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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국제 :: Worldpost

사라예보의 총성: (2) Germany's blunder

19세기 말, 유럽은 이미 세기를 뒤흔들 전쟁의 서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독일제국이라는 위협적인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수백년 동안 유럽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엎치락 뒤치락 해왔던 합스부르크 왕가, 러시아, 프랑스 같은 국가 사이에서 독일제국은 1870년에 처음 세워진 신생국가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휘몰아친 엄청난 개혁과 혁명의 바람이 유럽에 굳게 자리잡고 있었던 군주정체을 뿌리째 흔들어 버렸고, 그것이 곧 프로이센 (훗날의 독일제국) 으로 하여금 엄청난 산업적인 발전을 이룰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셈인것이다.

독일제국은 분명 다정한 이웃은 아니었다. 1864년에 덴마크와의 전쟁을 시작으로, 당시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와 1866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게르만족속의 통치자가 더 이상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1870년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의 설립을 선포 함으로써 씻지 못할 치욕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확실히, 프랑스는 이 시점부터 독일에 대한 무한한 적개심을 품게되지만, 그것만으로 독일제국이 공공의 적이 되기엔 확실히 무리가 있어 보인다. 독일제국이 공격적인 국가로 비춰지게 되기까지엔, 몇가지 정치전략적인 오류들이 있었다. 그 몇가지들을 한번 짚어보려 한다.


1897년 크루거 전보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my map of Africa lies in Europe. Here is Russia and here is France with Germany in the middle; that is my map of Africa.”

"내게 있어 아프리카의 지도는 곧 유럽이다. 여기에 러시아, 저기에는 프랑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독일이 있다. 이게 내게 있어선 곧 아프리카의 지도나 마찬가지다."

- 비스마르크
http://www.historyhome.co.uk/europe/bismarck.htm


이 인용구에서 드러나듯, 비스마르크는 당시 유럽에 팽배했던 식민지주의에 동참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프랑스를 고립시키는것에 총력을 다했고, 그 목표가 달성된 후엔, 복잡한 외교정치를 통해 국가의 안정을 이어나가려했다. 그러나 1890년, 비스마르크의 해임 이후, 독일은 식민지정책을 추구해야된다고 생각하였다. 19세기 후반, 식민지주의의 선구자로 볼수있는 영국은 아프리카에 있는 트랜스바알 정부와 전쟁중에 있었다. 그러나 흐름은 영국에게 불리하게 흘러갔고, 결국 트랜스바알 정부가 영국군에게 승리할수있었다. 독일이 첫번째로 행한 오류가 여기서 등장하는데, 당시 독일제국의 카이저였던 빌헬름2세는 트랜스바알 정부에게 영국군을 무찌른것에 대한 축하와 독려의 메시지가 담긴 전보를 보냈다. 이를 크루거 전보 라고 하는데, 이 전보는 나중에 공개됨으로써, 영국으로 하여금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1905 해군총사령관 틸피츠의 위험이론

해군 총사령관으로 있던 틸피츠는 다소 어처구니 없는 이론을 내놓는다. 당시 해군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영국에게 도전장을 내민것이다. 틸피츠는 독일이 1918년까지 60척의 전투군함을 추가로 건설할것이라는 계획을 내세웠고, 이것을 들은 영국은 도저히 독일의 생산속도에 쫓아가지 못할것같다는 위협감에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싶어할것이니 독일에게 머리를 굽히고 들어올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영국의 생산능력과, 해군력에 대한 무한한 의존성과 자부심을 간과하는 생각이었고, 결론은 틸피츠의 예측을 무참히 빗나갔다. 독일의 계속되던 도발에 위협을 느끼던 영국은, 러-일전쟁의 패배로 극심한 내란에 시달리고 있던 러시아와 1907년에 동맹을 체결하게 된다.


http://ko.wikipedia.org/wiki/%EC%82%BC%EA%B5%AD_%ED%98%91%EC%83%81

1905년, 1차 모로코 사태

1904년, 영불화친협약으로 프랑스는 영국으로부터 모로코를 식민지국으로 얻게된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는 모로코를 친히 방문하게 되는데, 이런 독일의 급작스러운 반응에 당황한 프랑스와 다른 유럽국가들은 1905년, 알제시라스 회의를 가진다. 이 회의에서 독일은 모로코의 주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대신 프랑스가 모로코의 경찰권과 은행권을 조절할 수 있는 권리를 챙겨갔다. 명목적으로 주권은 보장받되, 실질적인 권력을 프랑스가 고스란히 가져간것이다. 이런 반쪽짜리 승리에 분통한 독일은 또 하나의 암울한 광경을 목격하게된다. 바로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영국이 어느새 마음을 모아 뜻을 같이 하는 우호적인 관계가 된것이다. 알제시라스 회의에서 그다지 얻은 것이 없는 독일측은, 침통한 마음을 간직한 채 쓸쓸히 모국으로 돌아와야했다.


1911년 2차 모로코 사태

독일의 지속적인 돌발적이고 위협적인 제스쳐는 주위에 있는 유럽국가들로 하여금 더욱 움츠리고, 경계하게 만들었다. 영-불-러 유대관계는 갈수록 더욱 끈끈해져 갔고,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민족갈등문제로 곤혹을 겪고있었고, 이탈리아는 이미 동맹국으로써 큰 효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긴장감이 흐르는 이런 사태에 독일이 다시 한번 돌발적인 행동을 취한 것이있다. 1911년, 프랑스가 모로코의 내분에 강경적인 대응을 보이자, 독일은 Panther 라는 전함을 모로코의 수도 페즈로 보내어 다시 한번 프랑스와 주위국가를 긴장하게 하였다. 이런 계속되는 독일의 위협적인 행동들이, 주변국으로 하여금 더욱 똘똘 뭉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것이다. 급기야 이 세 국가는 정식으로 삼국 협상으로 발전되어, 독일을 중심으로 한 삼국 동맹과 양극대립체제를 이루게 되어, 세계 1차대전의 발단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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