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Posted by 희씨
2018.10.07 00:06 EDITORIAL/문예 :: Literature

 

97 서울은 무역을 없는 도시였고, 때문에 외국의 스피커를 수입해 팔던 아버지의 사운이 꺾여 쫓겨나듯 경기북부의 신도시에 겨우 마련한 아버지의 사무실에 어머니와 잠시 얹혀살았던 기억이 있다. 또래를 보기 힘든 잿빛 오피스텔에서 말수 없던 나는 7 남짓한 방에서 되도록 조용히 있으라던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는 분해되어 있는 스피커를 이리저리 만지던 30 남짓한 되는 직원들을 멀찍이서 바라보고는 했었다. 바쁘다 아는 체해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한밤중 사무실에서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분해된 스피커의 코일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의 모습을 아버지는 같은 모델의 스피커로 스프링스틴이나 카펜터스의 노래를 틀어주고는 하셨었다. 70년대에 녹음된 베이스 소리는 스피커보다도 키가 작던 흉골을 울렸고, 감각이 재미있어 마호가니 나무로 만든 그것을 신기해라 만져보고는 했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표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내게 세상은 아직 새로운 잠재성으로 빛나던 나날이었지 싶다.

 

스물다섯. 이어폰 속의 트럼펫 소리를 희미하게 흥얼거리며 하얀 성냥갑 아파트 복도에서 담배 대를 태웠다. 영롱한 보름달 사이로 비행기 대가 붉은빛을 반짝이며 지나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국 희망을 저버린 국가의 둘레를 벗어나 나와 어린 여동생의 손을 잡고 동남아의 생소한 나라에 정착했고, 시간이 지나 나를 데려간 군에서는 병장 약장과 함께 부모에게 얼굴이라도 보이고 오라 국적기 항공권 장을 손에 쥐여주었다. 시간 후면 비행기가 이륙할 시간이었다. 하얗게 밀린 옆머리에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손에는 더플백을 조그마한 철제 승강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 창밖으로 손에 담배를 털며 사라지는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의 비행. 차가운 새벽 공기. 스타카토로 끊어진 짤막한 생각들은 향수로 젖어있었고, 멀리 어디선가 짖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시계는 새벽 다섯시를 가리켰다.

 

다섯시. 작은 오피스텔에서부터 나와 함께 나이 먹은 투박한 신도시의 거리가 것인 거닐던 것들이 규범과 질서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야광복을 입은 중년의 환경미화원 뒤편으로 유흥가의 네온사인들이 은은하게 빛나고 찌그러진 담뱃갑들이 길거리에 내팽개쳐져 있다. 다리를 내놓은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회색 양복 차림의 회사원이 황토색 서울 택시를 앞에 두고 작별 인사를 한다. 5층짜리 잿빛 상가건물 모퉁이의 작은 세븐일레븐에 들어가 커피 캔을 샀다. 얼굴을 알아보는 편의점 아주머니가 살갑게 휴가 나왔느냐 묻기에 멀리에 있는 집으로 가는 길이라 했고, 조심히 다녀오시라는 말에 마음이 녹아 조금의 미소를 머금은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외진 정류장에 단정한 옷차림의 승무원이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앉아있었다. 차가운 하늘의 어둠이 점차 걷히고 있었고, 목에 군번줄에 가슴팍이 시려와 괜히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따뜻한 커피 캔을 따자 치익 하는 하찮고 작은 소리가 났다.

 


신청사인 2 터미널에는 새로 지은 활주로들이 보이는 작은 라운지가 있었고, 이른 시간에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창틀에 턱을 괴고 커다란 비행기들을 보았다. 정류장에서 발을 구르던 승무원의 하늘색 항공사, , 델타, 루프트한자.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날개 달린 고철들은 마호가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베이스 기타의 둔탁한 소리와 같은,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이라는 잠재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잠재성은 모범적인 자아실현의 가능성도, 충만한 삶으로의 발자국도 아닌 그저 인과관계와 그에 대한 수용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듯 가능성이 우리 주위에 충만해 있을 , 그것을 두고 지나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인간 됨의 본질이고, 그래서 우리들은 매일 비행기를 이륙시키고, 사랑에 빠지고, 꿈을 꾸는지도 모르겠다.

 

. 고등학교 내내 나는 프로덕션 엔지니어라는것이 되고 싶어 했다. 스피커에서의 소리가 아름답고 조화롭도록 음악의 제작을 감독하는 . 자그마한 흉골을 울리던 묵직한 소리에 대한 기억일까, 고등학교가 끝나갈 무렵 집에 가까이 있던 스튜디오를 들락거렸고, 쌈짓돈을 모아 분수에 맞지 않던 것들을 방안에 모으고는 했었다. 그래도 매일 오후 방에선 은은한 건반 소리가 새어 나왔었고, 아직 키가 반도 되지 않던 여동생이 신기해라 내가 만든 소리를 듣는 것을 기분 좋게 지켜보고는 했었다. 웃고 떠드는 소소한 일상이라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던, 떨쳐낼수록 더욱 강하게 나를 옥죄던 불안감을 잊을 있었던 찰나의 망각이자, 내가 세상에 있었던 가장 아름다웠던 . 그러나 나의 애매한 재능은 닿을 닿지 않던 결과의 상한선에 낙담했고, 나의 꿈은 나의 행보와 괴리를 가진, 지극히 용기 없고 개인적인 꿈에 지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저 흐름에 나를 맡기다 어느 순간 나는 삶의 주체성을 상실했음을 깨달았다. 어느 , 대학에서 담배를 피우며 하얀 달을 바라보다 특별한 선언도, 위로도 없이 나는 꿈을 조용히 포기했었다. 그런 유의 인생을 살았었다.

객실 조명을 낮춘 비행기는 서서히 인도양을 가로질렀다. 남짓한 동남아 아이가 내게 기대어 자고 있었는데, 아이의 자세를 고쳐 놓으려던 아버지에게 괜찮다고 손짓해주었다. 이륙 한창 소란스럽게 떠들던 이방인 가족에게 인상을 찌푸렸던 것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좁은 이코노미석에 앉아 잠시 공항에서 책을 읽었고, 이내 머리가 아려와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 나라의 해역인지 모를 파란 바다가 보였다. 따뜻한 색의 햇빛이 다리를 내리쬐었다. 허리춤에 기댄 이름 모를 아이가 새근새근 숨을 내쉬고 있었다.



동남아의 공항. 좁은 좌석에서 나에게 기대 자던 조용한 아이의 나라에서 조금 덥고, 조금 습해진 공기를 들이켜며 표면 위로 떠오른, 머릿속 깊숙이 자리했던 과거의 감각들에 약간은 나른해진 기분으로 입국장을 나섰다. 마중을 나온 가족과 반갑게 인사하고, 걸렀던 끼니를 함께 해결한 집으로 향하던 왼쪽 조수석에 앉아 지는 태양의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태양을 등지고 서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잔상을 보았다. 보자기에 싸맨 갓난아이를 보이며 행인에게 동전을 구걸하는 여인 옆으로 화류계 청년들이 서로에게 장난을 치며 웃고 있다. 오토바이에 아이 둘을 태운 아버지 앞에는 길거리 노상의 백열전구들이 은은한 노란빛을 품고 있고, 남색 교복을 입은 소녀와 소년이 서로의 손을 잡고 걷고 있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무언가에 이끌린 나는 잠시 걷고 싶다며 차에서 내렸고, 익숙한 낯설었던 밤거리를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걷던 보이던 구멍가게에 들어가 담배 갑을 부탁했고, 청년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며 중년의 가게 주인이 붙임성 좋게 내게 묻기에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슈퍼 주인은 비슷하구나 싶어 피식하며 계속 집으로 향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도통 잠이 오지 않아 방의 불을 켰다. 대를 보냈던 과거의 공간에는 손때묻은 앰프와 기타, 레퍼런스 스피커, 컴프레서 같은 잡동사니들이 한구석에 쌓여있다. 그것들은 만에 다시 마주한, 포기한 삶의 잔해가 주는 약간의 상실감과, 혼란스러운 세상살이 속에서 발견한 익숙한 길의 반가움을 동반한다. 먼지 쌓인 기타를 잡고 손가락이 기억하는 곡을 연주하지만, 이내 굳은살이 사라진 검지와 중지가 아려와 기타의 먼지를 닦고 구석에 있던 케이스에 넣었다. 냉장고에 있던 조금은 얼어있던 맥주를 베란다로 가져와 모금 마셨다. 하얀 보름달을 바라보다 귀에 리시버를 꼽고 카펜터스의 노래를 들었다. 누군가에게 어떤 설명도 필요가 없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듯한 마음의 평정 속에서 나는 지금의 내가 진실되었다고 느꼈다. 비행기 대가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실패와 머뭇거림, 불안과 자기비판을 품고 결국은 또한 필연적으로 하나뿐인 잠재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포기된 삶은 다른 삶을 선물하고, 나를 떠나간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에게로 나를 인도한다. 내가 결국 어떤 용기와 주체성을 가지던, 그것이 나를 어떤 땅에 내려놓던, 삶은 자체로 두고 지나치기 힘든 하나의 가능성이다. 가볍게 부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고, 검은 구름이 보름달을 살며시 가렸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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