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당신의 이름은 얼마입니까?
1.
“이름값 좀 하라”는 말이 있다. 명성이 높은 만큼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하라는
뜻으로, 대개 유명세나
좋은 평판을 가진 개인 혹은 집단을 향해 질타를 보낼 때 ‘일침 찌르기’ 용으로 많이 사용된다.
2.
정보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초창기 인간은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에 대응하고자
언어를
고안했고, 헷갈리는 게 두려워 모든 사물과 현상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문명을 이룩한 인간
사회에서 이름은 개인을 타인에게서 구분짓기 위한 일종의 표식으로 쓰이며, 짧게는 한 음절에서
길게는 총 일 분 길이까지 달하는 이 신호가 가져다주는 의미는 단지 “이름과 얼굴
사이”의
추상적이기만 한 연상과정을 넘어서 존재론적 확신의 그것을 포함한다.
3.
남아메리카에 사는 가와쿠들이라는 인디언 부족에게는
특이한 풍습이 있다고 한다.
바로 다른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빌릴 때에는 돈도, 다른 물건도 아닌 자기 이름을 맡기고
빌려온다는 것인데, 이는 바꿔 말하면 그게 누가 되었든 빌려온 물건을 갚을 때 까지는 이름 없는
사람으로 살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저서에서 이 재미있는 풍습을 소개하는 어느 작가는
말미에 이렇게 덧붙인다. "이름을 그렇게 묵직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참
아름답다"고.1
이름을 저당잡히는 사람들, 이름에 부여된 삶의 무게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
4.
누구나 ‘이름’이라는 관념에 대한 각자만의 정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혹자는 한 단어짜리 명사에
어떻게 무수한 정의가 교차할 수 있겠느냐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북미에서 오래 생활한 유학생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름이라는 것은 매우 복합적인 모양새를 띤다. 단일민족인 한국인들이 쉬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특히 상이한 문화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에게 '이름'은 그저 개인적인
표식을 넘어서 이중적인, 혹은 다중적인 암시를 포함한 장문의 소개멘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라틴어를 비롯해 명사에도 성별을 붙여주는 수많은
언어들의 영향을 받은 영어의 특성상
이름으로 성별을 대충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Krizio는 남자,
Krizia는 여자. 물론 우리나라에도
영희와 철수처럼 성별을 가늠케하는 수많은 이름들이 많이 있으나, 이는 이름 자체의 특성에서 유추할
수 있는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 문맥의 이해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일제시대의 잔재중
하나로
손꼽히는 “子”자 돌림 여성 이름들이 그 예다. 미자 순자 영자는 아들이 귀했던 그 시절 딸에게 많이
붙여주던 이름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통해 사람들은 남자 子자로 끝나는 이름이 여성을 뜻한다는
사실을 안다. 물론 영어 이름에도 이렇게 성별 유추가 즉각적으로 가능한 이름들이 비일비재하나,
그에 더하여 스펠링까지 자세히 보았을 때 성별이 헷갈릴 경우는 거의 없다.
(박원순 서울 시장의 이름을 처음 듣고는 그를 여성 시장이라 생각하던 이들이 실제로 있었다.)
덧붙여, 온갖 인종이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는 미국 사회의 특성상 Last name 또한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읽어내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Nguyen은 베트남 사람이고, Wang은 중국계이고, Vargas는 히스패닉이고…. 이처럼 민족적, 인종적 버라이어티가 다양한 미국 사회에서 이름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 개인에 대한 상당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오늘 이름을 통해 짚어보고자 하는것은 그런
기본적인 인적사항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개인의
취향이다.다시 이름의 다중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대부분의 조기 유학생들이 자신의 영어
이름을 스스로 정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애슐리, 모니카, 데이비드, 스티브…. 어떤 이들은 어렸을
적 학원 선생님이 붙여준 이름이 마음에 들어 쭉 간직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해외생활이 처음
결정된 순간부터 들뜬 마음으로 이름을 물색하고 고민하여 스스로에게 그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모두 저마다의 이유와 사연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 붙여주는 이름
중
대부분은 지극한 주관적 성향과 관점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내 귀에 달콤하게 들리던
이름 (그냥
클로이라는 어감이 좋아서요), 내 눈에 멋지게 들어오던 영화속 주인공의 이름 (제임스 본드가
멋있길래…), 내 마음을 벅차오르게 하던 존경받을만한 위인의 이름 (케네디 대통령의 이름을
땄어요).... 이렇게 갖가지로 나뉘는 "내 이름의 의미" 들은 결국 이름이란 한 가지 표식어 내에도 얼마나 다양한 관점들이 산재하는지를 확연히 보여준다.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그저 불려지기위한 소리일 수 있으나,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미래의 자신을 투영시키는 거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5.
이름을 짓는다는 행위를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ㅡ 그것은 어쩌면 나고 자란 곳을 떠나 홀로
생활해야 하는 방랑인들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 갖게 된 이름은 부모님이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신생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순신 장군님처럼 되어라, 올곧은 소나무처럼 자라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크거라 하는 소망으로
붙여준 주문같은 이름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앞으로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외로운 나날들에 대한
결심을 뜻하며, 미래를
위한 도전에 기꺼이 동의함을 나타내는 암묵적인 확약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어제까지 가은이였던 어느 유학생은 유학길에 오르는 그 순간부터 레이첼을 비행기에 태우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날아감에 동조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동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다짐과 약속들이 녹아있을 것이다. 집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게 되는 수많은 21세기형 유목인들이 자신 스스로에게 붙여준 이름은
그렇게 새로운 존재로의 열쇠 역할을 함과 동시에, “어떤 도전을 시작하고자 할 때의
초심 바로
그 자체”를 상징한다.2
6.
하지만 초심이라는것은 결국 그 이후의 선택들을
무겁게 내려끄는 저울추가 되어야 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또다른 예로, 오늘부터 해리라 불리기로 결심한 남자는 새로 만난 외국인 친구에게
자신을 해리라 소개할 것이다. 그 외국인 친구는 그가 해리임을 절대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초면에
타인의 이름을 듣고 “잠깐, 너 해리 아니잖아.” 하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우리 사회에서 이름은
그렇게 나의 신뢰를 나타내는 첫걸음이 되며, 아무도 나의 이름, 이 “나의
존재를 위한 표식”에
한해서는 내 자주권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이 정석이다. 비록 나의 초심ㅡ혹은 부모님의 희망ㅡ을 담은
그 이름이 소개된 이후부터 나라는 존재는 너무도 쉽게 타인에 의해 판단되고 분석되기
용이해지겠지만, 결국 그 이름의 가치는, 아니 그 이름을 통해 살아있음을 확인받는 나라는 존재의
가치는 나만이 높일 수 있어야 한다. 가벼운 선택들은 결국엔 나의 초심에, 부모님의 희망에, 또 나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될 것이다. 덧붙여, 우리는 아직까지도 이 먹색 검댕을 주홍색으로 물들여
절대 지울수 없도록 낙인찍는 고약한 악습을 즐기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잊지 마시라.
7.
그래서 묻고 싶다. 오늘 당신은 얼마만큼의 이름값을 높였는가. 이 값이라는 명사 또한 너무나도
추상적이어서 개개인의 정의가 다를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그게 금전적인 값이든, 학문적인
값이든, 혹은 도덕적인 값이든 어제보다는 조금 더 높아졌고 내일은 더 높아져야 한다는 발전적 가치에의 인정이 결국 우리 모두를 노력하게 하는 것 아닐까. 일례로, 피겨 스케이터 김연아는 십수 년간의 맹훈련과 목표에만 집념하는 의지력으로 자신의 이름에 메달의 상징성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파워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추구하는 당신의 이름값은 얼마인가. 몇십억짜리 돈다발인가, 수십 개 신문의 헤드라인인가, 황금빛의 묵직한 트로피인가. 가치의 우위를 논하고자 한다기보다는, 그저 궁금할 뿐이다. 온갖 브랜드와 상품명에 기꺼이 과한 값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에 살고 있을 당신은, 또 나는, 지금 열심히 자신의 이름을 갈고 닦고
있는지.
그러니까 한번 더 묻자면, 오늘, 당신의 이름은 얼마인가? 당신의 이름값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가?
1. 김미라. 세상에 빛나지 않는 별은 없어.
2. 아멜리 노통브. 제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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