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에 배어있는 짙은 향수만큼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다. 특별히 다를 것 없는 단조로운 하루 속에 난데없이 코로 훅 들어오는, 익숙한 “그 날의 향”. 엄마와 토요일 장날 순대를 사러 102동 앞으로 내려가던 내리막길에서 맡았던 냄새, 매미가 찌르르 울던 여름날 친구와 폴라포 하나씩 입에 물고 집에 가던 하굣길에서 맡았던 냄새. 유난히 소소하고 유난히 사소해 알록달록한 기억의 프랙털 저편에 숨어있던, 소소하고 사소하게 행복했던 순간들. 그날의 태양 역시 오늘의 태양과 분명 같은 놈이었을텐데. 햇빛의 땅 캘리포니아, 눈이 시리게 밝은 이곳의 태양은 날 슬프게 하는구나.
한창 초점 잃은 눈으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버스가 도착해 나를 태우고, 나는 버스의 정해진 경로를 따라 이동된다. 형언할 수 없는 괴리감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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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던 것을 빼앗겼을 때의 상실감은 새로운 것을 얻지 못할 때의 실망감보다 허무하게 내 가슴을 내려친다. 원래 내게 없었던 것을 바란다면 그건 욕심일테지만, 불과 1년전의 나는 이렇지 않았으니. 외로움, 이 시퍼런 감정에 적응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것은 연인의 품이 그립거나, 가족의 품이 그리워서 따위의 이유에서 비롯되는 물리적인 외로움이 아니다. 주변에 사람과 사랑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내 자신으로부터 느끼는 외로움. 이와 동반된 끝없는 무기력.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 그저 파아란 이곳의 하늘이 슬퍼보이지 않길, 한없이 예쁘게만 보이길,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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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사이 공간들에 젖어있는 눈물을 들키기 싫어 웃어 보이기 시작한 지는 꽤나 된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 내가 막 글에 매료 되었을 때에 <광대>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상대의 호응과 반응에 맞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한껏 웃으며 내 자신을 숨긴다는, 뭐 그런 이야기인데 중학생짜리가 쓴 글 치고 내용이 굉장히 어둡고, 반항적이고, 먹먹해지는 것이 그때와 지금의 나도 별반 달라지지는 않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끔 하는 글이다.
글이 좋은 이유는, 글 속에서 만큼은 내가 마냥 행복한 사람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있다. 남들 눈에 매일같이 깔깔대고 즐겁게 사는 것만 같은 내가 펜만 잡으면 어둡다 못해 절망적인 감정들을 종이 위에 쏟아내는 것. 내게 있어 글의 안팎은 나의 안팎을 상징하기 때문에, 흰 도화지에 나의 내면을 토해내는 작업은 이따금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나의 속이 푸르뎅뎅한 검은색이라고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니게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천국과 지옥 마냥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은 나의 자아에 가끔은 혼란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포용하며 살아갈 뿐이다. 실제로 나의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며, 내 내면의 목소리가 실재하는 나의 목소리로 전해져 오는 것을 듣고 있자면 어딘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진다. 행복한 정윤아, 이토록 어두운 정윤이는 너가 아니잖아. 글쎄, 4년이 지나도 생각의 큰 틀에는 변함이 없는 것을 보면 이제는 익숙해져야 할 때가 아닌가, 누군가가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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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너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모르니, 라는 물음은 상당히 잔인하게 나의 마음을 후벼 판다. 행복할 환경이 주어졌다는 것이 기어코 행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 그건 그냥 행운인거지. 무심결에 비수로 꽂힌 이 물음표는 상대가 정의한 행복의 기준에 나를 구겨 넣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환경이 있음에도 행복하지 않은 것은 문제다, 라는 식의 책망으로 나의 어깨에 한 줌 짐을 더 얹어 놓는다. 이미 무채색인 세상에 한 겹 붓칠이 더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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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굴같은 나의 집, 나의 방으로 통하는 기나긴 복도를 걷노라면 그 복도의 끝에 위치한 창문과 마주한다. 그 밖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옮겨 놓은 것 같아, 나는 그 창문을 ‘액자’ 라고 부른다. 매일같이 형형색색의 다른 하늘들로 하여금 채색되는, 가끔은 햇살에 눈이 부셔 바라볼 수 없는 액자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아름답다. 이토록 아름다운 하늘 아래, 아름답게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괜히 일렁인다. 오늘 하루 중 가장 좋았던 순간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저 액자를 가리키겠지.
오늘은 액자가 검게 변하기 전에 집에 올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볼품없는 하루 끝에 남는 것은 볼품없는 한숨 뿐. 감상을 끝낸 나는 내 뒤로 길게 늘어진 까만 그림자를 들쳐 맨 체, 터벅터벅 집안으로 몸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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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오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내게 두려움이 되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천장이 내 위로 무너져 내리고, 어둠은 나를 짓누른다. 밤이라는 탱크에 차오르는 시간, 뒤이어 밀려온 생각들은 내 목을 죄여온다. 아, 나는 언제쯤—. 불면의 가학은 스산하게 나의 영혼에서 빛을 앗아간다. 소란스러운 머릿속, 부스럭거리는 이부자리마저 소음이 되어버린, 나의 한숨이 너무 크게 들리는 새벽. 어둠에 잠식된 빛, 잠들어 버린 도시. 나는 깨어 있지만 불이 밝혀진 창은 없는 듯하다. 내가 깨어있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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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나는 참 잠이 없었다. 새벽 6시면 일어나 TV를 보던, 그림을 그리던, 항상 앉아서 무언가를 그렇게 꼬물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굳이 꿈나라로 도망갈 필요가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간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지만, ‘낮’으로 일컬어지는 시간의 나는 낮을 살지 못해 이리저리 뒤척인다. 원하지 않는 아침에 눈을 뜬다는 것은 원하지 않는 하루를 또 살아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인지, 역설적이게도 잠은 내 유일한 도피처다. 갖가지 책임과 의무와 관계로 뒤얽힌, 금방이라도 푹 꺼져버릴 듯한 어깨가 현실의 하중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지는 시간. 그곳의 나는 내가 외롭다는 것도, 힘들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니 참 다행이다.
무거운 시선의 끝에는 12:37이라는 숫자가 깜빡, 깜빡거린다. 늘 그렇듯 새파란 하늘을 맥없이 쳐다보다가 미적지근한 물 한 모금에 지난밤 꿈에서 보았던 기억들을 삼켜내고 나면 나의 하루는 강제로 시작된다. 살고는 싶은데 “살아내기”는 싫은 하루다. 잔뜩 구겨져 있는 이불이 마치 내 꼴 같아 쓴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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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낮과 밤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그 세상의 밤을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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