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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국제 :: Worldpost

1968년과 2011년

냉전이 한창이던 1950년대부터 1980년대의 미국에는 도미노 이론 (Domino Theory)이라는 말이 있었다. 한 국가에서의 공산화가 근접한 다른 국가들에서의 급격한 공산화를 불러온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이론은 현실화되지 못했다.공산주의 국가들 사이에도 소련-중국 국경분쟁과 중국-베트남 전쟁 등등 나름의 알력이 있었음을 몰랐으며, 한 국가의 공산화는 단순히 주변 국가로부터 비롯된 영향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 당시에는 몰랐을 것이다.

비록 공산화 차원의 도미노 이론은 빗나갔지만 이와 유사한 현상은 역사에서 자주 보인다. 짧은 시기 동안 가까운 국가들 사이에서 유사한 사회/문화적 운동이 일어나서 서로 영향을 끼치며 급격한 변혁을 불러오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1960년대 후반, 특히 1968년에 구미(歐美) 지역에서 있었으며, 2011년 상반기 현재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그러한 변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68년과 2011년은 일어난 시기와 장소가 다른 것을 빼면 상당히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왜 1968년에는 미국과 유럽 전반에 청년들의 사회운동이 성행했을까? 1968년이 남긴 것은 무엇이며이것이 2011년에 대해 무엇을 시사하는가?

1968년은 많은 서구인에게 사회변혁의 해로 기억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60년대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던 민권 운동, 반전 운동 등이 정상 궤도에 오른 해였으며,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에는 대대적인 학생 운동이 일어났고 체코(당시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자유화와 개혁 정책들이 이루어지던 해였다. 이 국가들처럼 잘 알려진 사례들 말고도 폴란드,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등등의 국가에서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학생들 주도의 시위가 일어났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대대적인 사회 변혁 운동이 1960년대 후반이라는 짧은 시간에 집중되어 나타났을까? 이들국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1960년대의 미국은 마틴 루터 킹 목사로 대표되어있는 흑인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촉발된 학생들의 반전운동과 히피 운동 등으로 흔히 기억된다. 이 당시는1945년에 세계 2차 대전이 종전된 후의 베이비 붐으로 인하여 태어났던 아기들이 성장한 시기였으며, 그 베이비 붐 청년들은 1950년대의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의 시대의 수혜자들이었다. 거의 모든 집에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등이 있었으며, 당시의 청년 세대는 평균적으로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 수많은 문화적 혜택을 누리던 세대였다. 결정적으로 무엇보다도 예전 세대와는 달리 대학 보급이 중산층과 서민,노동자 계층에게도 보급되었다. 예전보다 훨씬 늘어난 수의 대학생들이 캠퍼스에 모이자,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란 대학생들은, 정신적 가치와 비판적 철학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들은 조직화하기 시작하여 인종차별 철폐, 베트남 전쟁 반대, 여성 해방, 언론 자유 등의 사회운동에 앞장선다. 미국의 진보 운동이 본격적으로 분수령을 이룬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록 음악과 영화 등을 통하여 소통하였으며 대중 매체를 적극 이용하였다. 샌프란시스코를 필두로 한 미국 대도시들과 대학가에서는 학생들과 히피청년들의 공동체가 형성이 되었다. 이들은 머리에 꽃을 달고 록 음악을 듣고 연주하며 사랑과 평화를 외쳤다.

프랑스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운동이 일어났다. 2차 대전 종전 이후의 프랑스는 자유 프랑스의 영웅 샤를 드 골 대통령 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다. 드 골은 권위주의 성향을 가진 철저한 보수주의자로써, 프랑스 전통의 문화를 보존하는것을 지상의 가치로 삼았다. 대중문화 개방과 경제발전으로 인하여 새로운 것들을 원하던 프랑스 청년들에게는 불만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파리의 낭떼르 대학에서 처음 일어난 학생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권위주의 타파, 여성 해방, 자유로운 사회를 외치며 경찰들과 충돌하고 불복종 운동을 벌였다. 사르트르, 카뮈, 등 당대의 지성인들도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 이어지고 여론이 그들을 향하자 드 골 정부는 퇴진하게 된다.

체코 사람들에게 1968년은 ‘프라하의 봄’이라는 아름답고 시적인 말로 기억된다. 탈 스탈린화가 서서히 진행되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결국 1968년 1월, 알렉산드르 둡체크라는 개혁적 성향의 정치인이 공산당 제 1 서기로 당선되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건 둡체크는 공산당의 영향력을 줄이고 언론 검열, 비밀경찰 제도등을 폐지하는 등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쪽으로 분권화를 시작하며 경제적, 사회적 자유화를 시작한다. 그 결과로1968년 상반기 당시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정당 활동이 시작되는 등 공산주의 국가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자유로워 진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 운동은 소련에게는 반가울 리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가입국들을 동원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에 찾아온 잠시간의 자유는 철저히 짓밟히게되고 대중들은 저항에 들어선다. 하지만 이들의 운동은 결국 좌절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다시 수십 년 동안 여느 공산주의 국가와 다름없는 억압 속에 신음하게 된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시대상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1960년대 후반의 사회운동은 사르트르와 카뮈 등 당대의 철학자들만큼이나 대중문화의 파급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미국의 청년들, 프랑스 청년들, 체코슬로바키아의 청년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모두 같은 음악을 듣게 된 것이 이들을 한 군데로 모으는 역할을 한 것이다. 미국의 청년들이 모이는 데에는 록 음악이 엄청나게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평화와 음악의 3일’ 이라고 불리우는 우드스톡 공연 등으로 명백히 나타났다. 미국의 학생들이 듣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도어즈(The Doors), 밥 딜런(Bob Dylan), 비틀즈(The Beatles) 등의 록 음악을 프랑스 학생들도 들었으며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청년들이 모여서 즐겨 부르던 노래는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에는 머리에 꽃을 꽂고 가세요. 그곳에서는 착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거에요’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a flower in your head,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you’re going to meet some gentle people there)라는 가사를 가진 스콧 맥켄지(Scott McKenzie)의 ‘샌프란시스코’라는 노래였다. 또한 이들의 운동에는 ‘금지만이 금지된다’ (Il est interdit d’interdire)는 슬로건에서 보이듯 탈 권위, 반 제도 성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있었다. 이들의성향은 분명한 좌파였으나 기존 좌파의 권위적 성향과 폭압적 성향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학생 운동으로 노동조합 중심이던 기존의 좌파와는 구분되는 신 좌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구 좌파가 강조하던 노동 부문 외에도 사회전반의 자유화를 외치며 현재 서구 정치권의 좌파의 근간을 세우게 되었다. 이들의 운동은 또한, 명시적으로 보이는굵직한 성과와는 별개로 문화와 사회를 아예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의서구 국가에 현재와 같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당시의학생운동이었다. 60년대 후반 이후 록 음악이 전세계 최고의 인기 음악 장르가 된 것도 이들의 문화적 유산이며 60년대 후반에 청년들의 심리 묘사를 수려하게 해낸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혹은 ‘졸업’ 등의 영화는 고전 할리우드 영화와 뉴 할리우드 영화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에는 비록 1년도 안 되어 다시 예전의 체계로회귀했지만, 프라하의 봄은 결국 80년대 후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노래 듣기): http://www.youtube.com/watch?v=vnmiWnq3bT4&feature=fvst

2011년 상반기의 현재 중동 이슬람권 국가들에서는 민주화 시위가 들불처럼 퍼지고 있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으로 시작된 운동이 이집트, 리비야, 바레인, 알제리 등등 중동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해 1968년의 상황과 같은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분석을 하려면 4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로써 분명해 보이는 것은 인터넷이 60년대 후반의 매스미디어와 비슷한, 아니면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시위를 하는 대중들이 모이는 데에는 인터넷과 SNS가 필수적이 되었으며, 이들의 소식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대중들은 이로 말미암아 더 용이하게 세계인들의 지지를 얻고 뭉친다. 아직 모인 이들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어떻게모였는지 말하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이들도 60년대 후반의 학생들처럼 딱히 주동자가 없는 상황에서 뭉치고 투쟁한다. 이들의 투쟁이 40년 뒤 무엇을 남길지는 펼쳐질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하지만 탈레반 혹은 알 카에다와 같은 사악한 살인마 테러집단이 아닌 민주화를 위하여 싸우는 오늘의 중동 청년들이 새로운 중동을 만들어갈 초석이 되길 기원한다. 문득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연사가 떠오른다. ‘세상은 당신들이 무엇을 파괴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건설하느냐를 가지고 평가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