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에 관하여.

Posted by 썰킴
2017.10.20 18:38 EDITORIAL/문예 ::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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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문득 거울을 볼 때, 자기 자신이 낯설어진 경험이 있는가? 친구들과 대화하던 중, 문득 자신이 남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든 적 있는가? 식사 후 모든 친구가 담배를 피우러 나간 동안 빈 접시들과 함께 덩그러니 남아 본 적이 있는가?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린 이 사회에서 자신을 하찮은 하나의 조각일 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모든 질문은 한 가지의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 질문할 수 있다. “당신은 소외감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소외라는 단어는 현대 사회에서 번번이 사용함에도,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철학적 단어이다.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에 따르면, 소외라는 단어의 정의는 “어떤 무리에서 기피하여 따돌리거나 멀리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매일의 이 소외감을 어찌 저 한 줄에 다 담을 수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소외되고, 따돌려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언제 소외감을 느끼며, 어떻게 소외되어 갔을까.


사실, 같은 “소외”라는 단어 안에는 사회적 소외와 개인적 소외가 함께 들어가 있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곤 한다. 두 소외 모두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마치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을 준다는 점에서 같지만, 그 소외의 원인과 해결 방안이 다르다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둘을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개인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항상 완벽하지도 않고, 사회를 개혁해서 사회적 소외를 없앤다고 해서 모든 개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필자는 사회적인 소외와 개인적인 소외의 원인, 그리고 탈 소외를 위한 해결방안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1]



사회적 소외; 자본주의와 분업, 보람을 잃고 물질을 택하다


우리는 언제 가장 큰 소외감을 느끼는가. 소설가 최인호는 작품 “타인의 방”을 통해 소외된 개인이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묘사해냈다. 작가는 극 중 화자가 자신의 방에서 소외되어 가는 마음을 “사물화” 되어 가는 것으로 표현한다. 가구들과 괘종시계가 사람처럼 생동감이 느껴지고, 주인공이 마치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초현실적 표현을 통해 인간이 느끼는 소외감을 표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이 느끼는 소외감은 나를 “사물처럼 대할 때” 가장 크게 느껴진다는 것을 묘사하였다.


작품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어느 때부터 “사물화”가 되었는가. 헝가리의 정치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그의 저서 “거대한 전환”을 통해 그 시작이 산업혁명이라고 이야기한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직물, 철강, 그리고 증기기관의 발전을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 시켰고, 비약적인 경제의 발전을 일구어냈다. 하지만, 산업 혁명은 “인간 소외”라는 가장 큰 숙제를 우리 사회에 던져 놓았다. 기계를 통해 효율성의 힘을 체감한 인간은 “노동력의 효율성”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를 위해 분업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고, 분업은 노동력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증대시켰다. 하지만, 생산성의 증대는 인간의 행복을 앗아갔다. 기계화가 어떻게 인간을 소외시켰는지 A 씨의 이야기를 통해 알아보자.


분업의 형태로 물건을 생산하기 전, 신발을 만들던 노동자 A 씨는 수제로 자신의 신발을 디자인하고, 직접 가죽을 골라 생산하고, 마케팅을 통해 판매하였다. 그는 신발 만드는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고, 자신이 만든 신발을 신고 다니는 소비자들을 보며,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 사회로 들어와 기계의 생산량을 이길 수 없게 된 A 씨는 자신의 기술을 살려 신발 공장에 취직한다. 그는 매일 아침 15번 의자에 앉아, 14번 노동자가 건네어 주는 (미완성된) 신발을 받아 밑창을 붙인 뒤, 끈을 다는 16번 노동자에게 건네주는 일을 하게 된다. 분업을 통해, 그는 더욱 많은 신발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혼자 경영하던 신발 가게보다 효율적으로 적은 일을 하며, 같은 양의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길을 가다 자신이 만든 (정확히 말하자면, 만드는데 참여한) 신발을 보고 더 이상 보람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이다.


A 씨의 경우와 같이, 근대 사회에는 많은 노동자에게 더 이상 자신의 노동으로 만든 생산품은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자신은 그저 “사물화”가 되어 기계처럼 밑창을 붙일 뿐이었고, 그의 노동은 자신의 신발에 대한 보람 대신 월급을 위한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들의 소외된 삶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펙을 갈고 닦아 회계팀에 입사한 김 사원도, 물류 팀에서 일하는 최 대리도, 자기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회사 전체에 대한 전망 따위는 필요 없다. 그저 회사 안의 하나의 나사로서, “사물화” 된 채 그저 열심히 회사라는 기계를 돌리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을 사회로부터 소외시켜 나갔다는 것이 칼 폴라니가 그의 책에서 말하는 기계화로 인한 “인간 소외” 이다.


이제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인정받는 대신, 높은 효율성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일에 대한 보람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은 이제 그 보람을 임금이라는 가치를 통해 보상받으려 했다. 이러한 분업화와 인간 소외현상은 사람들에게 물질 만능주의 풍토를 불러 일으켰다. 사회는 노동자에게 철학자 대신 전문가가 되도록 강요했고, 그 강요의 방법은 임금의 격차와 사회적 대우였다. 우리 사회는 전문가들에게 높은 보수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주며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리라고 끊임없이 채찍질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은 더욱 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자신의 마지막 남은 노동의 가치인 임금을 지키려 노력하게 되었다.


소외된 노동자들의 물질만능주의는 또다른 시민들을 소외시켰다. 물질만능주의 풍토는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시선을 차단했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되었다. 당장 먹을 밥 한끼 없는 사회적 약자에게 눈을 돌리기에는 물질이라는 사탕은 너무 달콤했다. 결국 많은 이들은 쌀밥 대신 사탕을 택했고, 그 사탕은 소외된 이들의 죽음을 먹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다.


[2]

                        

개인적 소외; 21세기 또 다른 소외의 시작, SNS


사회적 소외는 분업이라는 구조로 인한 보람과의 단절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개인적 소외의 시작은 인류의 발전으로부터 기인했다. 인류는 끊임없이 발전했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모든 것들이 디지털화 되기 시작했다. 디지털화는 아날로그의 그것에 비해 모든 것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하였고, 인간관계와 소통 역시 효율적인 대안이 생겼다.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SNS의 탄생 이후, 우리는 집 안에서도 언제나 친구들과 연결될 수 있고, 먼 거리에 있는 사이라도 온라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언제든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SNS는 마치 효율과 탈소외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구원자 같은 존재로 보였다.


하지만 10년여가 지난 지금, 우리의 효율적 소통은 소외감이 사라진 삶을 선물해 주는 대신 인간을 SNS의 피지배인으로 만들었다. 소통을 위한 SNS는 점점 소외를 위한 SNS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요즈음 세태를 잘 표현하는 “카페인 우울증”이라는 단어가 있다. 카페인 우울증이란 커피 속 카페인이 아닌,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으로 대표되는 SNS로 인한 우울증을 말하는 것인데, 점차 소통이 아닌 자랑의 수단으로 SNS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용자들 때문에, 역설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게 된 개인들이 느끼는 우울감을 나타낸 단어이다. SNS 속 세상에서 한 친구는 외국의 해안가에서 올린 휴가 사진을, 또 다른 친구는 자신의 날씬한 몸매를 자랑한다. SNS는 더 이상 소통의 수단이 아닌 과시의 수단이 된 것이다. 카페인 우울증에 걸린 현대인들은 온라인상에서 나만 외롭고, 불행하다고 느낀다. 내 친구가 받은 좋아요의 개수와 비교되는 내 포스트의 무플은 마치 나를 실패자라고 낙인 찍는 것처럼 느껴지고, 남들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책을 잘 써 내려 가는 것 같은데, 나의 책은 지하철역에서 한 달째 팔리지 않는 2000원짜리 소책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은 자괴감마저 느끼게 된다. 이는 더 자극적인 콘텐츠, 더 사랑받는 콘텐츠를 향한 갈망으로 이어지며, 또 다른 허영과 또 다른 소외감을 낳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게 될 뿐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문제일까?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댄 길버트 교수에 의하면,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실제 정체성이 아닌 가상의 정체성으로 보이기를 원한다고 한다. 대부분 SNS에 올리는 자신의 모습은 자신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지향하는 모습, 또는 자신이 원하고 만들어 내고 싶은 모습을 사이버 공간을 통해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들의 SNS의 투영된 모습이 그들이라고 믿으며 자신을 소외시켜 나가고, 자기 자신을 깎아내려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SNS에 종속된 삶을 살아간 채, 나의 삶을 위한 SNS가 아니라 SNS를 위한 나의 삶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소외되기 시작한다.



[3]

                                               

소외가 낳은 문제점; 왕따 문제와 관종, 소외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


자본주의와 분업화로 인한 사회적 소외와 SNS와 미디어의 과장된 정보로 인한 개인적 소외는 인간들을 소외시키며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이러한 소외로 인한 문제는 각 개인이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치도록 만들었다. 21세기 초반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지금까지 학교에서 번번이 일어나고 있는 학교 내 집단 따돌림, 혹은 왕따라고 불리는 사회적 문제는 어린 나이에 소외를 경험한 개인들이 옳지 못한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 소외를 극복해 나가는 방법이다. 집단 따돌림이란, 학교 내외에서 2명 이상의 학생들이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이거나 반복적으로 신체적 또는 심리적 공격을 가하여 상대방이 고통을 느끼도록 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집단 따돌림 문제는 어디서부터 발생한 것일까? 인간은 태어날 때 선하다는 성선설을 믿는 필자로서는 집단 따돌림 문제 역시 소외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외를 경험한 어린아이는 소외가 주는 두려움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를 집단에서 소외시킴으로써,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유대감을 형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집단 따돌림의 악순환을 만들어 낸다. 소외를 당한 아이는 이제 자신이 소외되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소외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 아이는 자신이 소외되지 않을 수 있는 집단으로 옮겨 그 집단 내에서 누군가를 소외시킨다. 결국, 이는 돌고 돌아 모두가 가해자이자, 모두가 피해자인 제로섬 게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는 아직도 대한민국 학교 내에서 해결할 수 없는 커다란 문제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이다.


또 다른 소외로 인한 현상은 “관종” 현상이다. 왕따 문제가 집단이 개인을 소외시켰다면, 관종이라는 단어는 그 소외된 개인들이 소외되지 않기 위해 치는 몸부림이다. 관종이라는 단어는 관심병, 혹은 관심종자의 줄임 말로서,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하고, 항상 남들의 이목을 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신조어이다. 유소년기에 집단 따돌림을 경험한 이들은 무관심이 주는 두려움을 배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집단 따돌림을 피하기 위해 남들의 관심에 집착하게 된다. 이들이 집착은 주로 SNS를 통해 나타나는데, 그 방법 역시 다양하다. 자극적이거나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생활까지 SNS를 통해 공개하며 관심을 갈구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빛나는 모습만을 담는 이들, 혹은 SNS를 통해 다른 이들을 공격하는 글들을 올리는 이들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을 이상한 사람, 혹은 문제가 있는 환자 취급하며 비난하고, 멀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은 사회와 개인의 소외가 만들어 낸 피해자일 뿐이다. 소외의 두려움을 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발버둥치고 있는 이들과, 그들을 보며 불편감을 느끼며 이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겹쳐, 모두가 소외의 패배자가 되는 것. 이것이 이 사회가 직면한 문제이다.


[4]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보 앞으로


우리 인간은 소외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소외의 반복이 될 것이며, 소외는 우리를 주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아가야만 한다.


사회적 소외감을 없애기 위해서 개인은 자신의 일에 대한 보람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일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이 필요하다. 이는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 속에서 보람을 찾는 길을 알려줄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모든 사회의 구성원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사회 보장제도와 공적 부조를 체계화하는 것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 소외를 없애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소외된 이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자기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남들의 평가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각 개인이 현재의 자신을 인정하고 경제적 능력으로서 나의 “효율성”을 내려놓으려는 노력과 함께 다양한 창조적 활동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평가받으려는 태도와 정신적 성숙을 갖추어야 한다.


소외를 조장하는 이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발걸음은 더디고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이 사회의 구성원이 소외되지 않기 위해 사회적 제도를 고치는 일에 앞장서고,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왼발을 한 보 앞으로 나가려고 노력한다면, 그 노력은 다른 이가 내디딜 또 다른 왼발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당신의 한 보는 이 사회를 소외에서 벗어나게 하는 행진이 될 것이고 소외된, 잊혀버린, 잊힌, 그리고 스쳐 가는 모든 이들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모두 이 탈소외를 향한 발걸음에 동참해주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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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wspaper.org/article/6770

[2] http://yeogangyeoho.tistory.com/458

[3] http://jbyouthpress.tistory.com/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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