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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Episode/비화

인연의 힘 [객원필진 Anonymous]

이 글은 2011년 봄학기에 IEOR (산업공학)전공으로 졸업예정이신 선배님께서 기고해 주셨습니다.

버클리 오피니언에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솔직히 부끄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딱히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GPA가 그렇게 높지도 않고 영어를 아주 잘하는 것도 아니다. 뒤를 봐주는 어른들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분명 평범한 유학생들이 갖고 있지 않은 자산이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서 오는 연륜과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이 그것이다. 졸업을 앞둔 대학 선배가 후배들에게 허심탄회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마음에 몇 자 적어본다.

다소 과장된 말일 수도 있으나 대다수의 유학생들은 미국 도착과 동시에 일종의 선택을 해야 한다. 다른 한국인 유학생들과 주로 어울릴 것인가? 아니면 영어권 학생들과 주로 어울릴 것인가? 분명 영어를 다들 잘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유학생들 앞에서 영어를 쓰는 것이 여간 어색하지 않다.  한국인 유학생 커뮤니티가 매우 배타적인 것은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사실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또한 미국 고등학교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할 때 같이 어울릴 친구들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있었고, 영어권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후에 유학생 친구들과 관계가 급격히 멀어졌던 기억이 있다. 대다수의 유학생들에게 한국인 커뮤니티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만남의 장이기 때문에 여기서 비롯되는 Comfort Zone을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쯤에서 필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필자가 영어권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이유는 솔직히 영어를 빨리 배우고 싶었던 마음 하나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영어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고등학교 4년 동안 봉사 동아리, 테니스 부, 학생회 등 여러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상당한 내적 변화를 겪었다. 성격이 매우 외향적으로 바뀌었음은 물론이고, 자신감이 생기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를 즐기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주위 한국인 친구들은 필자를 “미국물 먹은 FOB”이라고 하며 흉을 봤다고 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필자의 철판이 엄청 두꺼웠던 것 같다. 별로 상관을 안 했기 때문이다.

버클리 입학 후에도 필자는 Fraternity House에서 생활을 하고 아카펠라 등의 활동을 하면서 “미국물 먹은” 생활을 이어갔다. 주변에 유학생 친구가 거의 없었다. 3학년 봄방학 때 한국에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기 전까지 7년동안 단 한차례도 한국을 방문하지도 않았다. 한국에 대한 미련이 없을 정도로 미국 생활을 즐기는 유학생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필자는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남부럽지 않은 즐거운 대학 생활을 하면서도 남모르는 자아의 혼란을 상당히 많이 겪었고, 군입대를 앞두고 미국인스러운 한국인 유학생으로서 주위 친구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고민을 해야 한다는 현실을 많이 원망했다.

필자는 3학년을 마치고 바로 육군 현역으로 입대하였다. 군 복무기간은 필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인생의 전환점이 아닐 수 없다. 2년의 시간을 통해 필자가 그 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한국인으로서의 자아를 확고히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애국가를 부르고 발음이 어눌하다면서 질책하는 선임들과 생활하며 화려했던 유학생활이 먼 기억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미국물”을 다 짜내는 데에 석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제대하고 1년의 인턴 및 잉여생활을 거친 후 지난 가을 3년만에 복학하였다. 4학년 1학기 졸업반. 감회가 새로웠다. 3년 전에 봤던 홈리스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서 자고 있는 모습도, 기억 저편 한창 공사 중이던 건물 화장실 벽에 벌써 “OOO was here” 낙서가 있는 것도 신기했다. 하지만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학기의 시작과 동시에 리쿠르팅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겠지만, 풀타임 리쿠르팅은 4학년 가을 학기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진다. 필자는 레쥬메와 커버레터를 쓰면서 매우 답답했다. 유학생으로서 지원조차 할 수 없는 회사들의 수가 너무 많았고, “미국물”을 철저하게 짜내고 온 지라 미국 현지 학생들과 직접적으로 경쟁을 하는 것에도 도통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 둘씩 날아오는 서류 불합격 메일을 받아보면서 지난 대학 생활을 너무 무의미하게 보냈다며 자책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9월 어느 더운 날 오후에 전화 한 통을 받으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테니스부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에게서 6년만에 연락이 온 것이다. 현재 뉴욕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필자의 레쥬메를 보고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이 친구는 서류심사에서 필자를 위해 힘써준 것뿐 아니라 바쁜 시간을 쪼개어가며 인터뷰 준비까지도 도와줬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유명 컨설팅 회사의 설명회에 갔는데, 심호흡을 크게 한 번하고 문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가 필자를 뒤에서 꽉 껴안았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3년 전 같은 Fraternity에서 생활한 친구였다. 이 친구가 필자를 얼마나 도와줬는지는 언급을 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필자는 약 스무 곳의 회사에 지원을 했는데, 지원 이후 약 열명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부분 한 시간 이상 통화를 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버클리로 직접 찾아온 친구도 있었다. 한 때 같이 도서관에서 밤을 새고, 술도 마시고, 말도 안 되는 주제에 대해 몇 시간 동안 토론을 했던 친구들이 어느 새 사회인이 되어 필자를 기꺼이 도와준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다. 이와 동시에 일찌감치 철판을 깔고 새로운 인연을 즐겼던 필자 본인의 마음가짐이 조금이나마 대견스러웠다. 졸업 후 원하는 진로를 밟을 수 있게 된 것이 분명 친구들의 도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유학생활을 하면서 미국에 흠뻑 젖었었기 때문에 그토록 많고 다양한 인연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고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필자의 경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복학 이후 필자는 유학생 선후배들과 굉장히 친하게 지내고 있다. 물론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도 여전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학 생활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11년, 과거와 현재의 인연들 사이에서 필자 고유의 Comfort Zone을 비로소 찾게 되었다. 주위를 보면 학업에 열심히 매진하면서 선후배와 잘 지내고 있는 후배들이 참 많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정말 멋있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다. 졸업을 앞둔 인생 선배로서 이 글을 읽는 후배들 모두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걷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는 마음에서 지금의 Comfort Zone에서 용기 있게 벗어나 여러 사람들을 두루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나가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분명 본인에 대해 많이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독자들 대부분과는 다른 출발선상에서 시작하여 인간관계의 밸런스와 자아를 찾아나갔는데, 출발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한가지, 새롭고 다양한 인연이 미래의 기회를 안겨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꼭 명심했으면 좋겠다.

새롭고 다양한 인연이 미래의 기회를 안겨다 줄 수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