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조각

Posted by 희씨
2017.11.06 18:13 EDITORIAL/문예 ::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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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마주하기: 인과로서의 필연을 넘어, 존재로서의 필연으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우연을 마주합니다. 때로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전 애인을 만나 어색한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우연한 아이디어로 성공해 일확천금을 얻기도 하며, 반대로 우연히 사고를 당해 다칠 수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많은 경우에 우리가 스스로 마주한 우연한 사건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 우연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입니다. ‘내가 그 날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당할 일이 없었을 텐데.’ 라거나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잘났기 때문이야. 라는 생각 등이 그 예시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불행을 마주할 때, 자신도 모르게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상황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돌아보게 됩니다. 한편, 예상치 못한 행운을 마주한 경우에는 그 행운을 자신으로부터 설명해 냄으로써 더욱 큰 행복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이는 참으로 역설적인 일입니다. 우연은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우연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러한 우연을 인과적으로 해석해내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는 우연에서 필연을 찾습니다. 이러한 경향성은 예상치 못한 불행의 경우 더욱 두드러집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혹은 ‘내가 뭘 잘못했기에 나에게 이런 일이’와 같은 물음들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은 사실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그 우연은 누군가에게 일어남으로써 비로소 실재하게 된 것이기에, 왜 하필 무슨 연유로 당신에게만 그 일이 일어났는지 묻는 것은 가정에 근거한 희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은 아무런 실재하는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연 속에서 어떠한 필연성을, 설명 가능성을, 그리고 인과성을 찾으려 합니다.

물론, 이러한 물음이 불행에 빠진 사람들의 자기 치유에 도움을 준다면 이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을 통해 자신을 탓하고, 자신이 했던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게 되는 반복되는 부정의 사슬에 빠지게 됩니다. 우연의 필연성에 대한 갈증이 오히려 우리를 갉아먹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우연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우연이 우리의 삶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우리가 이처럼 우연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인과로서의 필연성에 대한 갈증을 넘어, 삶의 우연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마주할 때 우연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우연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실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함께 우연이 존재하지 않는 인과와 필연의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한 원인과 결과로써 존재하는 이 필연의 세계에서 개인의 존재는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거시적인 세계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 속의 수많은 개인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 세계에서 사회는 개인의 주체적 사상과 실천으로써 변모할 수 있는 동태적 상태가 아니라,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정태적 조건일 뿐일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질 이유도, 자신이 설명해야 할 불가해성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어진 그대로,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의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연이 실재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이는 ‘우연의 철학’으로서의 실존주의에 다다르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가 설명할 수 없는– 그리하여 그에게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이라고 인식되기에 그치는– 무언가에 의해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을 그립니다. 이후 이어지는 재판 과정 내내 스스로 "법정에서 아득히 멀어진 느낌"의 이방인이라 느낍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재판정의 이방인’이기 이전에 ‘삶의 이방인’이었습니다. 우연히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고’, 우연히 아랍인을 ‘죽이게 되고’, 우연히 죽음에 ‘이르게 된’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이방인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자기 소외, 곧 자신의 삶으로부터의 타자됨이라는 역설적 상태는 그가 재판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이유를 설명할 때 문학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살인의 이유를 묻는 재판장에게 "그건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살인이라는 - 어쩌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주체적이고, 개인적이며, 적극적인 - 행위는 태양이라는 너무나 수동적이고, 보편적이며, 불가해한 이유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미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뫼르소에게는 이 설명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이미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이 살인 역시 그에게는 또 다른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연장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카뮈의 이 소설을 우리의 삶을 성찰하도록 이끄는 ‘부조리의 문학’이라 평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이와 같은 우연 속에서 비로소 삶의 실존적 조건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는 우연의 철학입니다. 카프카가 쓴 《변신》의 유명한 첫 문장 - "어느 날 아침, 잠자던 그레고르는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에는 어떠한 인과도 맥락도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필연적으로 우연을 자신의 실존으로써 받아들이고 이를 긍정해야 하는 운명의 소유자입니다. 그렇기에, 원점으로 돌아가 어쩌면 인간에게 우연은 결국 필연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필연은 존재로서의 필연, 즉 우연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찰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선택을 후회하고 자신을 탓하는 인과적 필연에 대한 탐닉과 다릅니다. 인과로서의 필연을 넘어선 존재로서의 필연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우연을 긍정하고, 더 나아가 이를 우리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예상치 못한 우연은 환영받지 못할 이방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삶의 필연적 조각입니다. 우연으로써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본질에 대해 성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철학적 주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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