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격의 달인 장효조, 무쇠팔 최동원, 스포트라이트 뒤에 숨어있던 그들의 암(暗)

Posted by Coffeestraw
2011.10.08 17:24 EDITORIAL/문화 & 예술 :: Culture & Art
                           

故 장효조 감독 (사진 출처: 연합뉴스)

故 최동원 전 감독 (사진 출처: 연합뉴스)


2011년 9, 한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었던 두 야구계의 별들이 일주일 간격으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과거 한국 야구를 평정했던 천재타자와 천재투수의 별세소식은 많은 야구팬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다. 80년대 4번의 타격왕과 5년 연속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던 타격의 달인 장효조 삼성 2군 감독, 그리고 84년 시즌 27승과 한국시리즈 4승으로 롯데의 우승을 이끌었던 무쇠팔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 야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의 이름을 한번 쯤 들어봤을 것이다. 장효조 그리고 최동원, 이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선수 시절부터 어찌보면 비슷한 길을 걸어왔었다.

현역시절 MVP를 수상했던 故 장효조 감독

장효조 감독은 대구상고(현 상원고) 출신으로 70년대 고교 야구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었던 야구 선수였다. 70년대 고교야구에서 그는 4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하며 전국구 스타로 발돋음 하게된다. 이 당시에는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이었기 때문에 고교야구가 국민 스포츠와 다를바 없었다. 그래서 이 당시 라디오를 틀면 방송사들은 낮에 주로 고교야구를 생중계 해 주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 중에서 장효조의 이름을 라디오에서 한번쯤 안들어 본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그는 이미 고교 때 부터 전국구 스타였었다. 그리고 그는 한양대를 거쳐 실업야구 팀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프로야구 원년 다음 해인 1983년 그의 고향 팀인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게 된다. 그는 정교한 타법으로 안타를 잘 만들어내는 교타자라 기억되기도 하지만 그는 장타력 또한 뛰어났었던 클러치히터였다. 현재 그는 프로야구 통산기록에서 0.331이란 경이로운 통산타율로 독보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1988년까지 삼성에서 외야수로 활약하면서 83년부터 87년까지 5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의 명예 또한 안았다. 하지만 88년 시즌이 끝나고 롯데 자이언츠 주축 내야수 김용철과 트레이드 되게 된다. 92년 은퇴하기 전까지 그는 롯데 자이언츠에서 선수생활을 하게된다. 

84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시즌 MVP를 차지했던 故 최동원 전 감독 (사진 출처: 중앙일보)

그리고 최동원 전 감독은 부산의 야구 명문 경남고교 출신으로 그 또한 70년대 고교야구를 평정했었던 대스타였다. 그는 70년대 고교야구와 실업야구에서 활약했었을 당시 팀을 이끌어 가는 주축 선수였다. 경기에서 그는 1회부터 9회까지 200개가 넘는 투구수를 던지며 팀을 승리로 이끄는데 헌신적인 공헌을 했었다. 어떤 날은 1회부터 7회까지 선발 투수로 나선 뒤 8회에는 1루수를 보고 다시 9회에 마무리 투수로 나설 정도로 70년대 최동원이 없었더라면 그 팀이 돌아가지 않을정도였었다. 투수로서 그의 주무기는 낙차 큰 파워 커브였다. 많은 타자들이 그의 낙차 큰 커브와 빠른 변화구에 헛스윙을 하며 물러났었다. 실업야구 당시 그는 롯데 자이언츠의 전신인 롯데 실업팀을 이끌며 어깨에 무리가 갈정도로 활약했었다. 그는 장효조와 김재박과 한대화등의 선수들과 함께 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으로 우승을 이끈 뒤 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처음 프로야구에 발돋음 하게 된다. 83년 첫 해에는 큰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그는 나홀로 4승을 올리면서 롯데 자이언츠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었다. 84년 시즌 중에도 그는 27승과 223 탈삼진을 기록하며 그 해 투수부문 골든글러브와 시즌 MVP를 수상 하였다. 80년대 중반 당시 신인이었던 해태의 괴물투수 선동열과 함께 최동원은 한국 야구의 주축 투수였었다. 하지만 1988년 그는 선수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선수협회를 만드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노력은 구단 프런트로부터 좋은 시선을 받을 수가 없었다. 88년 시즌 후, 80년대 삼성의 에이스 김시진(현 넥센 히어로즈 감독)과 맞트레이드 되어 삼성 유니폼을 입게되었다. 그 또한 트레이드 이후 삼성에서 큰 활약은 하지 못한채 1990년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었다.

장효조와 최동원 이 둘은 그라운드를 떠난후 한동안 외인의 길을 걷게 된다. 장효조는 롯데에서 타격코치로 활약하다가 2000년 들어서 고향팀 삼성의 2군 타격코치가 되었으나 성적 부진등의 이유로 제계약에 실패하게 된다. 이 때 장효조는 자살을 결심했었다고 한다. 선수생활 때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었지만 은퇴 후 선수 때와는 다른 초라한 자신을 되돌아 보고 자살기도를 했었다고 한다. 2005년 삼성 스카우터로 돌아오기전까지 그는 야구 밖에서 외인의 길을 걸었었다. 최동원은 장효조보다 더 외인의 길을 걸었었다. 최동원은 은퇴 후 코치직을 고사하고 야구 밖에서 맴돌기 시작한다. 90년대 그는 비록 낙선했지만 부산 시의원 선거에 출마도 하였었고 종종 브라운관에도 시트콤과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얼굴을 비추었었다. 2001년 한화 투수코치로서 돌아오기 전까지 최동원은 정말 야구와 거리가 먼 외인생활을 하였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은퇴 후 야구계와 거리를 두게된 가장 큰 이유는 은퇴 이후 그들의 생활이 초라하게 느껴졌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역시절 장효조와 최동원은 정말 한국의 간판 타자와 투수로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 있었었다. 이런 스포트라이트는 다른 야구를 하는 동료를로부터 많은 부러움과 시셈을 유도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그들을 외인의 길로 인도한 원인이 아닐가 생각된다. 그리고 이 둘은 야구에 있어서 재능도 타고 났지만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서 완벽주의에 가까운 뼈아픈 노력이 있었다. 장효조는 전날 안타를 기록하지 못하면 그날 밤 숙소에 돌아와서 밤새 옥상에서 배팅연습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컨디션에 따라 쓸 수있는 무게가 다른 여러 종류의 야구배트를 항상 가지고 다녔고 매일 야구배트에 꼼꼼하게 기름칠을 해주었다고 한다. 최동원 또한 중학교 때 부터 꾸준한 투구연습을 통해서 기량을 발전 시켰었다. 그는 경기가 끝난 뒤에도 밤에 집에 돌아와서 그 날 경기에서 던진만큼 불펜투구를 했을 정도로 악바리였었다. 그리고 매경기에서도 한구 한구 온 힘을 다해 타자를 상대했을 정도로 그는 최선을 다했었다. 장효조와 최동원, 이 두 사람의 완벽주의가 어떻게 보면 은퇴 뒤 그들을 더 힘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정말 안타까운 일은 장효조와 최동원 모두가 지도자로서 빛을 볼수있는 순간에 두 사람 다 암이라는 무시무시한 병에 의해 유명을 달리 하게 됬다는 것이다. 장효조는 삼성의 2군 감독으로서 이번 시즌 배영섭, 정형식, 모상기 등 삼성의 시즌 우승을 이끈 원동력이 되었던 신인 선수들을 2군에서 키운 장본인이었다. 2011년 프로야구 탄생 30주년을 맞아 7월 레전드 올스타 선정 기념식에 나왔을때만 해도 그는 건강해 보였었다. 하지만 암이라는 병은 두 달만에 그를 하늘의 별로 만들어 버렸다. 최동원은 2008년 대장암 진단 후 한화 2군감독직을 고사하고 재기에 힘썼다. 그 또한 신생구단인 NC다이노즈의 초대 감독 후보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지도자로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요양 중에도 그의 마지막 꿈인 롯데 감독을 꿈꾸며 재기에 힘썼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그의 마지막 꿈은 이루어 지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타격의 달인 장효조와 무쇠팔 최동원 이 둘은 타자와 투수라는 다른 보직에서 활약했지만 그들의 인생은 참 많이 닮아 있고, 많은 프로야구 팬들에게 있어서 인상적인 경기를 보여 주었던 선수들이었다. 은퇴 후 그들은 인생에 있어서 방황의 시간 또한 보냈으나 재기에 성공했다. 그들이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려고 했을때 하늘도 질투를 했는지 암이라는 병이 그들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인도하였다. 하지만 삼성 팬들에게는 파란피가 흐르는 타격의 달인 장효조로, 롯데 팬들에게는 무쇠팔 부산 갈매기 최동원으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P.S. 이 글을 읽어 주신 분들 중에서 야구에 관심이 있으신 분도 있으실 것이고 별로 없으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스포츠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장효조 감독님과 최동원 전 감독님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분들이 기억해 주시면 좋겠는게 저의 작은 바램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故 장효조 선수, 故 최동원 선수의 명복을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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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료로 블로그 광고하고, 방문자 수도 늘려보세요~ http://bumup.net
  2. "항암치료 24번 받으면서도 ‘괜찮심다’며 안심 시켜”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094/6372094.html?ctg=14&cloc=joongang|article|rangking
    • 글이 길어질까봐 최동원 선수의 항암치료 과정까지는 안썼는데요, 2007년 발병한 대장암으로 24번의 항암에 수차례의 방사능치료를 받고도 프로야구 경기감독관으로 그라운드에 복귀해서 괜찮고 자신은 이제 건강하다는 말을 하셨죠. 그리고 최근에 암이 다시 재발했는데 그 때 항암치료를 거부하시고 자연요법을 고집하시며 언론을 통해서는 자신은 괜찮고 건강하시다고 하면서 항암치료 없이 전국 방방곡곡의 요양 가능한 곳을 돌아다니며 혼자만의 투병생활을 이어오셨죠. 돌아가시기전 마지막으로 언론에 모습을 비춘게 올해 7월 경남고와 군산상고 출신의 레전드 매치때 나오셨는데 그 당시 수척해진 모습에 경기에도 출전못하는 상황이셨는데도 자신은 단지 살을 많이 뺀것 뿐이라고 건강하다고 하셨던게 생각나는데.. 좋은링크 감사합니다!!

      ""다이어트 때문에…"최동원이 마지막까지 건강 숨긴 까닭"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14/2011091400669.html
    • ajak
    • 2011.11.08 20:33 신고
    대한민국 야구가 국민 스포츠로 오늘날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 것은
    70년대 대구상고의 장효조때 부터이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영웅을 용납않는 한국의 풍토..
    고질적인 주변의 시기와 질투..
    최고를 지키기 위한 스트레스..등으로
    우리의 천재들은 단명할 수 밖에 없었나보다...
    • 이콘
    • 2012.08.30 01:14 신고
    고 최동원선수님생각하니깐 ㅜㅜㅜ영화 퍼펙트게임이생각나네요
    좋은글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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