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연합뉴스>
지난 2018년 10월 30일 대한민국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에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하고 임금을 받지 못한 고 여운택, 고 신천수, 고 김규수, 그리고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98) 어르신 등 4명의 한국인에게 신일철주금이 일 인당 1억 원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최종 판결했다. 위 판결은 외교적인 충돌을 유발하였고 일본 측의 주장과 대립하는 부분이 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사법부의 최고기관인 대법원에서 최종 결정된 판결이기에 크게 논란이 되었다. 판결을 담당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원장과 대법관 13명으로 구성된 합의체로, 정치/사회적으로 파급력이 큰 사건만을 담당하며 복잡하거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재판일 경우에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미뤄볼 때 위 판결은 국내/외에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98) 씨는 17살이던 1941년,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말 한마디에 근로 보국대에 지원했지만, 하루 12시간씩 철재를 나르는 단순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기술을 배울 기회는커녕 임금도 받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강제로 노역에 끌려가 임금을 받지 못한 4명의 강제노역 피해자들은 1997년 일본에서 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지만, 일본 재판부는 2003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개인에게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판결한다. 이에 피해자들은 2005년 대한민국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다시 손해배상 청구를 하였고, 13년 8개월 만인 2018년 10월에야 원고 측 승소로 최종 판결이 확정되었다. 원고 4명 중 3명은 판결이 나온 시점에 사망한 이후여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 측이 주장한 한일 청구권 조약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한일 청구권 조약은 1965년 6월 맺은 한일협정의 부속협정이며, 이는 위안부 및 피해자 보상 문제에 매번 걸림돌이 되었다. 한일 협정을 통해 양측 정부는 '한-일 양국의 국교 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을 조인함으로써 수교하였지만, 일본 식민지배 시 저질렀던 만행에 대한 사과가 선행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 한국 정부는 청구권 3억 달러와 경제 차관 3억 달러를 지원받는 대신 모든 피해에 대한 배상을 포기하기로 약속하여 수교 당시에도 반대가 거셌지만 강행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한일 청구권 조약과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과는 별개라고 판결한다. ‘청구권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한 점’을 비추어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국가 간의 합의인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인해 대법원에 2건, 서울고등법원에 1건 등 계류 중인 총 15건의 일본 전범 기업 배상 소송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인 신일철주금이 자발적으로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국내에서 배상을 강제할 방법이 없어 또 다른 논란을 야기했다. 흥미롭게도 신일본제철[Nippon Steel Corporation, 新日本製鐵]은 일제강점기 시기의 강제동원 노동력을 발판삼아 2019년 현재 일본 최대 철강업체이자 생산량 기준 세계 4위 철강업체로 거듭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피해자의 실질적인 고통을 치유하는 것에 대해서 한일 양국이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진지하게 모색해 나아가야 하며, 이러한 문제를 정치적 쟁점으로 삼아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훼손하는 것은 대단히 현명하지 못한 방안”이라고 지적한다. 현재 일본 정부는 위 판결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한국 정부에 양자 협의 요청을 하였다. 정부 간 양자 협의 요청을 촉구한 과정 역시 껄끄럽다. 일본 정부는 지난달 9일에 징용 판결과 관련해 30일 이내에 답변을 요청한 바 있는데, 한 국가가 임의로 상대편 국가에게 답변에 대한 데드라인을 정하는 것은 국제관례에 어긋날 뿐 아니라 선례가 없는 행위이다. 한국은 ‘정치적 쟁점화를 원하는 일본의 의도에 넘어가지 않겠다’며 협의 요청을 거부하고 있지만, 일본 측은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했지만 대한민국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앞세워 국제 사회에 동정표를 얻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와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인상 역시 검토하고 있다. 최근의 한국 구축함이 일본 초계기를 겨냥해 레이더를 발사했다는 억지와 꾸준히 논란이 되었던 위안부 갈등 역시 한국과 일본 간에 풀어야만 할 숙제와 같다.
일본은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미래지향적인 상호 협력과 발전을 위해 위안부 및 강제노역 등 과거사를 인정하고 진정성 있게 사과해야 한다. 아베 현 일본 총리의 지지율이 바닥을 칠 때마다 우익 세력을 응집시키기 위해 한국과의 역사적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은 대한민국의 자긍심과 자주성을 또다시 짓밟는 행위이다. 특히, 팩트에 기반을 두는 ‘역사’와 국가, 정당, 그리고 개인의 실익에 의해 변하는 ‘정치’는 엄연히 다른 잣대와 기준이 필요하다. 물론, 1965년 박정희 정부 당시 강행했던 한일 청구권 조약과 2015년 박근혜 정부 당시 강행했던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와 같은 졸속 조약과 합의에 서명한 과거 한국 정부 역시 성찰의 계기가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는 과거 실수를 타산지석 삼아 자국민을 힘있게 보호하고 대변하는 그런 정부가 되어주길 간곡히 바란다.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 <사진제공 =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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