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여느 때처럼 나를 이리저리 흔들며 안아주고는 재미있는 탈무드를 들려주며 거봉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입에 넣어주는 꿈을 꾸고 있었다. 잠들기 전 시청했던 "피노키오"에서 꾀 많은 여우가 게걸스럽게 포도를 먹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꿈이 늘 그렇듯,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아무런 여과기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필름에 담아내는 달콤한 허구에 젖을 찰나, 다리가 심하게 저리는 것을 느끼고 꼭두새벽에 깨어나 새벽이 무너져라 울었었다. 좁은 단칸방 구석에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땅거미도 불쾌한 울음소리만은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리라. 이 세상 가장 따뜻한 손으로 내 다리를 주물러주며, 어머니는 그것이 성장통이라고 했다. 나는 도통 이해 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따뜻한 그녀의 가슴에 파묻고는 훌쩍거리며 그것의 정의를 물어보았고, 성장통이란, 다리가 길어져 당신만큼 커지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어른"이라는 말을 했다. 눈물을 뚝 그치고, 갸웃거리며 엄마도 피노키오처럼 뻥쟁이라고 하였다. 내 딴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늘 그 존재대로 키가 클 것이고, 내가 레고를 사달라고 할 때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한손으로 나를 번쩍 들어안고는 착한 일을 하면 사준다고 말해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늘 이만한 크기여서, 김치~ 라고 카메라를 들이 댈때면, 멋쩍은 표정으로 그들의 바짓자락에 기댈줄만 알았던 것이다. 영원히. 억울하게도, 나는 그들이 그들의 부모처럼 돋보기 안경을 쓰고 주름 가득한 미소로 건강이 우선이라며 이따 만큼이나 밥을 퍼주고, 그들이 먹는 모습을 이 세상 모든 행복인 것마냥 바라보는 늙은이가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따금 들렸던 할아버지의 산소안에는 열심히 산삼을 캐며 그 안에서 홀로 재미난 삶을 사는 사차원 할아버지가 있는 대신, 내가 살던 단칸방 보다 좁은 관속에 그의 차가운 몸뚱아리가 묻혀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이다.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과 맞닥뜨려야 한다는 치명적인 숙명. 그것만큼은 정말 미처 몰랐던 것이다.
시간의 비영속성에 굴복한 내 세월의 굵기는, 시시할 정도로 그 사실성이 정확한 "나이테"의 개념만큼이나 선명 해졌고, 나는 이제 생로병사를 이해하는 어른아이가 되었다. 아니, 나와 현존했던 동시대의 동심들도 이제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으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이 땅에 묶여, 인연이란 이름으로 죽음과 조우할 때까지 가능한 모든 것을 사랑하고, 보듬고, 용서하며 종교에 의지하고 싶은 것이리라. 인간 본연의 원초적 갈망은 가치추구란 미명하에 끊임없이 자극적인 환각에 사로잡혀, 빛 바랜 추억을 모조리 가슴 한켠에 뜨겁게 새기다 죽음의 불빛이 다가올 때, 온 힘을 다하여 사랑했노라고 나지막이 외치다 녹아 버리고 마는 촛농 같은 삶이리라.
14년의 봄은 더할 나위 없이 싱그러웠다. 어린 아이들의 몸에 솜털이 자라나듯, 앙상했던 나무들이 열매를 기워 입기 시작했고, 꿈을 이루기 위한 대한민국의 젊은 열정 또한 전례없이 뜨거웠다. 그냥 뜨겁기만 했더라면 싶었다. 차갑게 식지 않았더라면 싶었다. 이 모든 것이, 한 낱 성장통의 악몽이여서, 으레 깨어나면 저린 다리를 빼고는 모든것이 그대로인지라, 노곤하게 당신의 가슴에 파묻어버리는 지극히도 평범한 하루였더라면 싶었다. 꿈치고는 너무 숨이 막히더라, 꿈치고는 너무 다리가 심하게 저리고 목이 메여오더라. 죽음의 전령이 너무나 이르게, 생로병사를 몸소 깨우치지 못한 녀석들의 심장을 앗아갔다. 봄의 끝자락이 눈물에 찢겨졌다. 벚꽃대신 국화가 그들의 눈망울에 맥없이 흐드러졌다. 어린 영혼들을 집어삼킨 매정한 바다와 무심하게 비를 퍼부운 하늘도, 삶의 본질을 잃은 자들의 눈물샘만큼 깊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차가운 바다위에 애처로이 기적을 바라며 서있는 그들의 이성은 얼마나 흐릿하였을까. 어렴풋이 뉴스에서 구급대원이 방금 인양한 싸늘한 영혼을 들것에 실어 나르는 장면을 보았다. 누군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성별을 물어보았고, 여자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천만다행인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고, 저 뒤편에 있던 또 다른 실종자의 어머니가 서글픈 곡조로 신원 확인좀 하고싶다며 엄청난 힘으로 사람들을 비집으며 구조대원에게 갔다. 평소엔 주말특별세일의 기간에도 폭풍처럼 몰려오는 인파들 속에 흐뭇한 식탁을 상상으로나마 끝내야 했던 작은 어깨도, 지금 이순간 만은 이세상 그 누구보다 단단하리라. 다 뚫고 지나가겠노라. 내 앞을 막지 말아다오, 내가 배아파 낳은 자식이란 말이다. 그 고상한 얼굴을 어루만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란 말이다.
신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부모사랑이라는 인간 최후의 보루는, 처절한 슬픔의 말로에서 더할 나위없이 빛이 나는 것이다. 대자연의 섭리가 기적을 허락지 않는다면, 내 자식만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이기적인 염원, 애증, 그리고.. 사랑. 내 자식만큼은 실종자에서 생존자 명단으로 전이하는 기적을 줄 것이다. 행여나 싸늘한 주검의 향연이 계속 될 지라도, 내 자식만큼은 분명 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기위해서라도 고픈 배를 부여잡고 나올것이다. 만약... 정말 만약 그렇게 살아 돌아와 준다면, 그 기적이 선이든 악이든 반드시 부르튼 입술로 지금껏 보류해왔던 온정의 애무를 정성껏 하리라. 만약 다시 이품에 안긴다면,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언어로 감사와 사랑의 노래를 칭송하리라.
... 그렇다. 죽음은 이성을 말살시킨다. 이처럼 죽음이란, 인간 내면의 도덕과 이타심을 가장 가벼운 경멸조로 부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유일무이한 감정의 동물에게 신께서 처방한 가장 잔인한 "만약"은, 삼키면 삼킬수록 흑백사진이 되어버린 절절한 과거와 채색이 덜된 미래를 현실이라는 망각의 파노라마로 덧없이 칠해버리게 만들고는 지독한 불면증을 주는것이다. 지금껏 셀 수 없는 참사와 재난이 있었지만 무늬만 선진국인 대한민국은 무능함을 과시하는것 외에는 이렇다 할 해결책을 세우지 않았다.
늘 똑같은 패턴으로, 세간에서는 이게 다 정부 때문이니 군 당국이 문제니 뭐니 하며 갑론을박을 벌이며 책임 전가라는 도구를 망설임 없이 남용하고, 우리국민들은 늘 그래왔듯 시간의 경과라는 지독한 자연의 생리현상 속에서, 비난 혹은 동정의 가슴이 처음의 것 만큼 강렬하지 않아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싱숭생숭한 의무감 마저 들었을것이다. 곧, 누군가는 코미디를 보며 일상의 소소함을 되찾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마냥 즐겁게 사랑해 취해버렸을 것이다. 결국, 드라마 같은 현실이 없듯, 이렇다 할 이변 없이 사람들은 보통날을 가장 무의식적인 숨결로 들이 마시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땅거미가 들끓는 구석진 삶의 뒤편에서, 보통날이 기적이 되버린 이들에게, 이 모든 고통은 전적으로 그들이 암묵적으로 지고 가야할 분노와 설움의 쇠사슬인 것이다.
이토록 애절한 동정심은 정작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 질 때에, 무관심으로 변질되는것이다. 하지만 너무 야속해말라, 인간의 연민이란, 그 아둔한 감성만큼이나 한계성이 짙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태양에 미소 짓고 싶은 마음이리라. 그것이 졸렬하다 하지마라. 같이 울고 웃기엔, 신은 너무나 불공평하게 행복과 불행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신을 원망하기엔 찰나의 삶의 정경이 너무나 속절없이 아름다웠으리라.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점철된 분노가 그 압력을 못이긴채 폭발했다. 온 국민이 설움의 혼이 되어 고함을 쳤고, 혼을 받아 마땅한 이들은 짐짓 놀란 표정으로 그들의 원성을 피부로 느꼈다.
국가가 세워준 연휴로 노곤한 피로를 풀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는지, 모두 무거운 발걸음으로 같은 곳을 향하여 추모의 물결을 이어갔다. 아, 이 얼마나 슬프고도 장엄한 광경인가. 인문, 사회, 철학, 과학, 예술, 수학.. ... 그 어떠한 인간의 존재를 규명하는 지식의 특수성도 제 아무리 뛰어난 탁월함을 갖추었다 한들 이 애도의 정경앞에서는 삶의 가장 보통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정부 뿐만 아니라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단체들은 고개숙여 반성해야 할것이다. 아니ㅡ, 이번 일로 일어날 파장을 그 어떠한 반문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함부로 "부모의 심정"을 읊조리면 아니 될 것이다.
피해자들 중 일부는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국가의 존재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고, 또한 우주의 본질 자체에 의구심을 품기도 할 것이다. 대개는 별안간 엄습해오는 억울한 감정을 짓누를 수 없을 것이다. "내 아들은 참으로 효자였는데,,", "우리 언니는 그 누구보다 선을 행한 천사였는데.." 죽은이들의 삶이 착한 사마리안인의 본보기였는지, 디사이플스의 숭고한 회개와 믿음으로 가득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죽음이란, 도덕과 정의를 고려하지 않는 기계적 결함을 지닌 채, 인간이 가장 나약하고 무방비 할 때 그 검은 이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분노는 누굴 향한 것인가. 아니, 무엇을 얻기 위함인가. 그 서러운 눈빛은 누굴 향한 청원인가. 정말 미안하다. 이미 그대마음속 가장 낮은 곳 언저리에서 당신의 고뇌는 부질없다고 죽음이 속삭이지 않던가. 사형수의 죽음과 순교자의 죽음은 엄연히 다르겠으나, 죽음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고개숙여 죽은자의 말로의 행적을 과거라는 이름으로 기리고는 야윈 눈으로 흘긋 바라보고 마는 것이다.
결국, 사랑하는 이들의 차가운 입김 조차 느낄 수 없는 저질스러운 현실 드라마앞에서, 당신들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질문.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움이 사무친 여생의 거리를 어떻게 즈려밟고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자문.
정답은 단 하나.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다반사를 헤쳐 나가기.
이른 아침, 간이 덜된 국이라고 눈물을 조미료 삼아 메인 목에 밥을 넘기는 행동도 하지 말아야 하며, 으레 즐거운 표정을 짓는 주변사람들의 입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 본채 엷은 쓴웃음을 짓지도 말아야 하며, 빌어먹을 과거에 얽매여 부르튼 심장을 부여잡고 신음소리를 내는 행위도 삼가야 한다. 그대들은, 아니.. 우리 모두는, 이미 지나간 사람들의 행복과 못다한 꿈까지 이뤄야할 사명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켜보고 있을것이다. 저 멀리 소리없이 당신의 노여움을 비추는 부끄러운 등대처럼, 그들 또한 말없이 지켜보고 있을것이다. 당신은 커피를 쥐었을 때 여린 손바닥 품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를 만끽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지나가는 강아지의 등을 보드랍게 쓰다듬어주며 활짝 웃을 수 있는 미소, 행려병자를 보았을 때, 뭉클한 감정이 일게하는 따뜻한 온정이 있다. 추억의 영사기 안에 담을 행복들이 이리도 많은데 가만히 누워 귓가에 눈물을 흘리다니 그것이 될 말인가.
흐린 아침, 뿌연 안개속에 이슬을 머금은 흑 위에 묵묵히 생명의 점액을 뿌리며 삶의 무게를 지탱하는 지렁이도 못난 모가지를 숙인채 통렬한 고독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시간이 저만치 흘러서, 주름이 자글해지고 돋보기 안경을 써야할 때 ㅡ 바닥을 향해 굽은 허리너머 한줌 흙이 되어 묻혀버릴 땅에 겸허히 환희의 입맞춤을 할 때 ㅡ 수척해진 몸이 가벼워지고 여윈 눈이 투명하게 빛날 때 ㅡ 그리고.. 그리웠던 이들과 마침내 서글픈 마주침을 할 수 있을 때 ㅡ 그 때, 비로소 모든것을 초월한 삶의 제 2막이 시작되리라.
결국, 인생이란 속절없이 아름다운 것이여서, 물음표를 달기엔 너무 고상한 것이요, 느낌표를 달기엔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닐까. 세상과 하직하려는 별은 흐릿하다. 하지만, 강렬하게 사랑했던 별은 뜨겁게 타올라 태양의 둘레에 머물 것이다. 그리고 웬 날씨 좋은날, 우리 가슴속의 잔잔한 바람의 소리를 느낄 수 있을 때, 한 줄기 빛이되어 그대의 얼굴을 비추리라. 마지막으로 사랑을 잃은 모든이들에게 이 시를 바치며...... .
『바람』
한 상 윤
나지막이 손등을 스쳐가는
밤 바람의 뒤척임에 웅크려 흐느낄 때
내 안에 부는 바람을 외면 했네
이루어 지지 않는 공상에
퍼부었던 의미부여가
조각난 틈으로 새어나갈 때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고
마른 하늘에 고함을 칠 때가 있었네
그리고 내안에 부는 바람을 외면했네
고이 접은 돛단배는 다시 회귀하지 않을
두서 없는 기약을 한 채
아스라이 먼 나의 유목으로 흘러 가는데,
몰랐네. 내안에 부는 바람은 싱그러운데
망각의 전율에 몸을 실어
바닥 없는 비극에서 희극을 벌였네
밤 만큼 낮 또한 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안의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네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내것이여서
노여워 할 일도, 그리워 할 일도 없었네
나를 쐬러 오겠노라고
내 안의 바람이 나지막이 속삭일 때,
나 또한 흘러가는 바람임을 알았을 때,
낮은 길었고, 밤 바람은 미지근 했네
바람, 바람, 바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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