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는 왜 신 포도를 싫어했을까? 이솝 우화의 여우는 자신이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있는 포도를 신 포도라고 생각한다. 그 포도가 단 포도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여우의 방어기제를 보며 우리는 섣부른 자기합리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 이때 우리는 당연하게도 여우가 신 포도를 싫어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이야기를 이해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얻은 교훈에 고개를 끄덕인다. 만일, 여우가 신 포도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포도를 포기하였다면, 자신이 이룰 수 없는 눈 앞의 허상에 유혹당하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린 그 현명함에 찬사를 보내야 할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그렇기에 여우가 신 포도를 싫어한다는, 어찌 보면 굉장히 당연한 그 가정은 우화의 핵심이다. 우화가 전해져 오던 그 긴 시간 동안, 여우의 자기합리화가 찬사가 아닌 비판의 대상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신 맛의 부정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우리도 가끔은 샛노란 레몬, 에티오피아산 예가체프, 잘 익은 피클, 찬 물에 섞인 매실 원액의 신맛이 혀 밑을 긴장시키고 턱 근육을 경직시키며 두 눈을 살짝 감기는 것에 대해 관대하다. 이따금씩 역설적인 범주를 초과해 가학적이라고도 보여지는 신 맛에 대한 애증은 신선하리만치 자극적이다.
단 맛처럼 보편적이고 전폭적인 사랑을 받기는커녕 ‘여우와 포도’ 우화에서처럼 도피의 대상이 되는 신 맛이 5대 미각 중 하나의 자격을 꿋꿋하게 지켜내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까지 하다. 인간의 잣대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태양계 행성 중 하나가 행성의 자격을 박탈당해 이름을 빼앗기고 소행성 134340의 번호를 받게 된 시대에 말이다. 사실, 신 맛이 그렇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호사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달콤함의 옆에 어느새 능청스럽게도 자신의 성격을 죽이며 새콤함으로 다가가 달콤함을 보조해 주기도 하고, 온통 지치기 쉬운 미각을 흔들어 깨우며 식도락의 기쁨을 되새김질 하도록 격려해온 결과이다. 심지어 가끔은 단 맛에게 자신의 공적마저 양보하며 자취를 완전히 감추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 맛이 조금 더 대중적으로 사랑 받았더라면, 혹은 신 맛이 조금 덜 굽혔더라면 우리는 ‘단무지’가 아닌 ‘신무지’ 를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신 맛은 악착같다. 때로는 자신의 고개를 숙이기도, 때로는 쉽지만은 않은 일을 도맡아 오며 각고의 노력을 들여 악착같게도 신 맛은 인정받고 있다.
대학 입학 후 첫 가을학기 중의 일이다. 필자가 속해있던 라크로스팀은 라스베가스에서 열리는 토너먼트에 참여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필자를 포함한 신입생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열 시간 남짓의 여행 동안 팀 전체가 먹을 간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신입생끼리 어느 정도 의논을 거쳐 음료수와 감자칩을 적절히 나누어 가방을 묵직하게 채워갔지만, 먹는 것과 운동하는 것이 일상의 낙인 스물 두 명을 만족시키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준비해간 간식이 떨어지자 궁여지책으로 잠시 쉬러 정차한 휴게소 편의점에서 신 맛이 나는 젤리를 조금 샀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굉장한 호응을 얻었다. 인종도 체격도 다른 팀원들이 젤리를 입에 한 움큼 털어 넣고 신 맛이 혀 밑을 간질이기 전까지의 묘한 긴장감에 열광하는 모습은 다소 야만스럽기까지 했지만, 그 순간은 분위기를 틈타 평소 교류가 없었던 이들과 친해질 기회였다. 토너먼트 당일, 경기 후반에 부상당한 주전선수와 교체되어 필드 위에서 다른 주전선수를 돕는 역할을 맡게 된 신입생들은 처음으로 얻은 출전 기회에 부족한 실력이라도 악착같이 뛰었다. 경기 직후 무뚝뚝한 코치가 불러 세워 칭찬의 말을 건네기까지의 짧은 시간은 마치 신 맛의 자극을 기다리는 묘한 긴장의 순간과 같았고, 역시나 그 긴장의 결과는 짜릿했다. 마치 버스 안에서 먹었던 젤리의 신 맛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요새는 참 굳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이 최초, 최고, 최대의 타이틀을 갖고 있기를 원하는 동시에 그러한 성취가 시야에서 멀어지는 순간 쉽게 절망해버리곤 한다. 그 최상급의 수식어만을 바라는 사고의 동맥경화에 걸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신 맛의 자극이다. 최고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최고집착증'에 빠져 한 곳만 바라보고 달리다가 자신의 역할과 역량의 약간의 한계라도 발견하는 순간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듯이 모두가 눈 먼 리더가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좋은 리더가 있으려면 좋은 팔로워도 필요한 법이다. 모두 최고가 되겠다는 정체된 이기심보다 역동적인 상호보완의 새콤함이 건강한 자극일 것이다.
신 맛은 매이저한 맛과는 다소 다르지만 그들을 보강해주는 맛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숨기기도 숙이기도 하는 겸손 속에서도, 단 맛의 커다란 존재감 옆에서도 당당히 그 가치를 인정받는 맛이다. 새콤함이 빠진 케첩의 짭짤함, 귤과 사과의 달콤함, 김치의 매운맛이 지금 만큼 대중에게 매력을 어필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게다가 짠 맛이나 단 맛과는 다르게 신 맛은 주관의 굴레에서 다소 자유롭다. 짠 맛과 단 맛은 개인차가 심해 누구에게 짜거나 단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신 맛은 누구나 쉽게 알아차린다. 멀리서 풍기는 옅은 냄새만으로도 존재감이 있는 신 냄새의 그 악착 같은 고유성은 같은 목표만을 추구하고 항상 돋보이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는 듯하다. 이솝 우화에서 포도를 등지는 여우의 결정이 꼭 어리석은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의 유연함이 신 맛의 억척스러움이 주는 숨겨진 교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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