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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문화 & 예술 :: Culture & Art

욕 권하는 사회


내가 술을 먹고 싶어 먹는 아니야. 요사이는 낫지마는 처음 배울 때에는 마누라도 아다시피 죽을 애를 썼지. 먹고 뒤에 괴로운 것이야 겪어 사람이 아니면 없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먹은 것이 돌아 올라오고……그래도 아니 먹은 보담 나았어. 몸은 괴로와도 마음은 괴롭지 않았으니까. 그저 사회에서 것은 주정군 노릇밖에 없어…….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 (1921)』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에 좌절한 소극적인 지식인에게 술을 강권하는 사회와, 지식인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 그리고 현실을 외면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지식인 사이의 딜레마에 냉소를 보낸다.

 

원시 수렵사회, 농업혁명, 산업혁명, 근대화, 그리고 첨단화를 거치며 사회는 점점 더 많은 것을 권하고 있다. 물질적 풍족과 정신적 평안의 경계를 허물며 황금 만능주의를 권하고, 지나치게 맹목적인 성과지향성을 권하기도 하며, 나르시시즘에 기반한 사회적 양극화 또한 권한다. 이러한 각종 사회적 병폐는 이전 세대들의 합인 역사라는 것이 이룩한 발전과 번영의 그림자이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부분은 언어적 폭력으로 정의되는 이다. 이 몹쓸 사회가 욕을 권한다면, 소극적인 지식인의 냉소보다 적극적으로 욕 권하는 사회에 물음표를 찍어 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역사를 통틀어 무력 없는 시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원시 수렵 사회에서도 인간은 다른 생명체에 비해 우월한 무력을 행사하여 배를 채웠고, 현대 사회에서도 공권력이 보장하는 합법적인 무력에 의해 치안은 유지되고 있다. 이와 같이 어느 수준의 무력은 다소 불완전한 인간이 보다 완전함에 다가설 수 있도록 돕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다만, 합리적인 무력이 아닌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렇다면, 과연 욕의 일부분이 언어적 무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만약 그렇다면 언어적 무력과 언어적 폭력의 경계는 어디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가장 한국적인 민요 아리랑경기 아리랑에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서 드러나는 은 한국을 대표하는 하나의 정서이다. 한 민족의 고유한 정서는 그 민족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력을 갖게 된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삶에 녹아난 애환의 정서를 언어적 무력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우리 문화의 일부분이라는 의견을 조심스레 제시해 본다. 같은 맥락에서 욕쟁이 할머니라는 개념 또한 언어적 무력의 문화적 경계선을 형성하는 하나의 지표이다. 자그마한 포장마차에서 왜 또 괜히 왔냐는 푸념과 함께 구수한 욕을 몇 마디 던지며 넘치는 인심으로 그릇에 이 인분 같은 일 인분 안주를 담아 주시는 욕쟁이 할머니. 요새는 쌍욕라떼라는 컨셉의 카페까지 등장하였는데 이들의 언어적 무력은 각박한 현대 사회의 다소 과격한 힐링을 담당하고 있다. 걸걸한 고향 사람들의 사투리 진한 입담을 상기시키며 기성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이 욕쟁이 할머니의 욕은 욕 먹을 정도인가? 


욕 권하는 사회의 행적은 계속된다. 한국 영화 산업을 통해 제작되는 수 많은 영상물 중 꽤나 많은 숫자의 영화가 조폭 영화라는 장르로 기획되어 흥행한 바 있다. 이는 조직 폭력배의 예상외로 인간적인 면모,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보여주며 사회적 병폐를 해학적으로 해석한 경우라고 볼 수 있겠다. 거친 언어사용은 조폭 영화의 특징적 요소 중 하나이다. 욕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 있는 가운데, 욕의 상품화를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아이러니하다. 영화 신세계 (2012) 에서 '정 철' 역의 배우 황정민은 '이자성' 역의 이정재와 재회하며 다짜고짜 욕을 한다. 욕설이 난무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두 극중인물이 서로에게 돈독한 사이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욕설은 서로의 유대감을 드러내는 장치인 셈이다. 문화를 재구성 하여 판매하는 컨텐츠 산업의 흥행에 욕이 기여한 점이 있다면, 이는 합리적인 수준의 언어적 무력이라고 해석 하여도 무방 할까?


욕 권하는 사회가 지나온 길을 거꾸로 걸어 보면 발원지에 도착할 것이다. 몇 가지 가능성 중 역사에 시선을 향해 보자. 조선시대에 만연했던 유교사상을 비롯한 동양적 가치관은 절제와 중도를 강조하며 성별, 나이, 신분에 따른 사회적 계층 구조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단기적으로 사회적 안정화를 도모하는 데에 도움이 될 지는 모르지만 계층 간의 의사소통을 크게 제한하여 사회 구성원의 불만을 축적시키는 데에도 일조한다. 더군다나 보다 우리의 안위를 걱정하는 한국적 가치관에서는 개인에게 자유로운 의견 표출이 익숙하지만은 않을 것이다고전심리학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은 도덕성을 대변하는 슈퍼이고가 인간의 무의식과 의식간의 갈등을 중재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도덕이라는 것은 시대적, 상황적 배경에 따라 사회 구성원에 의해 정의되는 것인데, 유교 사회의 수직적 구조가 다수의 사회 구성원에 의해 인정받을 때에는 그 사회적 틀에 순응하는 자세가 바로 지켜야 할 도덕이었던 셈이다. '도덕적인' 대화의 부재가 갈등의 심화를 낳고, 갈등의 심화를 통해 유교적 사상의 가면에 금이 간다면 오래 동안 묵혀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지난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는 김연아 선수와 소트니코바 선수를 둘러싼 큰 논쟁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김연아 선수가 흘린 땀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아는 필자도 판정에 크게 안타까웠다. 한 가지 더 안타까웠던 점은, 소트니코바 선수의 개인 페이스북 계정에 한국인들이 심각한 수준의 욕설을 무차별적으로 게시하였다는 점이다. 속상한 마음은 공감하지만 언어적 무력과 언어적 폭력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지성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의미 없는 비난 보다는 날카로운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악법도 법이라는 말이 있듯이 언어적 무력도 언어의 부분이다. 어느 정도의 언어적 무력은 사회, 문화, 정서적 배경에 의해 용인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어적 폭력을 언어적 무력으로 정당화 시키지 않는 것이다. 엄격한 기준과 규율 하에 욕이라는 것에 엄해져 보자. 기준은 명확하지 않으면서도 명확하다. 언어의 전달 대상이 느끼기에 언어적 무력인지 폭력인지가 구분 되는 것이다. 이 간단한 결론에 도달하기 까지 많은 물음표를 찍어왔고, 앞으로도 언어적 무력과 폭력의 경계선에 대한 성찰을 계속 할 생각이다. 다만, 물음표 대신 마침표를 찍고 싶은 점이 한 가지 있다. 합리적인 무력의 틀을 벗어난 폭력은 절대 정당화 될 수 없다. 욕 권하는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술 권하는 사회의 지식인의 냉소를 배워서는 안 된다. 대신 이렇게 반문해보자. “이 몹쓸 사회가, 왜 욕을 권하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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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의 기적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