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사회복무요원이다. 발목이 좋지 않아서 신체검사에서 4급 판정을 받고 지하철역에서 복무 중이다.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지만 뛰거나 장시간 걷거나 서있는 등 발목에 무리가 가는 행위는 할 수 없다.
필자가 근무하는 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그래서 유모차를 끌고 왔지만 이를 들어 옮길 힘이 없는 지하철 이용자가 있을 시 필자를 비롯한 사회복무요원이 들어서 계단으로 옮긴다.
언급했듯 발목이 좋지 않은 필자는 이런 업무의 반복 중 무릎 상태 역시 나빠져 병원에서 진통제와 소염제를 처방 받았다. 같이 복무하는 사회복무요원 중에는 정기적으로 무릎에 물리치료를 받게 된 사람도 있다. 몸이 안 좋은 사람들이 몸이 더 안 좋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같이 일하는 공무원에게 꺼내면 "그럼 누워서 일할 거냐?"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럼 어떻게 이 사람을 활용할까.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가 질문이 아니라 “어쨌든 왜 일을 안 하고 있나”가 질문인 것이다.
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지 못해도 해야 하는 일이 나의 업무인 것일까. 이런 괴리는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사회복무요원 제도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현재 사회복무요원, 과거 공익근무요원 제도는 1996년, 전신인 방위병 제도를 계승한 두 제도 중 하나이다(나머지 하나는 상근 예비역 제도). 복무 부문은, 제도 발표 시의 기사를 인용하자면 “공익근무요원의 활용분야는 예산은 확보돼 있으나 인력확보가 어려운 ▲삼림감시 및 보호 ▲우편수집.분류 ▲소방보조원 ▲하.폐수종말처리 ▲국립공원관리 ▲장애복지시설 보조 등 10여개 3D분야”이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현재 사회복무요원은 신체검사에서 4급, 즉 현역 부적격 판정이 나온 입영 대상자들의 복무 형태이기 때문이다. 현역으로 복무하기 부적격한 신체 혹은 정신을 가진 개인을 3D (Dirty, Difficult, Dangerous) 분야에서 일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합당한지를 떠나 효율적이라고 보기에 어렵다.
이는 그 당시 복무의 형태가 신체검사의 등급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다. 방위병 제도는 보충역 판정인 4급뿐만 아니라 현역 징집 대상자지만 군 수요에 따라 입영을 못한 잉여 자원, 즉 2, 3급인 개인들을 위한 제도이기도 했다. 국가가 병역 자원의 공급과 그 수요를 정확히 예측하는 데에 실패했고, 그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복무의 형태를 신설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공익근무요원 제도의 도입에 관해 그 당시 병무청장 김광석은 이렇게 설명했다. “현역소요를 충원하고 남는 자원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경비요원 등 공익근무요원, 연구기관의 연구요원, 산업체의 기능요원 등 전원 국가봉사역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즉 공익근무요원 제도 등의 제도는 전신인 방위병과 마찬가지로 “현역 소요를 충원하고 남는 자원”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방위병 제도의 폐지를 논한 기사에서 얘기했듯, 새로운 제도는 “방위병 복무선호로 인한 병무부조리 발생 등 숱한 문제”를 피해야 했다. 같은 현역이지만 방위병은 일반병과 달리 자택에서 근무지로 출퇴근을 했고, 그 근무지가 군부대인 경우도 있었지만 아예 동사무소나 구청 등의 공립 기관인 경우도 허다했다. 이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했고, 결국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공익근무요원의 근무지가 3D분야인 것은 이런 선호도를 줄이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공익근무요원제도는 탄생부터 어떤 필요나 사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숙한 군 징집 제도의 형평성을 유지시키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떨까. 현재는 현역 입영 대상자 중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는 사람은 없다. 사회복무요원은 완전히 신체검사에서 4급 혹은 그 이하 판정을 받은 사람을 위한 제도가 된 것이다. 더 이상 현역 입영 대상자의 형평성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없어진 상태에서 사회복무요원 제도의 존재의의는 무엇이 남았을까.
공공부문에 인력이 부족한가? 필자가 근무하는 지하철 역, 즉 서울교통공사를 예시로 들어보자. 최근 회사의 채용비리 문제가 불거져 국정 감사에 김태호 사장이 출석했다. 최소 54대1인 공채경쟁률을 무시하고 임직원과 노조원들의 친인척을 비정규직으로 입사시키고 정규직 전환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 됐기 때문이다. 의혹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입사하고 싶어하는 회사에 인력이 부족하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 청와대가 제시한 실업률의 해결책 역시 “공공부문 일자리 81만개 창출”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훈련 받지도 못한, 그리고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정하여 근무를 수행하는 사회복무요원의 자리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또 최근 도봉구의 한 특수학교에서 사회복무요원이 장애 학생을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학교 측 역시 묵인하거나 심지어 교사들까지 폭행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많은 충격을 주고 있다. 물론 폭력은 개인의 잘못이다. 하지만 자격증을 습득하고 근무의 대가로 급여를 받으면서 근무하는 특수학교의 교사들 조차 그런 행태를 보였다면, 월급도 최저임금에 턱없이 못 미치고 제대로 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인력인 사회복무요원을 그런 근무지에 배치하고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만용에 가깝지 않을까. 최초의 특수학교 학생 폭력 사건 보도 이후 비슷한 내용의 후속 보도가 끝없이 이어짐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복무요원의 복지 부문 배치는 명백한 국가의 실책에 가깝다. 하지 못하는 일을 사람에게 강제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 보여주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
결국 사회복무요원은 필요하다고 보기에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런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아주 넓게 봐도 “현역 입영 대상자의 박탈감 해소”외에는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떨까. 2020년 중반이 넘어가면 인구절벽으로 인해 현역 징집률이 100프로에 가까워질 것이란 통계가 있다. 그 근거는 현재 61만명인 군 규모를 50만명으로 줄인다고 해도, 남성인구가 2024년이 넘어가면 24만명으로 줄기 때문에 거의 전부 징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때에는 사회복무요원제도의 유지가 불가능할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도의 문제점 역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때에야말로 문제가 더 커질 것이다. 정말로 남성인구의 100프로 가까이 징집하게 된다면 군복무에 부적격한 자원을 사회에서가 아니라 군 영내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 국제노동기구 ILO(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는 사회복무요원 제도를 강제 노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병무청이 사회복무요원 제도를 “병역대체복무제도”라고 애써 포장해도 비전투 분야의 병역 복무라는 점, 그리고 거부할 경우 징역형이라는 점 등을 감안한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강제노동협약(29호)과 강제노동철폐협약(105호)을 모두 비준하지 못하고 있고, 그에 따라 우리나라의 '노동자 권리 (worker’s rights)’ 순위는 필리핀(92위), 인도네시아(101위)보다도 낮은 108위다. 해외에서의 국가 평판에 누구보다도 민감한 우리나라 정부가 이런 수모를 감수하면서 까지 사회복무요원 제도를 유지할 이유가 무엇인가.
필자는 필자의 신변만 보장된다면, 필자를 비롯한 4급 보충역들의 건강상태에 따른 요구를 제대로 수용할 수 있다면 영내에서도 복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병역제도 아닌가. 국가에 군대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어쨌든 이 국가의 국민으로 태어난 이상 그런 나라를 지키는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은 납득 가능한 일이다.
허나 지금 필자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누구에게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누구를 지키고 있는가. 고작해야 공무원들의 일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줌에 지나지 않는 하루하루는 자괴감이 들기에 그지없다.
결국 사회복무요원 제도는 태생적으로 누구를 위(爲)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러기에 변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없애고 다시 써야 한다. 사람을 이롭게 하고 도울 수 있도록.
의무는 필요에 의해 생성된다. 필요하다면 나의 몫을 다하는 것은 납득이 가능하다. 그러니 국가도 몫을 다 했으면 좋겠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필요에 맞게, 제도적 개선을 통해 인력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몫 말이다. 그것이 우리 청년들의 2년이란 시간의 희생에 대한 답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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