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의 봄 은 미국 UC Berkeley 대학교에서 정치과학학부 교수로 계신 Darren Zook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집필 하게되었습니다. 강의를 통해 배우고 느꼈던 부분을 필자의 필체와 방식으로 표현된 연재물임을 이렇게 밝힙니다.
1970년도의 한국은 격동의 시기였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울려퍼진 몇발의 총성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15년에 가까운 유신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국사의 한 장을 차지했던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양극으로 나뉘지만, 1980대에 들어설 당시 한국이 어느정도의 산업화를 이룬 국가라는 점은 부정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1970년대, 다른 국가에서 역시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이 시점에 이 두 초강대국들은 이미 지구밖으로 위성을 쏘아 올릴만큼 진보적인 과학 기술을 가진 기술대국으로 자리잡았다. 일본 역시, 2차대전의 참패에 뒤따른 민주화 작업을 통해 제국주의국가에서 의회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다. 1970년대에 들어설때쯤, 동남아시아에 있는 웬만한 나라들 역시도 식민지주의에서 해방함으로써, 각자 홀로서기를 위한 몸부림을 치는 중에 있었다.
이와 같이, 1970년대 쯤이면,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어느정도 문명화가 이루어 지고, 품격있는 삶의 질을 추구하는 노력을 하는 과정에 있을거라 느끼는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보인다. 그렇기에, 1970년도 당시,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엄청난 문명적 퇴보는 더욱 경악스러운 사건으로 다가온다.
1975년 봄의 캄보디아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캄보디아는, 2차대전 이후 팽배했던 반식민지화 정책으로 인해 해방된 여러 나라들중에 하나였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지속되어 왔던 하나의 체제가 바뀌는 변환점은 주로 분열과 다툼의 여지를 제공하기 마련이다.
1953년, 캄보디아의 정치적 공백을 노로돔 시아누크라는 사람이 채우게 된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수상으로서 시아누크의 행적들은 그다지 대중의 환영을 받을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권력남용으로 인한 부패한 정권, 시민들의 의견이 억압받는 사회, 대중들은 이런 시아누크의 체제에 불만을 품기 시작해고, 결국 1970년, 론 놀 이라는 군인장교가 일으킨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내어주게 된다.
오랜 식민지 정책으로 인한 억압, 해방이후 찾아온 시아누크의 독재정치로 인해 캄보디아 사람들은 하루빨리 캄보디아에도 민주주의가 찾아와 공정하고 안정된 사회가 자리잡길 소망했다. 그렇기에,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차지한 론 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하루빨리 누군가 나타나 좀더 나은 사회를 건설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론 놀은 그런 민심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당시 냉전전쟁으로 인해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공산화를 극도로 우려했던 미국정부에게, 캄보디아를 공산국가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전폭적인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나갈수 있었다.
이런 론 놀의 정부는 1975년 까지 지속되었다. 허나 론 놀의 지속적이고 일방적인 요구에 미국이 살짝 주저하기 시작했고, 그 틈에 캄보디아에선 내전이 일어났다. 론 놀은 패배하였고,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신흥세력이 드디어 그림자에서 빛으로 나올수있었다. 오랫동안 론 놀 정부에 반대하고, 속히 공정한 사회가 도래하길 바랬던 민중들에게 이 새로운 집단은 “해방자” 로 불리우며 환영하였다.
1975년 봄,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 펜에 “크메르 루즈”가 찾아왔다.
by 안녕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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