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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인 지금, 세계에는 70억 명이 넘는 인구가 다양한 국가에서 가지각색의 문화를 만들어가며 공존하고 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각각의 가치관을 세우고 때로는 무너뜨리기도 하면서 독창적인 삶을 영위해 가고 있으며, 종종 그러한 가치관의 차이는 개인의 충돌, 집단 간의 싸움, 그리고 심하게는 한 국가를 이루는 민족 사이의 분쟁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국경을 불문하고 많은 이가 공감하고 추구하는 가치관 중 하나가 바로 ‘동물 보호'이다. 동물을 학대하지 말고, 함부로 이용하거나 버리지 말아야 하며, 인간과 동등한 소중한 생명체로 여겨야 한다는 당연한 관념. 누구에게나 옳고 필요한 것이며, 인간이라면 기본적인 소양으로 갖추기가 권장되는 도덕적인 사상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많은 동물 애호가들은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와 같은 슬로건을 내세우며 여러가지 동물보호 활동에 참여한다. 유기동물을 위한 캠페인을 주최하거나, 밍크 코트 등과 같이 동물성 가죽이 쓰인 의류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펼치기도 하고,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을 돕기 위한 일에 기여하기도 하는 등 동물을 위해 인간이 행해 나가고 있는 일들은 세계적으로 매우 다양하다. 필자 역시 동물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유기견 보호소에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는 등 많은 시간을 동물 보호 활동에 할애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마냥 이상적인 것처럼만 느껴지는 이 ‘동물 보호’라는 개념은 최근 들어 많은 국가들, 특히 한국에서 ‘이중적'이라는 부정적인 수식어와 함께 응원의 목소리보다는 비판에 가까운 시선을 받고 있다. ‘동물 애호가'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 묘한 모순이 담긴 말과 행동들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작년 8월, 배우 최여진의 모친 정현숙 씨가 보신탕을 먹는다는 이유로 양궁 국가대표 기보배에게 인스타그램을 통해 온갖 욕설과 패륜적인 모욕을 퍼부어 논란이 되었던 사건이 있다. 당시 정 씨의 행동이 더욱 더 거센 비판을 받았던 이유는 동물을 사랑해 본인 소유의 애견 호텔까지 운영하고 있다는 그녀가 드러냈던 이중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개고기를 먹는 것이 미개하다며 당장 대회를 앞둔 죄 없는 국가대표에게 입에도 담기 꺼려지는 인신 공격을 퍼부은 장본인은 막상 당당하게 본인의 반려견에게 약 20kg이나 되는 양의 소고기와 오리고기를 먹이는 모습을 선보인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딸인 최여진은 모델로서 모피 컬렉션에 참가하거나 앙고라 니트를 입은 채로 시사회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본인이 운영하는 쇼핑몰에서 이미 라쿤과 오리털로 제조된 의류 제품을 판매하고 있기까지 하였다. 누가봐도 어처구니가 없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수많은 네티즌들의 비난 쇄도가 이어지고 당사자인 정 씨가 아닌 딸 최여진이 자필 사과문을 올리며 해당 사건은 여차저차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개고기 식용을 반대한다며 막상 소, 돼지 사육에는 아무 말 않던 많은 동물 애호가들의 이중성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개는 더 귀여우니까, 그동안 반려동물로 키워져 왔으니까, 사람을 따르고 믿으니까, 소나 돼지보다는 ‘조금 더’ 소중한 생명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의견만 내세우는 꼴일 뿐이었다.
또한, 프랑스의 모델 브리짓 바르도(Brigitte Bardot)는 지난 2001년 한국인을 ‘야만인’이라고 표현하며 개고기를 먹는 행위에 대한 문제점을 강력하게 지적했던 최초의 서양인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녀의 발언으로 인해 대한민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유럽인들에게 한국은 무자비하게 개를 도축하여 먹는 미개한 민족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과거 아랍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인종 비방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는, 동물 애호가라기 보다는 인종 차별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바르도의 발언이 이슈가 되면서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는 한국에 대한 오해와 비난의 소지를 없애겠다는 의도로 그녀와의 전화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손석희 아나운서에게 “소는 먹기 위한 동물이지만 개는 인간의 동반자요, 인간의 그림자”라고 말하며 개고기 식용을 금지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한국 뿐만이 아니라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 그리고 스위스에까지 개를 먹는 문화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들 역시 개고기를 “먹어보니 맛있었다"고 표현하며 보신탕 문화로 한국인을 비하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 등을 들은 뒤 바쁘다는 말과 함께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러한 그녀의 이중성에 대해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석학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어떤 동물을 잡아 먹느냐는 문화인류학적 문제"라며 그녀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둔함의 극치"라 비난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인인 그녀는 이웃 나라인 영국이 개구리 고기를 먹는 프랑스인을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까?
이 외에도 종종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을 둘러 보면 스스로를 동물 애호가라 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모순을 내보이며 살아 가는지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트위터에서 “도살 장면이 연상 되어 인공 가죽마저 사지 않는다”며 동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던 한 네티즌이 과거 업진살 (소의 양지 부분에 해당하는 고기) 사진을 올리며 “업진살~ 살살 녹는다”는 트윗을 올렸던 것이 화제가 되어 유행어로까지 번졌던 일이나, 상어를 수족관에 키우는 것이 학대라며 특정 이색 카페를 ‘멍청하다’고 비하한 사람이 약 5만원 상당의 연어회를 인증한 사진을 게재함으로 인해 비난 받았던 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시들이다. (참고로, 학계에서는 오히려 인공 가죽을 사용하는 편이 동물보호에 힘이 된다고 말한다.) 최근의 하프 물범 보호를 위한 서명 운동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몇년 전부터 많은 동물 애호가들이 멸종 위기에 처해있는 하프 물범을 가죽을 위해 살상하는 것을 금지하라 주장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멸종 위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LC등급의 동물, 즉 쥐나 모기, 그리고 사람과 동급인 개체임이 드러나면서 거센 논란이 일기도 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천적인 북극곰이 멸종위기에 처함과 동시에 하프 물범의 개체수는 되려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실제로 북반구에 사는 물개 종류 중 개체수가 가장 많다) 다른 동물의 개체수를 줄여버리는 생태계교란종으로 분류 되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인 사냥이 권장되고 있는 종이다. 이에 대한 실상을 전혀 모르는 동물 애호가들은 사실을 왜곡하고, 새끼 때의 귀여운 사진만 선별적으로 공유하여 감성에 호소하고, 하프 물범을 보호해야 한다고 캐나다 정부에 끊임 없는 항의 메일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귀엽게 생겼기 때문'일 터이다. 반면에 실제로 멸종 위기에 처한 수많은 동물들은 외면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어 원숭이과 동물인 아이아이 원숭이는 심각한 수준의 개체수 감소에도 불구하고 흉악한 외모 탓에 악마의 현신이라는 누명까지 얻으며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이유 없는 죽임과 학대를 당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그동안 동물 애호가라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동물을 위해 무언가를 행하는 모습보다는 오히려 반감만 키우는, 감정만 앞서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를 더욱 자주 접해 왔다. 무엇보다도 필자가 유난히 그들에게 적대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필자 스스로가 그들과 마찬가지인 이중적인 ‘동물 애호가’여왔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필자는 동물을 매우 좋아한다. 길거리를 걷다가도 강아지나 고양이만 보면 한눈이 팔려 발목을 삐끗하기 일쑤이고, 혹여나 부모님께서 한국에 있는 반려견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보내주시기라도 하면 제자리에 멈춰서 몇 번이고 돌려 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갈 길을 가는 것이 일상이며, 유학까지 와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도 ‘미래에 동물을 돕기 위해서'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묻는 질문에 여태껏 생각 없이 해왔던 대답은 다름 아닌 '고기'였다. 유기견 보호소에 간다는 필자의 말에 “너, 그럼 소랑 돼지는 왜 먹어?”라고 묻는 몇몇 사람들에게 그것과는 별개라 화를 내면서도 논리적인 반박 한 마디 하지 못했다. 되려 조금 더 공부하기에는 너무 바쁘다고 미루기만 하기가 일쑤였다.
뿐만이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물 애호가들과 함께 일하거나 캠페인에 참여하러 가는 등 직접 사회에 나와 현실과 부딪히면서도 필자가 느끼기 시작했던 것들은 동물을 도왔다는 뿌듯함 보다는 대부분 나와 주변 사람들이 가진 모순에 대한 창피한 자각 뿐이었다. 동물보호시민단체라는 곳에서 점심 때 제육볶음을 먹고 오후에 개 도축 불법화를 위한 시위를 하는 모습은 어린 마음 뿐이었던 필자에게 상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반려동물을 그렇게 아끼는 듯하면서 막상 강아지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어떠한 점을 유의하여야 하는지 조차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사실 또한 굉장히 속상한 일이었다. 하물며, 현재 한국의 동물 단체들이 ‘학대'라고 주장하며 반려인들에게 가르치려 하는 것들 조차도, 실제로 많은 외국의 동물 학자들이 연구 하에 내 놓은 학문적인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명확한 근거가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해, 결국 동물을 보호한다는 것은 얼핏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당히 오랜시간 동안의 고민과 반성이 필요한 개념이다. 즉, 누구라도 쉽게 스스로를 ‘동물 애호가'라고 칭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하며, 스스로 정말로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인건지, 아니면 단순히 귀엽고 예쁘게 생긴 동물에 대한 동정심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을 뿐인건지 구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필자는 후자인 사람이 전자인 듯 행동을 하는 것이 모든 동물 애호가들이 ‘이중적'으로 비춰지는 원인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진심으로 인간으로서 동물을 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왜곡된 시선을 받게끔 한다고 느낀다. 당당하게 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머릿 속에 자꾸 떠올라 본인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 질문들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말로 동물을 돕고 싶은가? 본인이야말로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본인의 입맛대로, 마음이 끌리는 방향대로만 행동한 후 뒤따라오는 의문들을 무시해버림으로써 남들이 눈쌀을 찌푸리도록 만드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모든 동물 애호가들은 본인의 가치관에 대해 남이 동의 해주기를 바라고 강요하는 행위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관은 도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이상 다른 그 누구도 비판하거나 깎아내릴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남들에게도 강요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동물 보호라는 개념이 단순히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대감이 담긴 반박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이유이다. 나에게 소중한 것이 남에게도 소중하기를 당연하게 원해서는 안된다. 지키고 싶은게 있다면 남에게 함께 지키러 가자고 요구하기 보다는 그럴 시간에 나부터 어떻게 하면 그것을 더 잘 지킬 것인지, 스스로 먼저 고민하는 것이 알맞다. 개고기 먹는 것을 혐오할 수 있지만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동물 보호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채식을 할 필요는 없지만, 육식을 지양하려는 노력 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동물 보호에 관심이 없는 자에게 인간미가 없다는 둥 부정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자세야 말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앞서 말했지만 누군가의 안일함, 그리고 이중성으로 인해 진심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왜곡되는 일이 생기는 것은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 유명 한식당 대표가 목줄을 차지 않은 프렌치 불독에게 물려 패혈증으로 사망했던 사건 역시, 한 무지한 주인의 ‘관리 부실'로 인해 본능에 충실했을 뿐인 작은 강아지만 안락사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한국의 반려문화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이 미쳤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동물 보호와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데에 있어서도 남을 존중하고, 문화적∙환경적 차이를 인정하고자 하는 노력은 늘 누구에게나 중요한 과제이다.
필자는 동물과 인간이 물심양면으로 서로 돕고 살며 함께 동반하는 관계라고 믿는 입장이다. 동물을 단순히 짐승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그들을 인간의 곁에 심적으로든, 물적으로든 없어서는 결코 안 될 다양한 형태의 수호신과 같은 존재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사람마다 느끼는 온도는 다를 수 밖에 없겠지만 한가지 그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오직 인간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당히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때로는 사람보다 더 사람의 마음을 잘 읽을 때도 있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렇기에, 동물을 돕기 위해서 인간들은 더더욱 신중한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필자 역시, 나는 동물이 좋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마다 마음 속에 아직까지 가득 차 있는 모순을 부정하지 못해 종종 망설이곤 한다. 이처럼 지금보다 훨씬 많은 동물 애호가들이, 진정으로 동물들을 위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자주 생각하고, 반성하고, 배우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한층 성숙한 마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펼쳐 나갈 때 비로소 본인이 사랑하는 동물들이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환경에서 존중 받으며 살게 될 수 있음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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