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DITORIAL/문예 :: Literature

누구나의 산문


봄방학 때 놀러 왔던 상진이 형이 오늘 떠나갔다. 상진 형과는 이제 안지 어언 9년이 다 되어가고, 대학교 친구들과는 다르게 기숙사에서 동고동락하며 쌓아 온 추억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같이 있을 때면 더 편하게 느낀다. 둘이서 이야기할 때는 장소가 어디더라도 다시 고등학교에 돌아간 것만 같다. 잠깐 10분의 쉬는 시간에 허겁지겁 나눠 먹던 초콜렛 쿠키와 시나몬 롤이 떠오르며, 촌 자락에 있던 학교주변 축가들의 분뇨 냄새 또한 정겹게 콧자락에 남아 있는 듯 하다. 이 글의 이유를 묻는다면, 그저 본연의 나의 이야기를 담아두기 위함이다. 거창한 것을 원했다면 뒤돌아 가도 좋으며, 잠시 쉬어가는 글을 읽고 싶다면 잠시 멈춰서도 좋다.


봄방학이 시작하는 금요일, 여느 때와 다른 느낌은 없었다. 집에서 컴퓨터를 켜고 숙제들을 확인한 뒤, 약간의 일탈을 즐기기 위해 항상 금요일에 미리 해두던 숙제를 하지 않고 예능을 틀었다. 저녁 7. 8. 9. 그래도 봄방학이니까, 책상에 오래 올려두었던 오래된 피천득의 산문집을 들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젠 더이상 혼자 무엇을 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실 약간의 부담감은 있다. 영화관에 향하는 동안에도 혹시나 아는 사람을 만나지는 않을까 잠시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그 부담감이 불필요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은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영화가 마치고 집에 오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3명이 사는 집이지만 한없이 고요한 곳이었다. 덕분에 룸메이트가 어디 갔다 왔냐는 물음에 준비한 내 답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난 다음 날 아침 요세미티로 향할 준비를 하고 느즈막이 잠자리에 들었다.


눈이 온다고 했었는데, 날씨는 맑았다. 그러자 곧 고속도로가 어두워졌다. 가는 길에 종종 비가 왔다 멈추기를 반복하더니,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표시판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스노우 체인 필수’. 여행을 같이 떠난 진이 형은 추진력이 좋은 형이다. 쉽사리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며, 행동력이 있는 형이다. 처음 형을 만났을 때를 기억하진 못한다. 1학년 때 축구를 같이 했었을 때 보았을 터인데, 어렴풋이 좀 샤프했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형이 트렁크 깊숙한 곳에서 스노우 체인을 가져왔다. 샛노란, 누가 봐도 한 번도 쓰지 않은 스노우 체인. 30분간 그렇게 낑낑대며 끼운 스노우 체인은 2분도 안가 빠져버렸고, 우린 헛웃음과 함께 다시 반 시간이 걸려 체인을 빼고 천천히 달리기를 택했다. 좋은 추억이라고, 썰 하나 생겼다고, 몇 번을 되뇌고 얘기했다. 하지만 체인이 빠지고 차 바퀴가 들썩거릴 때 얼어버렸던 우리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억수같이 내리는 눈비를 뚫고 찾아온 텐트에는 야속히도 자물쇠가 잠겨있었고, 그 밤 우린 서로를 설득하며 씻지도 않고 잠을 청했다. 난 꿈에서나마 씻는 꿈을 꾸었다. 아마 난 코를 골았을 것이다.


다음날은 정말 거짓말처럼 날씨가 좋았다. 대자연이 주는 감탄은 실로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다. 장엄하게 펼쳐진 풍경을 보고 있자면, 나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지고, 탁 트이는 절경에 마음의 걱정이 사라진다. 걱정만큼 사람을 곪게 하는 것이 있을까. 하지만 걱정이 없다면 또 그게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이렇게 말해야, 어차피 없어지지 않을 걱정이라면, 조금이나마 순응하며 상생의 길을 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걱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단지 얼마나 잘 잊고, 무시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에 대한 차이일 것이다. 난 소소한 걱정이 많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수도 있겠지만, 카드를 긁어 산 음료자판기가 오작동해 계속 내 카드로 결제가 되고 있진 않을지, 혹시 남은 학기 동안 수업을 제대로 신청하지 못해 졸업을 못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쓸데없지만 충분히 거슬릴 수 있는 걱정을 한다. 그래서 요즘 내가 원하는 것은 오랜 연륜에서 오는 여유다. 그런 의미에선 조금 더 빨리 늙어 보고 싶기도 하다. 어르신분들은 속된 말로 고지식한 분들이 많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그들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의미이다. 난 그렇지 못하다. 이 사람을 만나도 저 사람을 만나도 그저 그런대로일 뿐 좋다 싫다 구분짓지 못한다. 좋은 말로는 여지를 항상 남겨두며, 나쁘게 말한다면 우유부단하며 흐지부지하다. 그리고 아까 상진 형과 돌아다니다 멈춘 빵집에서 밤 식빵이 맛있어 보였지만, 오늘 형과 점심, 그리고 커피 모두 내가 시원히 계산해 버린 것이 생각나 빵집 안까지 들어가 놓고선 발걸음을 돌렸다.


상진 형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형은 형을 알아?’.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하고, 그리고 그들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 누구나 아는 그런 단편적인 이미지. 매일 아침 난 머리를 말리며, 로션을 찍어 바르며, 머리를 정리하며, 옷이 잘 어울리나 확인하며 나 자신을 본다. 그치만 나는 나를 잘 모르는 듯 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지금껏 진정 내가 일궈낸 것이 있는지. 누가 내게 내가 누군지 물어본다면. 난 아마 내가 탐탁지 않아 하는, 내뱉으면서도 진실로 느껴지지 않는 형식적인 대답을 내뱉고 있을 것이다. 형을 전철역까지 데려다주며 이런 대화가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고맙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은은한 아쉬움이 입 끝에 맴돌았다. 그렇게 누가 누굴 떠나보낸 지 모른 체 돌아오던 길, 다시 빵집에 들러 밤 식빵을 샀다. 저녁 대신 한 두 조각 먹고 냉동실에 넣어놔 먹고 싶을 때마다 프라이팬에 한두 조각 다시 구워 먹을 생각에 발걸음이 한결 차분했다. 완연한 낮과 차가운 밤사이의 멈춰있는 듯한 공기를 느끼다, 전화가 울렸다. 민석이다. ‘저녁 먹었어?’ ‘, 아니’ ‘저녁 먹을래?’ ‘그래, 먹자.’

'EDITORIAL > 문예 :: Liter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달린다, 오늘도  (0) 2018.09.27
추락사의 두려움  (1) 2018.04.18
Me, myself, and I  (1) 2018.04.03
스무 살 최정윤  (4) 2017.12.02
우연의 조각  (0) 2017.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