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하루 아침, 여름 창공 아래 귀가 찢어져라 울어대던 매미소리를 벗 삼아 나는 색채 없는 육층 아파트 비상계단 입구에 우두커니 서 차가운 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십분. 이십 분. 갑갑한 더위 속이었지만 콘크리트 그늘 아래 여름 향내가 아무래도 좋아 그새 미적지근해진 커피를 연신 홀짝대며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등굣길 한 남고생, 여고생이 저만치 가로수들 사이로 손을 잡은 채 걸어가고 있었고, 시야 속 바삐 날갯짓을 하던 녹색 잠자리를 따라 시선을 치켜세우니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여객기가 작열하는 태양을 소리 없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꽤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아침을 만들고 계셨다. 좁은 아파트 부엌, 이리저리 움직이시던 아버지 사이로 들어간 나는 젓가락이나 그릇 같은 것을 꺼내 와 상에 올려놓곤 털썩 바닥에 앉았다. 건너편 방, 나무 책상 위 오래된 스피커에선 콜트레인의 색소폰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아버지는 갑자기 무슨 재즈냐 물으시며 진한 된장찌개를 내오셨다. 자리를 잡으신 체 한 큰 술 밥을 뜨시며 유학생활은 힘들지 않느냐 여쭈시는 아버지 손목, 색 바랜 시계의 바늘은 한자리에 멈춰있었다. 방안, 고조되던 트럼펫과 하이햇 소리가 점점 조용해지더니 이내 다시 색소폰 소리만 남았고, 할만합니다, 라고 그제야 나는 대답했던 것 같다.
고장 난 시계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새로 하나 장만하시라고 말씀을 드리니 아버지께선 서울에 아는 시계 점에서 고치면 된다 고집하시며 오늘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으셨다. 삼십 분 남짓 걸리는 길, 말동무나 해드리자 알겠다 대답했다.
열두 시쯤 되었을까. 점심거리를 찾아 나온 회사원들로 붐비던 서대문구, 충정로 갓길에 겨우 차를 세운 뒤 아버지는 기억을 더듬으시며 한 시계 점을 찾고 계셨다. 나 또한 그저 조용히 아버지 뒤를 따르다 어디선가 결국 둘 다 길을 잘못 들었음을 깨달았는데, 도심 한복판, 하염없이 다시 길을 찾아 걷던 우리 눈앞에는 어느 샌가 마치 고장 난 아버지의 시계처럼 시간이 70년대에 멈춘듯한 한 달동네가 서울의 새로운 주소 표지와 어울리며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길거리 누렁이 한 마리가 구멍가게 앞에 앉아 늘어진 눈빛으로 갑자기 변한 주변에 어리둥절해하던 아버지와 아들을 응시하고 있었고, 길을 잃은 답답함이 베여있던 아버지의 두 눈은 어느새 향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곤 기분이 썩 좋아졌다. 마치 한 번도 보지 못한, 부모님 옛적 모습을 담은 색 바랜 사진 한 장 같았다.
경사지고 좁은 골목 거리를 걸으며 다섯 사람 겨우 들어가 앉을만한 동네 중국집이나 몇 십 년 치 인물사진들이 벽 한편을 빼곡히 메우던 사진관을 둘러보시던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다. 그리고선 그대가 사십 년 전 다니시던 고등학교가 가까우니 같이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 나지막이 물으셨다. 기어코 찾은 시계 점에 대충 시계를 맡기고 온 부자는 그 길로 시간도, 날짜도 잊은 채 종로로 향했다.
같은 골목길을 다시 지나 서소문 대로변으로 나온 아버지와 나는 계속해 북쪽으로 걸었다. 화려하고 위압적인 서울 시내 빌딩 숲 사이로, 또 수많은 인파 사이로,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매미소리 가득하던 덕수궁 서울시청을 가로질렀다. 이내 힘에 부쳐 동아 일보 사옥 앞 한 커피숍에 앉아 아버지와 이 건물, 저 건물의 예전 모습 이야기를 하다가는 또다시 광화문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등학생 시절 장발의 아버지가 한때 또래들과 어울려 걸으시던, 정보사령부 시절 외박을 나와 모처럼 기분 좋게 걸으시던, 취업 후 첫 자가용 핸들을 두 손으로 꼭 움켜잡으시고 출퇴근을 하시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처음 이 아들과 걸으시던 그 서울의 거리였다.
사십 년 전, 한밤 중 서울의 번화가 화려한 네온간판 아래 또래들과 개비담배를 물던 나보다 어린 나이의 아버지는, 대학시절 끝없던 학생운동 행렬을 비집고 홀로 자신의 수업실로 향하던 아버지는, 십 년, 이십 년 후의 어떤 삶을 상상했을까. 느긋한 주말 아침, 차가운 캔 커피를 손에 쥔 채 서울 시내 여름 하늘을 바라보던 앳된 얼굴의 아버지는 어떤 삶의 방향을 그렸을까. 여느게 다 그렇듯 과거의 것보다 조금 더 다채롭고, 조금 더 안정되고, 조금 더 의미 있는 것 아니었을까. 친구들 틈에 끼어 한껏 멋을 부리던 그의 미래에 대한 솔직한 바람은 흡사 오늘 날 나의 막연한 그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소박하게나마, 행복하고 싶다고.
앞서 걸으시던 노란색 폴로셔츠 걸친 아버지의 어깨는 스물둘이 되어 처음 본 또 다른 청춘의 넓은 어깨였다. 더욱더 애착이 가고, 그만큼 더 무거워 보이던 어깨였다. 나는 여태 사랑하던 사람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초등학교 시절 서편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시간, 한껏 신이 난 채 주머니에 삐뚤게 접어놓았던 이천 원을 건네주고 사온 검은 봉투 속 김말이를 당시 뱃속에 늦둥이 동생을 가지셨던 어머니와 나누어 먹을 적엔, 어머니는 또 자신이 중학교 시절 즐겨 드시던 한 분식점 김말이 얘기를 모처럼 유쾌하게 하곤 하셨다. 중학생의 커진 두 손으로 복숭아나 수박 같은 것을 싸 들고 들른 할머니 댁 거실에 앉아있으면 할머니께선 냉장고 속 기주 떡을 손자 먹으라 주시며 전쟁 후 삼 남매를 키우시던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셨다. 술기운에 흥에 겨워 떠나가라 고향 얘기를 하던 친구 놈도 있었다. 고등학교 복도 바닥에 털썩 앉아있던 내 옆에 말없이 앉으신 뒤 자신의 옛 이야기를 해주시던 선생님도 계셨다. 세월 아래 자신조차 잠시 잊고 있던, 내 주변 사람들의 예전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 번이나마 그 예전 그들의 거리를 이처럼 나란히 걸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와의 순간 또한 잊지 않고 싶었다.
끝내 도착한 아버지의 모교 앞에선 그리 오래 머물지 못 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나름의 애틋함을 발견한 부자에게는 아직 온 종로가 남아있었다. 결국 고칠 수 없다 고개를 젓던 시계 방 주인으로부터 멈춘 아버지의 손목시계를 다시 찾고, 어느덧 피어난 석양을 뒤로한 채 집으로 향하던 차 안에는 아직 어떠한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타인에 대한 이해란 무엇일까. 저녁상 건너 허심탄회하게 나누던 상대방의 철학, 또는 의견에 대한 끄덕임일 수도 있지만, 그가 어릴 적 잠자리를 잡고 놀던 놀이터의 색 바랜 미끄럼틀을 훑는 손이나, 그녀가 학창시절 좋아하던 소설 한 편을 읽는 눈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사랑한다면, 더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가 좋아하실 만한 곡으로 이 글을 끝마치고 싶은 필자의 작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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