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무엇일까?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정치란 지난하게 계속되는 정략적 정쟁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정치란 국회파행으로 대변되는 아수라장을 의미하지만 정치학에서 가르치는 정치란 사회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굉장히 고귀한 일이다. 정의, 자유, 평등, 안보, 성장처럼 사회를 구성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가치들을 배분하는 활동 - 정치 - 을 함으로써 인류는 스스로를 고무시켜왔고, 위대한 업적들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하지만 대한민국 정치에서만큼은 언제부터인가 가치 그 자체에 대해 고심하기 보다는, 가치를 정략적 도구로 이용해 왔고, 이런 가치의 부재는 反 정치주의의 팽배로 직결 되었다. 정치는 더 이상 고귀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를 기피한다. 정치인을 거부한다.
근 두 달 간 이른바 ‘안철수 돌풍’ 이 불면서 대한민국의 정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처럼 보이지만 필자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다시 한 번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現 정권을 포함한 지난 정권들에 대한 불만뿐만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 성숙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이 반 정치주의로 환원되어 ‘돌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투표조차 하지 않는 대다수 2, 30대를 정치권 안으로 끌어들인 안철수 현상을 두고 반 정치주의라니, 아이러니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안철수 전 후보의 위력, 50%의 지지율, 은 부패한 정치인 뿐만이 아닌 정치 그 자체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에 기반한다. 사람들은 안철수 전 후보가 정치와 무관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 그가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선언을 함과 거의 동시에 더 나은 후보가 나타났다며 ‘쿨하게’ 사퇴를 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비정치적인 행보에 감동을 받았고 나아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변화에 대한 열망을 실현시켜 줄 구세주를 보았다. 이렇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비정치인이며 사회의 아이콘인 안철수라는 특정인물을 지지하게 되면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치는 걷잡을 수 없이 높아져버렸다. 문제는 정치라는 생물의 이중성에 있다. 구성원의 기대감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생물이지만, 지나친 기대감은 독이 되어버리는 정치의 이중성 때문에 한국정치는 그 기대를 충족시킬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사다난 했던 지난 십 년, 한국인은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도 교체해보았지만, 대통령을 잃기도 해보았다. 온갖 정치적 희∙비극을 경험하면서 종국에는 범국민적으로 정치에 염증을 느끼게 된 상태이다. 정치인이 아닌 ‘시민 안철수’를 통한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과는 대조적으로 기존 정당정치에 대한 반감만이 조성되고 있는 상황은 바로 이 염증에서 기원한다. 그렇기에 필자는 ‘안철수 돌풍’에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정당정치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고, 정치가는 그 존재이유를 찾기 힘들다. 한국에서 성공한 정치인이 되기 위한 지름길은 정당에 입문하여 정치를 익히기보다는 사회 아이콘이 되어 일종의 팬덤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폭발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더 빨리, 더 많은 중간지대의 중위투표자들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안철수 바람’ 은 반 정치주의라는 폭탄을 잉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철수 돌풍’ 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시대를 막론하고 아이콘으로써 군림했던 사람들의 폭발력은 그들의 이미지에서부터 비롯된다. 가령, 우리의 인식 속에 자리잡은 모든 인도인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이미지는 언제나 직접 짠 베옷을 입고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으로 단식투쟁을 한 위대한 애국투사이다. 그러나 간디의 이면을 살펴보면 그는 비폭력의 상징성, 正義, 을 이용한 이미지 정치의 달인이기도 했다. 만약 인도인의 인식 속에 재단된 고급양복을 입은 서구 지식인의 간디가 있다면 그는 과연 영혼의 횃불이 될 수 있었을까? 간디는 카스트 제도와 힌두 민족주의를 주창했던 구시대적인 정치가이지만, 그의 실제적인 이념은 정치인으로써 그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비폭력으로 제국주의의 폭력에 맞선 애국지사로만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간디는 부조리한 제도의 수혜자였고, 기득권자였으며 정치엘리트였다. 간디에게 희생이라는 당시의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이미지가 없었더라면 그의 정치적 성공은 불가능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본다. 특히 지나치게 탈정치화된 2, 30대들은 보이는 그대로를 보기 보다는 자신들의 사고방식에 부합되는 정치인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봄으로써 자체적으로 정치적 기대치를 높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멘토 워너비’ 과정을 통하여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영웅 안철수’의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그가 정치판에 들어서자 그는 그의 정치적 신념과 이념보다는 현대적 영웅像에 의하여 폭넓은 지지층을 구축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안철수의 신념을 믿기도 하지만, 그의 성공신화에 호도되어 그에게 지나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자문해보아야 한다.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대선 투표율이 50% 정도밖에 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선거가 다가올 때마다 ‘바람’이 부는 것은 사실 국민들이 얼마나 정치에 참여하고 싶은지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패를 척결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정치라는 도구가 필요함을 국민들이 아직 잊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목소리가 없는 자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는 장이자 기존의 제도와 법이라는 축적된 자산을 활용하여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포괄하는 장치이다. 정치는 선거 때만 존재하는 일시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는 인간의 삶이요, 인류의 역사이다.
정치란 분주히 변화하는 생물이라고들 한다. 필자는 정치란 생물 중에서도 나무와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기라성 같은 정치가들이 있었고, 보수∙진보 양 진영에서 각기 거목이라 불리는 후보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한 그루의 거목이 아닌, 대한민국 정치라는 나무가 피워낸 개개의 열매이다. 이 나무가 좀더 다채로운 열매를 꽃피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이념적 스펙트럼을 사회적으로 용인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점점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감에 따라 국민들은 더욱 다양한 이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 간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너무나 협소하여 이러한 간극을 메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어떤 류의 메시아를 염원하는 것은 국민으로써 유일한 방책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본질적인 문제를 선거 때마다 특정 인물이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역시 민주주의 시민으로써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정치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미봉책만을 제시하도록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혹자는 안철수 현상으로부터 시작된 서울시장선거의 열기가 시민정치와 정당정치의 대결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야권후보통합 과정에서 시민정치가 정당정치를 심판했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시민정치와 정당정치 모두 민주정치의 한 줄기이다. 승패의 문제로 가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철수 현상으로 대변되는 멘토워너비 현상이 대한민국 정치에서 앞으로 어떤 양상을 보여줄 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정당을 근간으로 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정당구조가 안착하지 않고서는 그 사회를 민주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안철수 전 후보는 필자의 워너비이지만, 대한민국 정치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일구어낼 수 있는 정치신화가 아닌 진보정치의 세력화이고 나아가 政黨化이다. 한국정당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당은 시민정치세력과 대립구도를 펼치기보다는 그들을 포용했고, 시민정치세력은 야당에 포용됨으로써 대통합을 일구어왔다. 이런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매, 꽃 좋고 열매도 많다 하였다. 이제 바람의 정치 대신 나무의 정치를 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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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두 달 간 이른바 ‘안철수 돌풍’ 이 불면서 대한민국의 정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처럼 보이지만 필자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다시 한 번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現 정권을 포함한 지난 정권들에 대한 불만뿐만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 성숙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이 반 정치주의로 환원되어 ‘돌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투표조차 하지 않는 대다수 2, 30대를 정치권 안으로 끌어들인 안철수 현상을 두고 반 정치주의라니, 아이러니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안철수 전 후보의 위력, 50%의 지지율, 은 부패한 정치인 뿐만이 아닌 정치 그 자체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에 기반한다. 사람들은 안철수 전 후보가 정치와 무관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 그가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선언을 함과 거의 동시에 더 나은 후보가 나타났다며 ‘쿨하게’ 사퇴를 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비정치적인 행보에 감동을 받았고 나아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변화에 대한 열망을 실현시켜 줄 구세주를 보았다. 이렇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비정치인이며 사회의 아이콘인 안철수라는 특정인물을 지지하게 되면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치는 걷잡을 수 없이 높아져버렸다. 문제는 정치라는 생물의 이중성에 있다. 구성원의 기대감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생물이지만, 지나친 기대감은 독이 되어버리는 정치의 이중성 때문에 한국정치는 그 기대를 충족시킬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사다난 했던 지난 십 년, 한국인은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도 교체해보았지만, 대통령을 잃기도 해보았다. 온갖 정치적 희∙비극을 경험하면서 종국에는 범국민적으로 정치에 염증을 느끼게 된 상태이다. 정치인이 아닌 ‘시민 안철수’를 통한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과는 대조적으로 기존 정당정치에 대한 반감만이 조성되고 있는 상황은 바로 이 염증에서 기원한다. 그렇기에 필자는 ‘안철수 돌풍’에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정당정치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고, 정치가는 그 존재이유를 찾기 힘들다. 한국에서 성공한 정치인이 되기 위한 지름길은 정당에 입문하여 정치를 익히기보다는 사회 아이콘이 되어 일종의 팬덤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폭발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더 빨리, 더 많은 중간지대의 중위투표자들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안철수 바람’ 은 반 정치주의라는 폭탄을 잉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철수 돌풍’ 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시대를 막론하고 아이콘으로써 군림했던 사람들의 폭발력은 그들의 이미지에서부터 비롯된다. 가령, 우리의 인식 속에 자리잡은 모든 인도인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이미지는 언제나 직접 짠 베옷을 입고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으로 단식투쟁을 한 위대한 애국투사이다. 그러나 간디의 이면을 살펴보면 그는 비폭력의 상징성, 正義, 을 이용한 이미지 정치의 달인이기도 했다. 만약 인도인의 인식 속에 재단된 고급양복을 입은 서구 지식인의 간디가 있다면 그는 과연 영혼의 횃불이 될 수 있었을까? 간디는 카스트 제도와 힌두 민족주의를 주창했던 구시대적인 정치가이지만, 그의 실제적인 이념은 정치인으로써 그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비폭력으로 제국주의의 폭력에 맞선 애국지사로만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간디는 부조리한 제도의 수혜자였고, 기득권자였으며 정치엘리트였다. 간디에게 희생이라는 당시의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이미지가 없었더라면 그의 정치적 성공은 불가능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본다. 특히 지나치게 탈정치화된 2, 30대들은 보이는 그대로를 보기 보다는 자신들의 사고방식에 부합되는 정치인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봄으로써 자체적으로 정치적 기대치를 높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멘토 워너비’ 과정을 통하여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영웅 안철수’의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그가 정치판에 들어서자 그는 그의 정치적 신념과 이념보다는 현대적 영웅像에 의하여 폭넓은 지지층을 구축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안철수의 신념을 믿기도 하지만, 그의 성공신화에 호도되어 그에게 지나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자문해보아야 한다.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대선 투표율이 50% 정도밖에 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선거가 다가올 때마다 ‘바람’이 부는 것은 사실 국민들이 얼마나 정치에 참여하고 싶은지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패를 척결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정치라는 도구가 필요함을 국민들이 아직 잊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목소리가 없는 자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는 장이자 기존의 제도와 법이라는 축적된 자산을 활용하여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포괄하는 장치이다. 정치는 선거 때만 존재하는 일시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는 인간의 삶이요, 인류의 역사이다.
정치란 분주히 변화하는 생물이라고들 한다. 필자는 정치란 생물 중에서도 나무와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기라성 같은 정치가들이 있었고, 보수∙진보 양 진영에서 각기 거목이라 불리는 후보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한 그루의 거목이 아닌, 대한민국 정치라는 나무가 피워낸 개개의 열매이다. 이 나무가 좀더 다채로운 열매를 꽃피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이념적 스펙트럼을 사회적으로 용인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점점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감에 따라 국민들은 더욱 다양한 이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 간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너무나 협소하여 이러한 간극을 메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어떤 류의 메시아를 염원하는 것은 국민으로써 유일한 방책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본질적인 문제를 선거 때마다 특정 인물이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역시 민주주의 시민으로써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정치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미봉책만을 제시하도록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혹자는 안철수 현상으로부터 시작된 서울시장선거의 열기가 시민정치와 정당정치의 대결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야권후보통합 과정에서 시민정치가 정당정치를 심판했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시민정치와 정당정치 모두 민주정치의 한 줄기이다. 승패의 문제로 가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철수 현상으로 대변되는 멘토워너비 현상이 대한민국 정치에서 앞으로 어떤 양상을 보여줄 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정당을 근간으로 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정당구조가 안착하지 않고서는 그 사회를 민주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안철수 전 후보는 필자의 워너비이지만, 대한민국 정치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일구어낼 수 있는 정치신화가 아닌 진보정치의 세력화이고 나아가 政黨化이다. 한국정당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당은 시민정치세력과 대립구도를 펼치기보다는 그들을 포용했고, 시민정치세력은 야당에 포용됨으로써 대통합을 일구어왔다. 이런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매, 꽃 좋고 열매도 많다 하였다. 이제 바람의 정치 대신 나무의 정치를 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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