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씨에게,
당신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10대, 당신의 생애를 요조라는 캐릭터에 투영해 집필한 <인간실격>을 읽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꼈습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살았다”는 덤덤한 고백으로 시작하는 당신의 수기는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당신 자신을 향한 인간실격의 선고로 끝을 맺었고,
어렸던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하는 동질감과 이질감,
그 모순적인 두 감정의 동시성에 꽤나 혼란스러웠습니다.
당신의 안타까운 생애를 엿보며 느낀 감정은 연민이기도, 출처 모를 공감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거기서 위로라는 것을 얻었습니다.
세상의 언어, 그 따스한 위로와 사랑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오히려 그 따뜻함에 쫓기기라도 하듯 매일같이 나를 죄여오던 우울과 불안은
역설적이게도 자기연민에 빠진 한 작가의 생을 활자로 간접 경험하는 것으로,
당신의 비극에 대한 야릇하고 절절한 공감으로 해소되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두려워했던 이 세상의 합법,
그것에서 느껴지는 한없는 강인함이, 그 불가해한 구조가
사실 벗어날 수 없어 그저 수용해버린 나의 온 세계여서,
비합법의 바다에 뛰어든 당신의 용기를 나는 가지지 못해서,
그래서 감히 당신을 동경했습니다.
감히 당신의 비극으로 내 보잘것없는 우울을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내 작은 세계의 궤도 밖에서 방황하던 나에게
당신이 허락한 유대는 실로 구원이었습니다.
당신이 당신과 같은 “음지의 사람”을 만났을 때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던 것처럼,
당신의 비합법에, 우울에, 무기력에, 비관에 내가 느꼈던 그 ‘다정한 마음’은
당신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나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길고 긴 괴리를 성공적인 다섯 번째 자살 시도로 끝냈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세상을 부정하는 방식이었는지,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는지,
회피하는 방식이었는지, 타협하는 방식이었는지, 조롱하는 방식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비극을 비도덕적 인생을 산 우울증 환자의
가소로운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며
진실인양 치부하는 사람들을 가끔 마주할 때면
당신의 마음이, 그 극단적 선택이 아주 조금이나마 가늠이 갑니다.
당신의 시대에도 사람이란 뭐 별다를 바 없었겠지요.
당신은 많은 철학과 순수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전후 혼란을 겪던 20세기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도
하루키와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유명 작가들에게까지도
현대인의 불안과 괴리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당신은 우상의 존재로 아직까지 회자됩니다.
당신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세상에 등돌렸지만
이기적인 나는 그 사실이 그저 안타깝다가도 당신의 유명세를 다행이라 여깁니다.
당신의 글로 내 시대의 누군가와 연대할 수 있게 됨에,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당신이라는 세계가 존재함에,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괜히 아이처럼 가슴이 뛰곤 합니다.
가을밤 술에 취해 당신이 정의한 희극명사와 비극명사로 이 커다란 세상을 분류하며
당신에 대해 논하다가 사랑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남긴 이 낭만적인 대화에도 나는 감사합니다.
이후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을 접하며 꽤 자주 가슴이 뛰었지만
나는 아무래도 당신을 너무 사랑합니다.
더 나이가 들어 좋아하는 작가를 묻는 질문에
다른 이름이 자연스레 내 입에서 튀어나오게 된다 하더라도
당신의 글이 나에게 주었던 위로와 공감의 크기는
평생 대체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당신은 항상 나에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동경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당신에겐 늘 감사하고 또 죄송합니다.
* 글의 형식은 2016년 발간된 문예지 <자정작용> 중 “서신과 답신”의 가상 편지 테마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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