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에 대하여 - 단 맛

Posted by 버클리보이
2014.12.09 03:32 SERIALS/맛에 대하여


맛에 대하여 – 단 맛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되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초콜릿 향의 치약을 쓰던 때가 있었다. 초콜릿 향기에 심취해 오랫동안 입에 머금고 있다거나 간혹 몰래 삼켜도 보던 동생과는 달리 나는 치약의 그 인공적인 단맛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까치발 들어 힘들게 써왔던 세면대 앞에서 몸을 굽히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내 치약에선 더 이상 초콜릿 향이 나지 않게 되었다. 양치질이 끝나기가 무섭게 물로 깨끗이 단맛의 마지막 흔적까지 헹구어내려 했던 유년시절의 나는 빨리 자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단맛이 사라진 씁쓸한 박하 향의 치약으로 칫솔질을 한 뒤 오전 수업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짧지만 진지한 고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진 졸업반 대학생이 되었고, 아직 지난 새벽 숙면의 몽롱함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탓에 양치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물 대신 오렌지 주스를 마신 실수에 대한 쓰디쓴 대가를 입에 양껏 머금고 나서야 비로소 하루를 시작할 마음이 생긴다.

 

가끔씩 집 근처 Shattuck Avenue 에 자리잡고 있는 다소 허름한 식료품점에 들러 때 묻은 타일 넘어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 보면 구석에 놓여져 있는 치약 튜브 형태의 짜먹는 초콜릿을 발견하곤 한다. 잘 밀봉된 포장을 뚫고 초콜릿 향이 새어 나올 리 없겠지만 세 걸음 남짓한 선반과 선반 사이의 공간을 지나칠 때 이미 눈은 초콜릿 향을 감지해 서둘러 어린 시절 초콜릿 치약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Shattuck Avenue 에 있기에 Shattuck Market 이라는 간판을 내건 식료품점의 간결함만큼이나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생각이기에 계산을 위해 카운터 앞에 멈추어 섰을 때 즈음 이미 회상은 끝난 지 오래이다. 만약 달달한 초콜릿 향 치약을 쓴다면 실수로 오렌지 주스를 마시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이상론적 가정은, 그러한 실수를 통해 맛보아야 하는 예상치 못한 쓴 맛의 도움으로 잠에서 깨 수업을 가게 된다는 현실적인 결과 앞에 단순한 공상으로 귀결되었을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단 맛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게도 예전의 기억을 불러오는 데에 아주 선수라는 것이다. 심지어 필자처럼 단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단 맛을 통해 다시금 돌아보게 되는 기억 중에서 불쾌한 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아까도 말했듯이 초콜릿 향 치약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생각을 더듬다 자연스레 돌이켜본 유년시절은 꽤나 유쾌한 기억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도 이러한데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단 맛이란 무언가 좋은 기억을 되살려 오는 촉매임이 분명하다. 공교롭게도 연애의 달달함을 떠올려 본다거나 성공의 달콤함에 매료되고, 인내의 시기를 통해 얻게 된 마시멜로를 입 안에 넣으며 자기만족감을 즐기는 그 모든 행동에 단 맛이 관여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도 발렌타인데이 때 건네 받은 초콜릿의 향을 떠올리는 연인들과,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입 천장에 늘러 붙은 호박엿을 힘겹게 녹이며 원하는 것을 얻어내 현재를 즐기고 있는 구 수험생들, 그리고 시골에서 오디를 따 먹으며 산길을 걸어 통학했던 기억을 이따금씩 꺼내 잘 닦아두는 나의 아버지까지 단 맛에 대한 애정은 끊이지 않고 있다.

 

단 맛이 이렇게 사랑 받는 이유는, 아마 과거를 돌아보기 좋아하는 우리에게 지난 날을 돌아볼 기회를 주기 때문인 것 같다. 제 아무리 여태껏 자신이 거쳐온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성찰하여 앞날을 계획하는 미래지향적인 사람일지라도 과거를 돌아보는 습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게 마련이다. "구관이 명관이다" 라는 말을 습관처럼 꺼내며 옛 정치의 향수를 추억하는 기성세대와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재회에서 학창 시절 즐거웠던 이야기를 안주 삼아 밤을 세우는 사회 초년생, 여태까지 즐거웠던 일들을 떠올리며 행복했던 시간을 되새김질 하는 연인들은 단 맛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곤 한다. 하지만 단 맛의 끈끈함에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 그 상황 속에 계속 사로잡혀 있다 보면 어느새 자꾸 뒤만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지난 날이 자꾸 돌이켜 볼 만큼 좋았더라면 그 만족을 새장 속에 보기 좋게 가둬 두고만 있기보다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도록 다리를 움직이는 노력도 필요하다. 때로는 선반 구석에 다소곳이 놓여 있는 초콜릿에 잠시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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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CCHARINE
    • 2014.12.12 23:40
    가장 단 맛은 바로 추억 속의 단 맛이 아닐까 싶네요. 밤샘공부하며 먹는 초콜릿의 씁쓸한 단 맛도 나중에 돌아보면 추억의 단 맛이 되겠죠?
    • 2014.12.26 04:38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초콜릿이 너무나도 땡기는 날이 가끔가다 있는데요. 종종 초등학교때 읽었던 동화들을 기억하려고 하고, 중학교때 뛰어놀았던 일을 회상하고, 고등학교때 함께 카페에 앉아 밤새 수다떨었던 친구들을 찾는 것과 비슷한건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