심에 몇 초 망설이다가 역시 결국에는 반대 측에 서지 않을까 싶다. 만약 보가트의 트렌치코트가 베이지색이 아닌 아이보리색이라면? 만약 여주인공을 맡은 잉그리드의 모자가 내 상상 속의 하늘색이 아니라 빨간색이라면? 과연 아주 작은 소품의 색깔 차이일지라도 내가 이전의 느낀 감정과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을지, 필자는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의문이 든다고 대답할 것이다.


[2]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이 보가트의 눈빛뿐이라면 뭔가 아쉽다. 고전 중의 고전인 만큼, 가장 간질거리는 순간에 훅 들어오는 대사가 있다. 분명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이 대사를 어디선가 들어보았으리라: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Here’s looking at you, kid.”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울듯 말듯한 여주인공의 절망 가득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번지게 한 한마디. 스크린 밖의 관객도 이 한마디에 비극적으로만 보이던 영화가 보다 아름답게 승화됨을 느낀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아마 글썽 맺힌 눈물을 훔치며 극 중 피아니스트가 여주인공을 위해 연주한 <As Time Goes By>를 흥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아쉽지만 <카사블랑카>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치고 나의 파트너의 흑백영화 이야기로 바통을 넘겨본다.


이다운의 흑백영화 이야기: 하녀 The Housemaid (1960)

[3]


최근 나는 아주 기이한 영화를 보게 되었다. 멜로 드라마틱 스릴러 장르로 분류되는 고 김기영 감독의 흥행작 <하녀>이다. 1960년대에 한국 영화는 황금기를 거닐고 있었고 그 안에는 김기영 감독을 포함해 신상옥 감독이나 이만희 감독과 같은 한국 영화계의 거장들이 한국 영화의 새로운 획을 긋고 있었다. 이들 중 내 눈에 단연 돋보이는 김기영 감독은 영화 <현해탄은 알고 있다> 또는 <고려장>에서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과 특출한 표현력으로 당시 관객들을 한국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하지만 필자가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들 중 하나인 <하녀>에 빠지게 된 이유에는 김기영 감독 특유의 색깔이 아주 진하게 묻어있기 때문만이라고 할 수 없다. 나의 파트너가 앞서 언급하였던 흑백영화 고유의 매력이 <하녀>에도 고스란히 담겨있기에 이 영화를 처음 보게 된 한 달 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아직도 나의 심장을 뛰게 하고, 나의 등골을 오싹하게 할 만큼이나 선명하게 남아있다. 


흑백영화를 사랑하는 한국 영화인들에게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어떻게 보면 자칫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을만큼 잔인하고 끔찍한 영화이다.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평범한 중산층 가족 안의 미숙하고 어리지만 영화의 중반대에 들어서며 끔찍한 앙심을 품게 되는 하녀를 중심에 두고 있다. 하녀는 이 가족의 가장이자 방직공장 여공들의 음악 선생님인 동식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의 아내가 집을 비운 틈을 타 그를 유혹해 임신을 해버리게 된다. 물론 이 불륜에 대해 듣게 된 아내가 최대한 침착하고 그럴싸하게 하녀를 설득해 그녀의 아기를 지우는 데에 성공하지만, 이미 두 자녀와 함께 꾸려나가고 있던 행복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이유만으로 동식의 아내가 벌인 하녀의 낙태는 그녀를 더 잔인하고 악하게 만들 뿐이다. 결국 그녀는 동식의 아들을 쥐약을 먹여 숨지게 하고, 동식과 함께 자살행위를 벌인다. 


[4]


영화의 첫 등장부터 담배를 물고 나오며 예사롭지 않은 눈빛과 파격적인 말투를 뽐내는 하녀 역할의 배우 이은심은 그녀의 가녀린 몸과 똘망 똘망한 눈으로부터 내뿜는 카리스마로 우리의 이목을 사로잡고 그녀의 모든 몸짓과 눈빛에 집중시킨다. 뿐만 아니라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동식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를 원하는 악마적 갈망을 표현하기 위해 동식과 그의 아내 앞에 대놓고 "여보, 오늘은 내 방에 올라와서 자요"라는 대사를 던지며 관객을 소름 돋게 만든다. 허나 영화 속 모든 소품에 신경을 쓰고 영화 내러티브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배경인 동식의 2층짜리 집을 표현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는 김기영 감독의 연출 능력은 앞서 얘기한 배우 이은심의 몸짓과 목소리를 자칫하면 가릴 수 있었을 것이다. 1960년 개봉된 <하녀>가 흑백영화였기에 워낙 훌륭하다고 알려진 김기영 감독의 연출이 그나마 덜 부각되어 그가 표현해내고 싶었던 강인하지만 어딘가 어리숙하고 유아적인 하녀라는 역할의 여성상이 우리에게 더욱 적나라하게 전달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필자가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건 <하녀>를 보고 나서만이 아니었다. 사실 김기영 감독은 <하녀>를 개봉시킨 뒤 20년에 걸쳐 하녀 3부작을 탄생시킨다. 현재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유명 배우 윤여정의 데뷔작이기도 한 <화녀>는 1971년 김기영 감독이 <하녀>에 이어 탄생시킨 작품이고, 약 20년 뒤인 1982년 그는 <화녀 '82>로 하녀 3부작을 완성시켰다. 그 두 번째 작품인 <화녀>를 직접 보게 되었을 때, 영화는 흑백영화가 아닌 컬러 영화로 발전해 있었기에 김기영 감독의 화려한 연출에 바로 감탄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61년의 <하녀>가 흑백영화로써 이끌어낸 배우 이은심 또는 하녀 역할의 잔인함과 기묘함은 덜 부각되어 영화가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도 나의 아쉬움은 감추지 못했다. 작년 10월, 백발의 멋쟁이 할머니로 부산 국제 영화제에 등장한 배우 이은심의 사진 물론 컬러 사진이지만 여든 살인 그녀의 현재 모습마저도 <하녀>의 스틸컷에서 볼 수 있는 빛바랜 흑백사진 속 너무나도 강렬하게 내 기억 속에 자리한 그녀의 모습을 떠오르게 할 뿐이다. 


최근 주변 친구들에게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자, 2010년 임상수 감독 버전의 <하녀>를 보라는 추천을 받았다. 검색해보니 김기영 감독의 하녀 3부작을 모티프(motif)로 제작된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배우 전도연과 이정재 주연의 컬러 영화였다. 톱 배우들이 출연한 탓인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결국 2010년 현대판 <하녀>를 보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직 흑과 백의 명암으로 이루어진 50년 전의 <하녀>를 내 기억 속에서 더 이상 흐리고 싶지 않아서이다.


[5]


콜라보를 마치며...

우리 두 사람은 분명 두 점의 아주 다른 영화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흑백영화라는 공통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카사블랑카>가 흑백영화이기에 우리에게 무척이나 아련하게 전해지는 보가트의 눈빛이나 대사 한마디. 마찬가지로 <하녀>가 흑백영화이기에 우리에게 정확하고 안전하게 전달될 수 있었던 하녀 역할의 무게와 불쾌할 만큼의 독특함. 이것만으로 두 영화가 보여주는 흑백영화의 미학을 정의하고 대표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독자들에게 이 작품들을 소개함으로써 말로는 완전히 형용할 수 없는 흑백영화만의 감각 또는 감성이 조금이나마 전해졌다면 그걸로 만족해본다.


사진출처:

[1] http://entertainment.nbcnews.com/_news/2012/11/26/15457128-casablanca-turns-70-and-a-kiss-is-still-a-kiss?lite

[2] http://wegotthiscovered.com/movies/casablanca-piano-put-auction/

[3] http://www.modernkoreancinema.com/2013/07/revenge-week-fatal-femininity.html

[4] http://1.bp.blogspot.com/-pzBWavlTOh4/UdvWIE4PnTI/AAAAAAAALAU/1GzAxUeOXSA/s1600/i3.jpg

[5] www.joeyblsphotograph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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