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blog.skenergy.com
한국인들에게 나이는 숫자 그 이상의 많은 의미를 지닌다. 나이는 단순히 살아온 햇수를 뛰어넘어 한 개인의 특정한 사회적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지표가 되곤 한다. 그래서인지 한인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나이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몇 년생인지부터 먼저 물어보고 호칭정리를 주로 먼저 하게 마련이고, 이에 따라 상대방을 '형, 동생, 누나, 언니, 오빠' 등 나이에 관련된 수많은 호칭 중 어떤 호칭으로 부르게 될 지 결정된다. 개개인의 이름보다는 이러한 호칭들로 서로를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이를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의가 없다" 또는 "위, 아래를 모른다"라는 비난이 따르게 된다.
사실 나이로 인해 겪게 되는 가장 뜨거운 이슈들 중 하나는 바로 '빠른 생일자'들에 관한 문제이다. 생일이 2월 이전인 사람들은 전 해에 태어난 사람들과 함께 학교를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고, 주로 친하게 지내는 무리의 나이대나, 대학 학번까지 꼬이면서, 점점 빠른 년생들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논란이 생겨왔다. 사회적 나이는 같지만 실제 나이는 다른 빠른 생일자들이 친구인지 친구가 아닌지에 관한 논쟁이 계속 되고 있고, 이러한 마찰로 인해 결국 빠른 취학은 법적으로 없어진 상황이다. 버클리오피니언 페이지에는 실제로 이미 <빠른 생일, 그 애매함에 갇혀버린 사람들>이라는 글이 게시되어 있다. 필자가 제시한 내용과 굉장히 비슷한 내용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으며, 숫자에만 연연하기보다 좀 더 유연하게 행동하자는 결론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단순히 빠른 생일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서, 한국인들에게 나이가 도대체 어떤 개인적, 사회적 의미를 가지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점과 그에 대해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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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한국 사회에서 갖는 중요성에 대해 고민하던 중 굉장히 놀랐던 사실은 실제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성인으로써 첫 발을 내딛는 곳인 대학에서는 나이보다 학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전공이 정해져 있고, 졸업할 때까지 같은 과 사람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는 한국 대학의 특성으로 인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한 때 대학 선후배 사이에 SNS상 지침 문제가 페이스북에서 큰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윗 참고 자료에서 보여지듯이, 선배가 시키는 모든 일에는 군소리 없이 따라야 하며, 심지어 카카오톡, 페이스북상에서 후배가 선배에게 지켜야 할 일종의 규범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어 비난의 여론이 거셌다. 일 년 학교에 일찍 들어온 '선배'라면 한 학기라도 일찍 입학했다는 이유로 후배들에게 범접할 수 없는 '하늘'과 같은 권위를 가지게 되며, 이를 악용하여 온갖 말도 안되는 일들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 내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후배들은 단순히 복종할 수 없었으며, 폐쇄적인 한국 대학의 과 문화로 인해 외부로 유출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비록 이 문제 뿐만이 아니더라도 과도한 음주 강요 및 신고식, MT에서 이루어지는 군대식 유격 훈련 등 선후배 군기 관련 문제는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이를 토대로 모든 한국 대학생들의 선후배 관계를 일반화할 수 는 없겠지만, 대학 내 군기 논란은 단순히 일시적인 문제가 아닌 선후배 관계를 '군기'로 정의하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문제임에 틀림없다.
위에서 언급한 빠른 생일, 대학교 선후배간 군기 논란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두 문제에서 모두 나이와 학번이 군대와 같이 수직적인 관계를 확립하기 위한 기준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단순히 숫자로써의 나이는 실제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지만, 우리가 나이를 서로 가장 먼저 물어보고 궁금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상대방과 나의 형/동생 관계 확립에 있어 가장 적합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존댓말이 당연시되고, 장유유서를 강조하는 한국적 문화는 개인과 개인을 동등한 선상에 놓기 보다는 위, 아래를 정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아래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 내 인기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도 두 인물의 "지긋지긋한 형/동생" 논란을 소재화하여 성황리에 방송하였고, 이에 대해 누가 형, 동생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시청자들의 "솔로몬을 뛰어넘는" 의견을 묻고 있다. 이처럼 가볍기도 무겁기도 한 여러 가지 나이에 관련된 다양한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대중들은 오래된 이 문제에 끊임없이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필자는 이와 같은 이슈들이 수직적인 한국인들의 인간관계라는 본질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현상임을 주장하며, 나이에서 비롯되는 상하관계를 비판하고자 한다.
MBC 프로그램 <무한도전>
나이 차이에서 오는 수직적 관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연장자와 아랫사람 (여러 방면으로 연장자의 반의어에 대해 찾아보았으나 적당한 단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 이렇게 표기하기로 하였다)에게 둘 사이의 관계에서 사회적으로 기대하는 역할을 한정 짓는다는 것이다. 연장자는 아랫사람을 보살피고 따뜻하게 챙겨주어야 하고, 아랫사람에게 단점을 보인다거나 부탁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행위가 되며, 연장자로서의 권위를 지켜야 한다. 반면에 아랫사람은 연장자를 깍듯이 존경하고 그의 말을 잘 따르며 예의범절을 지켜야 한다. 이러한 관계가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형/동생, 선/후배 관계를 기본적으로 둘러싼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런 정서에 길들여져 있고, 그 안에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할애한다. 결론적으로 한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은 주변인들의 나이에 따라 누군가의 연장자, 아랫사람, 또는 친구 이렇게 세 방향으로 갈라지기 마련이며, 상대방의 나이에 따라 행동방식조차 달라지게 된다.
이 셋 모두를 원활하게 유지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원만한 사람의 필수조건이 됨으로, 우리는 연장자, 아랫사람, 친구를 대하는 서로 다른 방법들을 자연스럽게나마 모두 익혀나가야 한다. 그러다보니 관계에서의 역할 분담은 두 개인이 진정으로 스스럼없는 관계를 형성하는 데 쓰게 되는 쓸데없는 시간과 에너지 낭비를 초래한다. 단순히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오는 어색함에 내가 나이가 많거나 혹은 적어서 의식하게 되는 심리적 부담까지 더해지면서 진정한 소통은 더욱 어려워진다. 단순히 두 개인이 밥을 먹을 때에도 나이 많은 사람이 동생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는 연장자에게는 "내가 사주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을, 동생에게는 "연장자의 말을 잘 따라야한다"는 일종의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이러한 심리적 소모는 우리 생활의 여러 상황에서 빈번히 발생하며, 연장자와 아랫사람 모두의 서로에 대해 더 잘 알아가는 과정을 방해한다. 이 나이 차이에서 오는 부담이 개개인마다 다르기에 어떤 사람들은 연장자를 대하는 것이 더 편하게 되고, 또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서로가 갖는 부담에 어느 정도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지거나 시간이 지나 부담이 적어졌을 때야 비로소 조금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며, 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머무르게 되는 인간관계 또한 많이 존재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나이가 동갑인 사람과 동질감을 느끼고 금방 친해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나이 차이가 있는 타인에게 느끼는 이질감이 분명히 존재함을 보여준다.
출처: ced.berkeley.edu
한편으로, 필자 역시 UC Berkeley에 다니고 있는 학생으로서 미국 대학에서 나이가 갖는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사실 미국 대학에서 나이는 거의 아무 쓸모없는 정말 숫자에 불과한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학할 때부터 전공이 정해져 있는 경우도 드물 뿐더러, 워낙에 큰 학교의 규모 덕에 한국적인 '과'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입학하는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그저 같은 학생에 불과하다. 미국 대학생들의 인간 관계는 대부분 수업이나 속하게 되는 동아리에서 형성되는데, 여기에서도 전혀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한국과 달리 입학한 연도 (ex. 11, 12 학번) 보다는 졸업하는 연도 (ex. Class of 2016: 2016년 졸업예정) 가 있긴 하지만 이 또한 거의 묻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며, 학년 차이로 인한 선후배 관계 자체도 없다. 필자 역시 동아리나 여러 취미 활동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만, 실제로 나이를 정확히 알고 있는 친구의 수는 극히 드물고, 서로 나이를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UC Berkeley 내 한인 사회는 한국 대학과 미국 대학 문화 사이의 경계선 상에 놓여있다고도 볼 수 있다. 선후배 관계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그나마 나이를 통한 관계형성이 많이 이루어지는 편이다. 확실히 한국 사회에 비해서는 나이가 가지는 권위적인 힘이 약한 편이며,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나마 한국어에서 오는 언어적 호칭의 문제 때문에 빠른 생일자에 관한 문제는 꾸준히 논란의 여지가 되어 왔으며, 실제로 버클리오피니언의 <빠른 생일, 그 애매함에 갇혀버린 사람들> 글에는 오랜 기간 동안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앞서 언급했던 나이 차이로 인해 생기는 인간 관계의 분류를 고려했을 때, 빠른 생일자들이 오히려 가장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친구'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의 폭이 가장 넓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가장 자주 듣는 말은 "족보가 꼬인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둘 모두 친구인데, 그 둘은 형/동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족보라는 말 자체가 나이 차이를 상하 관계로 가정하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는 단어이기에, 빠른 생일자를 불편해할 이유도, 또 빠른 년생 본인도 불편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친구인 관계는 그대로 두고, 형/동생 관계도 그대로 두자. 왜 굳이 중간에 끼어있다는 이유로 따가운 시선을 받고 불편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그저 단순한 호칭의 문제일 뿐이다.
출처 : http://casadoagricultor.pt/blog/
정리하자면, 나이가 어느 정도 삶의 지혜와 경험을 반영해준다는 점은 필자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극단적이지만 20대 청년과 60대 노인이 가진 나이로부터 비롯된 생각의 깊이나 경험의 절대적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며, 노인이 청년에게 존중받아야할 이유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따뜻하게 대하자는 가르침과 예의 범절을 강조하는 한국적 문화 역시 아름다움과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우리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나이를 통해 수직적 관계를 맺는 것이 두 개인의 진정한 소통에 있어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연장자와 아랫사람 사이의 예절에 대한 과도한 해석은 자칫 서로에 대한 존중을 넘어선 상하 관계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건전한 소통과 의사교환을 방해할 수 있다. 내가 나이가 더 많아서 혹은 적어서 누군가와 진정으로 친해지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던 상황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만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족보를 정한다거나, 서열 정리를 한다거나 나이를 상하 관계의 기준으로 삼는 생각들은 자신에게 스스로의 인간관계를 제한하는 굴레를 씌우는 격이다. 나이 차이로 인한 사회적 기대나 역할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예의를 지키면서도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한국적 인간관계의 패러다임을 우리가 모두 함께 만들어 나가기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모두 자신에게 되물어보자. "내 나이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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