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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 대하여
어릴 적 집 문을 나설 때 마다 엄마가 배웅을 해주시며 꼭 하시던 한마디가 있었다.
“넌 다른 아이들과 달라. 넌 특별해. 오늘 하루도 파이팅!”
싱긋 웃으면서 늘 생기롭게 말씀을 해주셨다. 언제부터 이 말씀을 해주신 건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학교 갈 때도, 학원 갈 때도, 검도를 배우러 갈 때도 엄마는 매일같이 현관 문 앞에서 손을 흔드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고 내겐 이 말이 집밖을 나갈 때 마다 듣는 배웅인사이자 매일 아침 마음속에 녹아드는 비타민 한 알이었다.
“예,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내 대답은 항상 이랬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고. 거실의 큰 창문 앞에 서면 낮은 주택으로 가득한 마을의 초입부터 공원 입구 까지 모두 다 볼 수 있었다. 엄마는 항상 내가 집 앞 공터를 지나 공원 입구로 들어갈 때 까지 창문 앞에서 내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셨고 내가 뒤로 돌아볼 때마다 손을 흔들어주셨다. 도대체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건지 어린 나는 알고 있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매번 그렇게 엄마를 안심시키고 뒤로 가면서 거실의 큰 창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면서 갔다. 나는 말 잘 듣는 아들이었고 그 사실은 어린 시절 날 뿌듯하게 만들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다. 독립한다는 것에 매우 많은 매력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때 난 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걸까? 나를 괴롭혔던 것은 공부도, 운동도 아니었다.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구심점이 잡혀있지 않았던 나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 나만의 틀에 세상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땐 나에게 맞춰 돌아가던 세상이 어느 순간부터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난 당황했다. 만약 이게 사춘기의 특징이라면, 그때의 나는 사춘기를 겪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난 그걸 이겨내기 위해 늘 싸웠다. 스스로에게 여유를 가져야한다고 말을 해줄 여유조차도 없었다. ‘힘이 들 때 누군가에게 마음을 터놓고 서로 의지하고 그렇게 얻은 마음의 안정을 통해서 사춘기 시절을 극복해야한다’라는 말은 주위에서 많이 해줬지만 내게 그럴 수 없는 이유들이 있었다. 내 입장에서 보기에 나를 괴롭히던 건 스스로의 생각이 아니고 외부적인 요인들이었다. 성적을 잘 받거나 대회에 나가서 좋은 성적을 나가게 되면 주위에 시기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또 난 혼자서 그 성적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배로 노력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들과 타협을 할 수도 없는 고등학생이었다. 또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마음을 터놓고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들이 되기는 했지만, 처음 일 년이 넘게는 어떤 친구에게도 완전히 경계심을 풀고 마음을 놓을 수 없던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부모님? 주말마다 집에 가기는 했지만 늘 숙제를 한답시고 방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고, 가끔 학교에서 하는 부모님과의 통화는 늘 형식적이었다. “밥 먹었니?”하고 물으시면 “네 먹었어요.”라고 대답하고. “공부 열심히 하지?”라고 물어보시면 “네 열심히 해요.”라고 대답했다. 그럼 어머니는 믿는다고 하셨다, 나를. 그때도 일요일 오후 학교에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는 나를 보고 배웅 해주시던 엄마는 “넌 다른 아이들과 달라. 넌 특별해. 이번 한주도 파이팅!”을 해주셨다. 어느새 12년의 시간동안 퇴적 되어 버린 그 말들을 담을만한 남은 공간이 내 마음에 없어서였을까?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해주는 엄마의 얼굴을 창문 밖으로 보고 편히 웃을 수 없던 나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예”
의미를 잃긴 했지만 내 대답은 항상 같았고, 여전히 나는 말 잘 듣는 아들이었다.
내부적인 뒤틀림에서 시작한 내 사춘기 증세는 점점 외부적으로까지 표출되기 시작했다. 마음이 맞지 않는 친구들과 종종 시비를 붙었고, 선생님께 대드는 자잘한 사고들이 늘어났다. 분명히 큰 사고들은 아니었다. 선생님께 불려가 몇 번 혼난 적이 다고 커다란 벌조차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사고들이 한 두 번씩 일어날 때 마다 난 내 스스로에게 실망했고 그런 내 모습들이 누군가에게 퍼져나갈 까 봐 절망했다. 혼자서 괴로워했다. 이제 와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내가 가장 두려웠던 건 친구에게 욕을 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보다도, 떨어지는 성적을 보는 것보다도 내 주위 사람들이 내게 가지고 있던 그 기대감, 믿음을 저버리는 게 가장 두려웠다. 내 불안감이 커질수록 주위 사람들이 내 상상 속에서 나에게 거는 기대감은 커져만 갔고 난 더욱 더 절망하고 있었다. 내가 절망하고 있다는 지표는 어디서든 날아왔다.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 엄마의 귀에는 자연스레 학교에서 수업을 잘 듣지 않는 다는지, 어떤 친구와 싸웠다는 지 등의 이야기가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이야기를 했다. ‘어떤 친구가 나에게 시비를 거는데 참다가 그냥 말싸움으로 끝났다고도 하고, 선생님이 괜히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을 잡아 혼나게 된 것이다’라고 엄마의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합리화를 시켰다. 물론 그 거짓말은 다 들키고 있었다. 엄마는 모든 걸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 무렵부터 엄마의 래퍼토리에 한 가지 말이 더 들어오게 되었다.
“지훈아. 네 하루에는 엄마의 십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엄마는 이 말로 나에게 어떤 말들을 하고 있으셨던 걸까? 자신에게 힘든 하루를 모두 털어 놓으라는 말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말 그대로 당신이 날 아낀다는 말씀을 하고 있으셨을 수도 있다. 처음 이 말을 들었던 순간 난 정신이 몽롱했다. 마치 난해한 단어로 써져있는 시를 읽은 듯 어려웠다 그 말이. 그 때 왜 그 말의 뜻을 찾으려고 조금이라도 더 노력하지 않았을까? 의미를 모르는 말을 계속 듣게 되면 그것은 계속 그렇게 아무 의미도 없이 남아 희미해지게 된다. 그때의 난 조금의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었을까? 엄마는 가끔 혼자서 눈물을 흘리셨다. 절대로 내 앞에서는 울지 않으셨다. 하지만 난 하루가 갈수록 어머니의 래퍼토리의 그 말들을 하실 때마다 떨려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알 수 있었다. 나에게 부담을 주시지도 않았고 날 탓하시지도 않았다 한번도. 날 믿으셨던 걸까?
그 날의 공기는 달랐다. 여느 방학의 오전과 크게 다를바 없이 난 내 방에서 자고 씻고 나와 아침을 먹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황사 농도가 짙다는 말을 듣고 방의 창문을 닫아 놓으니 환기를 못한 탓인지 내 방에도 매캐한 냄새가 났다. 난 역시나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표고 뭔가를 찾고 있었다. 엄마가 간식을 가져다 주셨는데도 나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계속 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가 너무 아파 잠시 일어나서 기지개를 펴는데 간식이 놓인 책상 밑에 전에 없던 뭔가가 꽂혀 있는걸 보았다. 신문에 나온 입시 정보인가 보다 하고 무심하게 눈길을 돌리려는 순간 스크랩 밑에 자필로 써놓은 메시지가 보였다.
네 하루에는 엄마의 십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선을 천천히 위로 옮겼다. 시였다. 첫 마디를 읽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들아.
신문에 실린 한편의 시를 통해 엄마는 나에게 편지를 쓰셨고 그 편지로 나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처음엔 핑 돌았던 눈물이 어느새 황망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속을 썩였을까. 그제야 나의 하루에 엄마의 십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말을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는 평생을 나에게 쏟아 부으셨는데, 그런 나의 하루가 잘못되게 되면 당신 일생의 전부가 잘못되는 거라는 말을 늘 해주고 있으신 거였다. 그 날 난 하루 종일 울었다. 방에서 우는 내 소리를 듣고 필시 엄마도 눈물을 흘리셨으리.
“죄송해요. 잘할게요.”라는 말이 다였다, 아쉽게도. 평생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내 입에서는 안타깝게도 이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엄마는 깊게 생긋 웃어주셨고 미안하다는 말로 끝나버린 실망적인 내 답장도 그걸로 온전하게 되었다. 선물을 받은 후 난 일 년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책상 속에 꽃혀있던 그 시를 다시 한 번 도 읽은 적이 없었다. ‘아들아’, ‘너와 나 사이의 강’, ‘부를 때마다 간절해진다.’는 말들을 제외하곤 내용도 기억나지 않았다. 읽을 자신이 없었다. 언제 다시 눈물이 흐를지 알지 못했고 주체를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 시는 평생이 가도 간직할 보물 1호로 남겨지게 되었고, 언제나 힘들고 약한 생각이 들 때면 그 시를 되새기곤 한다.
5월 8일 나에겐 21주년 어버이날이 온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너무 늦어버려 마지막으로 남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책방에 쌓여있는 책 더미를 뒤적이다 찾은 책 <어느 날 엄마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의 이충걸 씨가 그랬듯이, 매우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엄마에 대해 쓰기 시작해보려고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얗게 세운 그 이야기들에 대해...
엄마의 언어가 오롯이 녹아있는 시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겠다.
아들에게
문정희. 시인, 1947~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땐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2012. 05. 01
지훈이가
객원 필진 소개: 이지훈 (JiHoon Lee)
이 글을 쓰신 이지훈 씨는 2010년 UC 버클리 수학 과정으로 입학하셨고 현재는 휴학하신 채 대한민국에서 국방의 의미를 다 하시는 중입니다. 군 복무 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셔서 글을 쓰고 계시며, 이지훈 씨의 글들은 본인의 블로그 Bucket List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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