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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문예 :: Literature

차가운 콘트리트 속 타인의 기억에 관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 의 결말을 기억해본다. 남에게 털어놓기 힘든, 가슴 아린 이별을 경험한 양조위는 근 천년 역사의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 앞에 말없이 서있다. 마침내 사원의 외벽에서 구멍 하나를 찾은 그는 고민 끝에 그 곳에 자신의 비밀을 속삭이기 시작한다. 순간 아름다운 현악기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그의 고뇌하는 모습을 담던 미동조차 없던 카메라는 어느새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끝내 비밀을 모두 털어놓은 그는 그 구멍을 진흙으로 채우고는 자신의 외투를 챙겨 사원을 나선다,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인적이 사라진 사원의 이런저런 부분들을 비추다 서서히 끝을 는다. 마치 유적의 역사가 양조위의 통한과 함께 더욱더 깊어진 느낌이다. 앙코르와트의 일천년 역사, 그 세월 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곳에서 울고 웃었을까. 얼마나 많은 삶이 시작과 끝을 맞았을까. 

 

세월의 무게를 논하자니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1)

 

1월의 하와이. 나는 낡아빠진 숙소 입구에서 피던 아침 담배 너머로 나와 양철 재떨이를 나눠쓰던 한 민머리의 일본인과 짧은 영어로 담소를 나눈다던가, 새벽의 무료함에 귀에 리시버를 꽂은 채 반바지 차림으로 조깅을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처음 맞은 대학의 겨울방학 간 낯선 땅에서 바라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오후, 관광객과 도시의 소음에 지친 나는 ‘대학 캠퍼스에 조차 흥미를 느끼는 여행객은 없겠지’ 하는 우스운 생각으로 근방의 한 주립대학으로 가는 버스에 홀로 탄다. 입대한 동창 녀석이 다니던 대학이다. 와이키키 해변으로 향하던 전날 버스와는 다르게 사람이 많지 않아 나는 창가 쪽 좌석에 비교적 편히 앉아 진동하는 유리창에 아려오던 머리를 기댄 채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어느새 도착한 마노아의 캠퍼스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다. 흔들리던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던 따스한 햇살을 지나치며 좋아진 기분에 기지개를 켜보기도, 유쾌한 비명을 내지르며 서로에게 프리즈비를 던지고 노는 또래 대학생들을 가만히 구경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연히 들어선 한 낡은 기숙사를 보고는 사진 속 녀석이 지내던 곳임을 기억해낸다. 학생 기숙사 특유의 수수함과 적도의 안락함 사이에서 나는 누군가의 젊고 아름다운 추억 같은 것을 연상하고 있지 않나 싶다. 입대가 두렵다, 미래가 불투명하다 외로움을 타며 새벽 줄담배를 곁들여 나와 길게 통화하던 친구 생각에, 전화가 끝나면 밤하늘 아래 이곳에서 또 무슨 생각을 했을지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려온다. 이끼 낀 콘크리트 벽을 한 손으로 천천히 훑어보다 시간이 늦어져 나는 내 낡은 숙소로 돌아간다.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입구에서 다시 마주한 민머리 일본인은 내게 성냥개비를 건넨다. 라이터가 있으나 나는 외로운 마음에 그것을 받아든다. 그를 붙들고 내 적막함을 설명하고 싶으나 나는 일본어를 하지 못한다.




(2)

 

찌는듯한 더위의 한여름 종로. 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던 아버지와 나는 지루해진 라디오를 끈 채 한창 70년대 서울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과거 얘기에 재미를 붙이신 아버지는 그새 운전석 창문을 내리시며 담배 한 개비를 키시고, 나는 그런 아버지와 지나가는 서울을 번갈아 보다 느낀 어떠한 친밀감에 기분이 좋아 씩 몰래 웃는다. 그렇게 낙원상가를 지날 때 쯤 보이던 눈에 띄게 낡은 건물을 가리키며 저 건물이 근방에서 제일 오래된 것 같다며, 혹시 가보신 곳이냐고 아버지께 여쭙는다대답을 않으시던 아버지를 알아채고는 조용히 눈치를 보다 나는 끝내 유학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화제를 돌린다.

 

한밤중 집에 돌아와 나와 캔맥주를 나누어 마시던 아버지는 옅은 취기에 그 허름한 건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신다. 대학시절 오랫동안 만났던 사람이 살던 곳이라며, 나는 그 갑작스러움에 놀라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그대가 보여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미술을 전공하던 그녀가 그림 그리기를 귀찮아해, 단것을 그리 좋아해 놀리고는 했다며 낄낄 웃으시던 아버지는 언젠가 우연히 나이 든 그녀와 재회하고 느낀 세월의 흐름에 자신 또한 놀라셨었다 고백하신다. 그제야 사람이 영원히 젊을 수는 없음을 느끼셨다 말하신다. 며칠 , 당신은 모르시지만 나는 무언가가 이끄는 힘을 따라 홀로 그 곳을 다시 들른다. 페인트가 모두 벗겨진 건물의 계단을 천천히 오르다 보이던, 왠지 젊고 혼란스러운 그대가 수십 년 전 서 계셨을법한 창가에 가만히 서 나는 편의점에서 사온 캔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이제는 독거노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지나가던 초록색 재킷의 앳된 사회봉사자 한 명이 내 쪽을 힐끗 바라봐, 나는 수상해 보이지 않으려 가능한 한 환하게 미소 짓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 미소를 되돌린다.

 




(3)

 

고등학교 졸업 후 일 년이 지나 다시 찾은 자정의 학교 운동장은 여전히 적막하고, 쓸쓸하다. 조금 더 어렸던 나는 홀로 이곳에서 과연 어른이 될 수 있을지, 세상은 나와 어울리는지 따위의 고민을 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꽤나 긴 시간 동안 기억만으로 존재했던 이 공간의 향취가 이제는 다소 낯설어 무언가 내가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 사람에게 시간의 흐름이란 모두 그런 것이지 싶다. 그리고 근처 은행나무에서 나는 더 어릴 적 친구들과 그어놓았던 한 표식을 찾는다. 마치 앙코르와트 외벽의 진흙 박힌 구멍처럼 그 표식은 과거의 내가 분명히 존재했음을, 그리고 아직 살아있음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결국 그런 것 아닐까. 모든 물질적인 것은 누군가의 손길을 거치고, 조금 더 특별한 경우 누군가의 기억에 남지만, 삶에 대한 간단명료한 정의를 내리기 좋아하는 우리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그리운 장소이고,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던 것은 아닐까. 우리네의 앙코르와트는 사실 아주 흔한 것들이었음을, 적어도 내 바깥의 세상을 다룸에 있어 그에 걸맞은 예우를 표해야 했음을, 알아야 했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