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우리를 괴롭히며 이불을 발로 차게 만드는 기억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잊히고 결국 머릿속 저 안쪽으로 밀려 기억을 하려 해도 잘 떠오르지 않게 된다. 아무리 진하게 박혔던 첫인상도 꾸준한 만남과 재조명의 기회가 있다면 바뀌게 될 수 있으며, 타인이 뒤에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 지는 내가 어떠한 노력을 하든 타인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현상과 깨달음은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평이함을 잊지 않게 해주고, 서로 쉬이 공존할 수 있게 해준다. 과연 우리가 절대 기억을 잊지 않고 원할 때마다 과거의 기억을 돌려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거울을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점수를 봐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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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미러 (Black Mirror)> 라는 한 영국 드라마는 이런 신선한 질문에 대한 상상력 넘치는 답을 보여준다. 자체 제작 드라마들로 유명한 넷플릭스 (Netflix)가 가장 최근 시즌의 제작을 맡으며 더 큰 스케일과 소재의 다양성을 보여준 옴니버스 형식의 드라마 <블랙 미러>는 과학 기술의 발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다양한 분야의 기술적 발전이 사람에게, 그리고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냉소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람의 눈 대신 카메라 렌즈가 이식되는 발상부터 가상 현실을 보게 하는 칩을 인식시켜 개인에 맞춰진 공포 게임을 체험하게 하는 상상까지, 에피소드가 하나씩 펼쳐질 때마다 그 천재적인 발상에 놀라면서도, 머지않아 가까운 미래에 충분히 실현될 수 있어 보이는 기술들에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괜히 무서워지기도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칼럼의 시작에 던져진 질문은 각각 시즌 1의 3화에 해당하는 “당신의 모든 역사 (The Entire History of You)” 에피소드와 시즌 3의 1화에 해당하는 “추락 (Nosedive)” 에피소드의 내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혹시나 드라마를 보고 있거나 흥미가 생겨 보고 싶어질 수 있는 독자들을 위해 최대한 스포일러를 자제하며 그 내용을 다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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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당신의 모든 역사” 에피소드에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기억이 저장되는 기술로 인해 한 가정이 파국에 치닫는 내용을 다룬다. 시신경과 연결되는 카메라 렌즈를 안구에 이식하는 수술을 통해 눈으로 보는 모든 장면을 녹화해서 되돌려 볼 수 있는 기술로 영원한 기억을 안고 살게 되는 사람들은, 원할 때마다 연도별, 날짜별로 나뉘어서 저장된 기억 영상을 돌려볼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사진을 볼 때처럼 그 기억 영상들을 정지시켜서 줌인할 수도 있고,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경우 입 모양 인식 기능을 통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까지 인공적으로 복원 가능해진다.
이 기능의 활용성은, 에피소드의 시작 부분에서 직장 인터뷰를 보고 온 남자 주인공 리암 (Liam)이 인터뷰 기억을 돌려보며 면접자들의 표정을 살펴보고, 체크를 하는 듯한 작은 손동작 하나하나를 분석해가며 과연 자신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을 보여주며 차차 소개된다. 이렇듯 간단한 하나의 상황을 통해서도 충분히 이 기능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을 모두 떠올릴 수 있다. 필자가 처음에 느꼈듯, 언뜻 보기엔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기술이다. 매일 깜박깜박하는 사람이거나 시험을 칠 때라거나 하는 상황 등에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실용성 있는 기술일까. 하지만 이후로 펼쳐지는 상황들의 향연을 지켜보고 이 기술이 가져다주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분석해보면, 과연 드라마 <도깨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망각은 신의 선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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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미지는 안구에 이식된 렌즈로 촬영된 영상, 즉 기억들이 저장되는 시스템을 보여준다. 연도별, 날짜별, 심지어 시간별로 나뉘어서 언제든 돌려보기 편하게 구분되어 있다. 보통, 사람의 기억이란 어지간히 특별하거나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경험이 아닌 이상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든 것이 뚜렷하게 새겨지지 않는다. 저렇게 드라마를 보듯 가지런히 정리된 기억 속에서 내가 되풀이하고 싶은 기억을 골라서 시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참 인생이 분석적이고 재미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몇 년 전 저장된 기억을 통해 어떤 특정 상대에 대한 안 좋은 선입견이 박혀 버리면 그 상대는 언제까지나 내 선입견에 갇힌 모습으로만 인식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사람을 알아가는 설렘도 덜 할 것이고, 인간관계는 나와 비슷한, 혹은 나와 잘 맞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협소해질 것이다. 기억을 돌려보다 발견한 표정이 좋지 못한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눈치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의 기억에 저장돼 영원히 보관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행동의 즉흥성과 자유로움 역시 많이 사라질 것 같다.
또한, 기억 녹화 기능은 ‘촉’이라고도 표현되는 감각적인 의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때로는 모르고 넘어갔으면 하는 사실까지 모두 알아차리게 한다. 하지만 때로는 의심이 의심에서 그치는 것이 좋을 상황들도 충분히 생기고, 물증 없이 서서히 기억이 사라지다 보면 의심 역시 그치게 된다. 망친 인터뷰를 마치고 나와도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곧 돌아오게 되는 것은 그 부끄러움과 망신이 자연히 잊히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미세한 표정, 작은 몸짓 하나하나까지 알아챌 능력이 없는 지금도 우리는 잘살아가고 있다. 물론 영원히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해주고,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 발전을 뒷받침해주는 능력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잊히는 기억을 붙잡고 살기 위한 기술을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될 일 역시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에피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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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에피소드인 “추락”은 “당신의 모든 역사”보다 훨씬 현실적인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화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의 일상을 함께하고 있는 SNS ‘인스타그램’과 비슷한 포맷을 따르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모든 것에 평점을 매길 수 있다는 세계관을 소개하는 이번 화는, 새로운 의미의 계급 사회를 보여준다. 사람과 공간에 매겨지는 평점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시설, 제공 받을 수 있는 서비스, 어울릴 수 있는 사람까지, 모든 것에 대한 제한이 생기기 때문이다. 낮아진 평점으로 인해 회사에서 쫓겨나기까지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만큼, 모든 사람은 좋은 평점을 위해 서로에게 친절한 모습과 행복한 모습만을 보이고 가식이 판을 치게 되는 사회를 볼 수 있다.
5점 만점 중에 4.2대의 나쁘지 않은 평점을 유지 중이던 여자 주인공 레이시 (Lacie)는 이사할 집을 알아보던 중 마음에 쏙 드는 주거 환경의 아파트를 찾게 되는데, 4.5 이상의 평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파격 할인된 입주금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평점에 서서히 집착하기 시작한다. 어릴 적 친구였지만 연락이 끊긴 동안 4.7 상당의 평점을 가지게 된 나오미 (Naomi)의 결혼식에 대표 들러리로 초대받게 되며 더욱 불이 지펴진 4.5를 향한 꿈은 점점 레이시를 수렁으로 끌어내린다. 레이시가 평점을 높이기 위해 보이는 위화감 넘치는 행동들은 사실 요즘 시대의 우리가 SNS를 통해 보이는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사람들의 SNS 피드는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보다는 멋진 여행지에서 잘 차려입고 예쁜 포즈를 지은 모습으로 주로 채워지고,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 모습을 자랑하고, 행복한 일이 있을 때 많이 업데이트된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그런 SNS상의 보여주기 식 행복이 현실까지 점철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친절함과 행복이 아닌 평점을 위한 가식이 보이는 웃음과 칭찬, 어떤 일이 있어도 상대의 평가를 의식하며 보여주는 친절함은 등장인물들이 인간보다는 기계에 가까워 보이게 한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쁘게 화장을 하고 자신감 넘치게 웃는 얼굴 뒤에는 샤워 후 민낯으로 수줍게 웃는 얼굴도 존재한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멋지게 포착된 포즈 뒤에는 후줄근하게 걸쳐 입고 편안하게 뒹구는 주말의 모습 역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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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은 “당신의 모든 역사”보다 전체적인 내용을 예측할 수 있고 직설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훨씬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은 내용이라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진다. 이미 SNS에 보여주기 식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있고, 소셜 미디어 팔로워 수로 인기와 수입을 얻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으며, SNS 별로 대체로 자랑하는 일상의 유형이 정해질 정도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한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꾸며내고 강조하는 이미지로만 평가받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 평가를 통해 우리의 사회적 위치와 혜택이 제한되는 경험을 해야 한다면 필자는 답답해서 포기해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평점을 테러하고 다니는 테러범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모든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평점이 그대로 보인다는 것 역시 그 나름의 장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둘 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일까? 지금 필자가 저녁 시간에 환한 조명 아래에서 타자 버튼 몇 개를 눌러가며 이 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도 크고 작은 과학적 기술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그 발전도 어느 한계점에서부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보다 해가 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 한계점이 정확히 어디일지 몰라서 무섭고 그래서 오늘도 발전은 계속되고 있지만 말이다.
비록 우리의 모습에서 한계가 느껴질 수도 있고 그 약함에서 오는 불안함과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필자는 우리가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어서 우리는 매일 열심히 살아갈 수 있고, 타인에 대해 서로 모르기 때문에 알아갈 호기심과 의지가 생기는 것이고, 서로에게, 또는 자신에게 상처를 받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부분이 모여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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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미러>가 행복한 결말이라기보단 주로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일명 ‘고구마 먹은’ 엔딩을 선사하는 이유도 아마 시청자들이 과학적인 기술 발전을 막연히 응원만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마주하고 스스로 평가해볼 기회를 주려는 것 아닐까 싶다. 물론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게 마련이다. <블랙 미러>에서 보여주는 검은 면만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단정 지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우리는 계속되는 기술적 발전 속에서 우리의 인간다움을 잊지 않고, 그 기술에 휘둘려 살아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지 기술이 우리를 지배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자기기 하나의 발견과 그 안에 저장돼있던 문서로 인해 한 나라의 최고 권위자가 그 자격을 박탈당하는 일이 생길 만큼 현재 우리 사회에 미치는 과학 기술의 영향은 엄청나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모두 그 커다란 영향이 최대한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이용되도록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P.S.
칼럼을 통해 소개한 두 화 말고도 훨씬 무겁고 진지한 내용을 다루는 화도 많으니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 번쯤 보기를 추천한다. 칼럼 하나에 다루기엔 너무 주제의 폭이 넓고, 스포일러의 위험성 또한 있어서 몇 가지 추천 화를 소개하며 칼럼을 마쳐볼까 한다. 칼럼에서 소개된, 그리고 아래의 추천된 에피소드에서 보게 되는 미래의 과학 기술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시즌 2 에피소드 2 “하얀 곰 (White Bear)”
크리스마스 스페셜 “화이트 크리스마스 (White Christmas)”
시즌 3 에피소드 4 “샌주니페로 (San Junipero)”
출처:
[1] http://gannonknight.com/wp-content/uploads/2017/01/black-mirror-season-3-poster.png
[2] https://espngrantland.files.wordpress.com/2013/11/grant_channel4_blackmirror103_6403.jpg?w=750
[3] http://unrealitymag.com/wp-content/uploads/2013/03/blackmirror.jpg
[4] http://res.cloudinary.com/thefader/image/upload/Black-Mirror-Nosedive_unume6.jpg
[5] https://heatst.com/wp-content/uploads/2016/10/nosediv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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