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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과학 :: Science & Tech

루이스 - 버클리 화학 선구자의 미스터리한 죽음




[1] Gilman Hall, College of Chemistry at UC Berkeley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1946년 3월 23일, 저명한 한 과학자가 UC 버클리의 Gilman Hall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숨을 거둔 것을 한 대학원생이 발견하였다. 사망한 과학자는 바로 미국 현대 화학의 아버지이자 비운의 과학자라 불리는 길버트 뉴턴 루이스 (Gilbert Newton Lewis, 1875-1946)였다. 평생 연구에 힘쓰던 과학자답게 연구실에서 생을 마친 그였지만, 그의 죽음을 두고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의 사망은 실험 도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가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실험은 액체 시안화수소 (HCN)에 관한 실험이었는데, 시안화수소 증기가 이동하는 유리관이 깨지면서 독성이 강한 그 증기가 새어 나온 흔적이 발견되어, 이 유독한 증기를 흡입한 것이 심장마비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실험 도중 실수로 새어나간 증기를 들이마신 사고로 인한 것인지 루이스 스스로 자살을 하려는 의도로 증기를 들이마신 것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실제로 필자가 버클리에서 듣는 한 화학 수업에서는 그의 죽음을 자살로 보는 시각이 여전히 상당수 존재한다는 교수님의 이야기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일까. 사람들은 왜 그를 두고 비운의 과학자라 하였을까. 루이스의 삶과 버클리와의 인연에 관하여 한번 다뤄보려 한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한 번이라도 화학 수업을 들어봤다면 접하게 되는 공유결합 (Covalent Bond), 루이스 구조식 (Lewis Structure), 루이스 산/염기 (Lewis acid/base) 등의 개념들이 바로 루이스의 연구로 정립된 것들이다. 또한, 버클리에 다니는 학생들이라면 한 번쯤은 루이스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보통 화학전공은 자연과학대학이나 공학 대학에 포함되어 있는 다른 대학교들과는 달리, 버클리는 독특하게 화학 한 분야만 단과대학으로서 College of Chemistry로 독립되어 있는데, 바로 이 화학 단과대학에서 루이스가 1912년부터 1941년까지 학장 (Dean)으로 재직하였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현대 화학 전반에 걸쳐 토대가 되는 기본 법칙들을 정립하고 활발한 연구활동으로 화학발전에 공헌했다. 그의 뛰어난 연구 성과는 현대에 와서 미국 과학 최고의 업적 중 하나라고 평가받으며, 20세기를 통틀어 미국 과학자 중 누구도 루이스만큼 훌륭한 성과를 거둔 학자는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과학자들도 상당히 많다. 연구뿐만 아니라 루이스는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뛰어난 화학자를 많이 양성하였다. 이 때문에 후대의 많은 과학자에 의해 루이스는 미국 현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제자 중 다섯 명이 노벨 화학상을 받았는데, 1934년 헤럴드 유리를 시작으로 윌리엄 지오크, 글렌 시보그, 윌러드 리비, 멜빈 캘빈이 노벨상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루이스 자신은 그의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노벨 화학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평생 40여 차례 노벨화학상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번번이 노벨상을 타지 못하였고, 1946년 그는 홀로 그의 연구실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뛰어난 과학자였던 그는 왜 노벨상과 인연이 없었으며, 쓸쓸하게 삶을 마감하게 되었을까.




[2] Gilbert N. Lewis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루이스는 1875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적 13살까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재택교육을 받았고, 14살이 되어서야 네브래스카주에서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가 학창시절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또래에 비해 상당히 늦게 학교를 경험하였기 때문인지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점차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루이스는 다른 사람과 한번 갈등을 빚으면 끝까지 그 상대방에게 감정의 앙금을 가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네브래스카 대학에 들어가 그곳에서 2년을 보낸 뒤, 1893년 하버드 대학으로 편입하였다. 하버드를 졸업 후 1년 동안 앤도버 필립스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잠시 가르친 후 다시 돌아와 1899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당시 물리화학의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독일로 건너가 연구경력을 쌓는다.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빌헬름 오스트발트 (Wilhelm Ostwald)와 한 학기를 보내고, 괴팅겐에서 역시 저명한 학자인 발터 네른스트 (Walther Nernst) 밑에서 연구를 하며 보낸다. 이 당시 루이스는 자신의 과학자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네른스트가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으며, 실험방법이나 연구 과정에 있어서도 견해의 차이로 많은 갈등을 빚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결국 루이스는 네른스트에게 평생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1905년 MIT의 물리화학 연구진에 합류하여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며, 이때 화학평형의 열역학적 중요성을 제시하고 자유에너지의 실험적 측정 등의 업적을 쌓은 루이스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MIT에서 1907년 조교수, 1908년 부교수에 이어 1911년에는 정교수가 되면서 단기간에 세계의 저명한 학자로 발돋움하였다.


1912년 루이스는 UC 버클리의 물리화학 교수이자 화학 단과대학의 학장으로 재직하게 된다. 1800년대 후반 개교한 버클리는 당시 캘리포니아 주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학교의 위상을 높이고자 여러 학자, 특히 자연과학 분야의 많은 과학자를 영입하게 되는데 그 목적으로 루이스 역시 버클리로 오게 되었다. 그는 버클리에서 활발한 연구활동으로 많은 업적을 쌓게 되어, 당시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짧은 역사를 가진 버클리를 소위 “하드 캐리”하여 세계 화학 연구의 중심지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3] 공유결합의 간단한 원리




루이스는 열역학, 산염기 정의의 확장, 중수소 (deuterium)의 특성 연구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 대학교에서 일반화학을 배웠던 학생들이라면 가장 익숙할 루이스의 업적은, 바로 Octet Rule에 기반을 둔 원자의 공유결합에 관한 이론이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인 1916년에 그는 각각의 원자는 완전한 8개의 최외각 전자를 소유하게끔 서로 전자 수를 맞춰야 안정해진다는 옥텟 규칙 (Octet Rule)을 기반으로, 화학결합에 있어서 두 원자가 옥텟 규칙에 맞게끔 전자들을 공유하여 분자를 이루는 결합을 만든다는 공유결합 (Covalent Bond) 이론을 발표하였다. 이 이론은 백 년이 지난 지금 화학결합에 관련된 기본적인 이론으로서 화학도들이 필수적으로 배우는 이론이 되었다.



[4] 공유결합 (Covalent Bond)




이처럼 뛰어난 업적을 남긴 루이스였지만 특이하게도 그는 노벨상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노벨상은 과학자에게 있어서 뛰어난 학문적 공헌의 상징 중 하나이지만,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고 해서 반드시 수상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벨상 역시 사람이 후보자를 심사하고 수상자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계의 평판, 즉 당대의 다른 학자들의 평가가 중요하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당시에는 노벨위원회에 있는 학자들이나 친분으로 인한 인간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루이스의 노벨상과의 아쉬운 인연은 어찌 보면 이러한 시스템의 피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루이스는 폐쇄적이고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학계에 그와 친분을 가진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거의 없었다. 또한, 그는 연구에 있어서 완벽주의를 추구하였으며, 그의 성격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부정확함이나 오류를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바보 같은 언행이나 잘못된 정보를 결코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다른 학자들의 연구에 오류가 있을 때도 그는 굉장히 공격적인 어조로 날이 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앞서 언급했던 괴팅겐에서의 연구 지도교수였던 네른스트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어 네른스트의 실수나 연구에서의 오류를 지적하는 기사를 출판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한 일화도 있었다. 그래서 노벨상을 받은 네른스트와 함께 교류하던 학계에 영향력 있는 학자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였고, 그들을 따르는 이들 역시 루이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네른스트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던 스웨덴의 몇몇 화학자들과 팔매어 등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40년 초까지 노벨화학상 위원을 역임하였는데 이로 인해 루이스의 노벨상 수상은 번번이 가로막히게 된다.


또한, 노벨상 위원회에 영향력을 가진 스반테 아레니우스(Svante Arrhenius)와도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특히나 1903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이자 물리 화학자의 선구자 격인 아레니우스는 화학결합에 대한 그의 연구를 낮게 평가하고, 오히려 루이스의 연구를 알아보고 재정립한 어빙 랭뮤어(Irving Langmuir)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루이스의 화학결합 이론은 초기에 주목받지 못하였지만, 랭뮤어가 그 가치를 인정하고 학계에 더 알리면서 재조명되었다.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자신의 이론이 주목받자 기뻐했던 루이스지만 자신보다 랭뮤어가 더 인정을 받게 되자 매우 화를 내고 상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루이스와 랭뮤어는 오랫동안 라이벌로 경쟁하게 되는데, 랭뮤어는 소위 “아웃사이더”인 루이스와는 반대로 사교적인 성격에 뛰어난 언변으로 동료학자들과 친분이 두터워 학계에서 평판이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스의 연구업적은 인정받아 노벨화학상 후보에 총 40여 차례 오르게 된다. 1932년에는 루이스가 랭뮤어와 함께 노벨 화학상 후보에 오르지만, 결국 랭뮤어가 노벨 화학상을 받게 된다. 당시 루이스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화학자들과 친분이 있었던, 화학위원회 위원들의 부정적인 평가가 루이스의 노벨상 수상 실패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 루이스는 이후에도 노벨상 수상에 번번이 고배를 마시자, 매우 분노하고 상심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미국 국립과학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Science, NAS)의 회원이었는데 1934년 갑작스럽게 회원 직을 그만두었다. 당시 루이스는 해롤드 유리(Harold Urey)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로서 함께 중수소(deuterium)의 특성 연구와 분리실험을 하였는데, 1934년 그 연구공로로 제자인 유리에게만 노벨화학상이 돌아가자 그에 대한 분노와 상실감으로 돌연 회원직을 사임했다는 게 주변의 주된 추측이었다.


이처럼 분노와 상심으로 언제나 외톨이처럼 맘의 문을 닫고 슬픔을 등에 지고 살아가던 루이스는 그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 하나 없이 연구에 몰두하던 중, 1946년 3월 23일에 UC 버클리로 명예박사학위(honorary doctorate degree)를 받으러 온 그의 라이벌 랭뮤어와 점심을 먹으며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 논쟁 이후 루이스는 그의 연구실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Gilman Hall에 있는 실험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다. 이에 많은 버클리 동료 교수들은 노벨상 수상에 번번이 외면당해온 상처는 끊임없이 덧나, 랭뮤어와의 논쟁 이후 더욱 심리적인 타격을 받아 루이스에게 심장마비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상당수의 버클리 교수들은 몹시 상심한 루이스 스스로 독성이 있는, 액체 시안화수소의 증기를 들이마시며 자살을 기도하다 심장마비가 왔다고 믿었다. 그의 사인은 심장마비이지만, 여전히 왜 심장마비가 왔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버클리 역사의 한 페이지에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사건이다.




[5] 직접 찍은 루이스 추모 강의 안내 사진




학교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루이스가 사망한 지 2년 뒤인 1948년 캠퍼스에 Lewis Hall을 건축하였고, 이는 아직까지 화학전공 학생들이 사용하는 건물로 남아있다. 또한, 버클리에서는 백 년 전 정립한, 화학사에 길이 남을 그의 업적과 70년 전 안타까운 그의 죽음을 기리며 지난달 10월 18일 추모강의가 열렸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 화학 단과대학을 지나가면 위의 사진과 같이 추모강의에 대한 전단이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독특한 성격과 그로 인한 원만치 못한 인간관계로 쓸쓸하게 홀로 삶을 마쳤지만, 한편으로는 평생 연구에 매진한 과학자답게 연구실에서 생을 마친 루이스. 현대에 와서 그의 뛰어난 업적을 재평가받아 20세기 최고의 과학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비운의 과학자를 한번 기려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이미지 출처:

[1] http://chemistry.berkeley.edu

[2] https://www.chemheritage.org/historical-profile/gilbert-newton-lewis

[3] https://manoa.hawaii.edu/exploringourfluidearth/chemical/chemistry-and-seawater/covalent-bonding

[4] http://factfile.org/10-facts-about-covalent-bonds

내용 출처:

https://www.acs.org/content/acs/en/education/whatischemistry/landmarks/gilman.html

https://www.chemheritage.org/historical-profile/gilbert-newton-lewis

http://humantouchofchemistry.com/gilbert-newton-lewis.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