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y say nothing lasts forever; dreams change, trends come and go, but friendships never go out of style”. – Carrie Bradsh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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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까닭은, 이 드라마가 더욱 환상적인 이유는 어떤 상황의 변화에도, 그녀들의 처지가 어떻게 달라져도 아랑곳 않는 “여자들만의 우정”을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서른다섯 이상의, 이름 앞에 Mrs.가 붙고 제2의 인생을 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 네 명의 여자들은 매주 토요일 Sarabeth’s에 모여 그 주에 지나쳤던, 혹은 시작되고 있는 남자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때로는 너무나 노골적이고 솔직해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녀들의 우정은 유부녀가 되어서도,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서도, 뉴욕의 반대편으로 이주를 해서도 변함이 없다. 그렇다. 이 드라마의 수많은 팬들의, 즉 여성들의, 판타지는 미스터 빅과 결혼한, 못생겼는데 매력적으로 보이는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쇼퍼홀릭에, 왜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냐며 친구에게 힐문하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들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씨 좋은 친구들과 영원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캐리 브래드쇼이다. 사랑도 변하는 시대에, 통상적으로 변덕스럽다는 여자들의 우정이 영원토록 지속된다는 것, 이것이 드라마 밖에서도 과연 가능할까?
유학생활 중인 필자가 서울을 떠나오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 중 하나가 친구들과 소원해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내 뒤를 봐주시고 지원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완전하게 타인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 바로 ‘친구들’인데 진실로 우리의 관계가 변치 않을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마음 속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의심은 일정 부분 진실이 되었다. 필자가 보지 못한 친구들의 변화, 반대로 그 친구들이 놓친 필자의 변화. 필자는 더 이상 그 친구들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필자의 고민을 이해해줄 수 있는 새로운 친구들과 더 가까워졌으며, 오랜 시간 소원하게 지냈던 친구들이라 해도 지금의 필자를 이해해준다면, 이기적이게도, 그들과 다시 급속도로 각별해지곤 했다. 이렇게 관계의 블록은 끊임없이 변해왔다. 지금 이 순간 분하게도 필자가 남자들이 보는 여자들의 우정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은 common interest 없이는 그 지속성이 한없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관계의 축은 이해 받고, 아니 이해 받는다는 착각을 기본으로 해서 자신이 상대방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유지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理解는 利害關係(common interest)없이는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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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Sex and the City에서 보여지는 우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네 여성들의 우정에는 같은 환경에 살고 있다는 전제조건이 붙어있다. 옛말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어떤 류의 비슷함이 우정의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필요조건으로서는 작용할 수 있다. 뉴욕에 살고 있으며 직장에서 성공했지만 혼기를 놓친 네 명의 여자들. 이들의 환경과 사회적 조건은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정확하게 일치한다. 필자의 경우에도 비슷한 환경과 취향, 성장 배경 등을 공유하고 있다면, 적어도 여자의 경우에는, 친구되기가 상대적으로 참 쉽다는 생각을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네들의 비슷한 속성, 다시 말해 동질감은 그들의 소통을 보다 더 원만하게 도와주는 윤활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는 여고시절이라는 흔한 경구가 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여자들이 고교시절 친구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다. 해 뜨기 전에 등교하여 해질녘 함께 석식까지 먹고 야간자율학습까지, 하루의 반나절 이상을 함께 보내는 생활 속에서 고교시절의 우정은 필연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대학입시라는 공통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대한민국 수험생이라는 주홍글씨와도 같은 공통의 딱지를 붙인 채, 한 달에 한번씩 모의수능이라는 전쟁터에 나가는 여고생들. 함께 싸우고 독려해주는 그들은 현대판 전우이다. 십 년 동안 이렇게 함께, 때로는 무지막지하도록 처참하게 다가왔던 전투를 여러 번 같이 치루고 나서야 필자는 상대방들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이해 받고 아낌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스무 살이 지나고 바야흐로 이십 대 중반을 목전에 둔 지금, 친구들과 필자는 각기 생존경쟁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우리 삶은 한바탕 전투와 다를 바가 없기에, 아귀다툼을 벌이며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이 순간, 옆에 없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서로에 대해 이해해왔던 모든 것들을 공중분해 시켜버릴 지도 모른다는 원초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필자는 그녀들과 함께 먹고 자는 등 기본적인 생리활동을 오랜 시간 함께 해왔고 그녀들의 생활습관, 버릇, 말할 수 없는 비밀, 수치스러운 기억까지도 전부 공유했었고, 공유 했었다 라는 사실은 여전히 변치 않고 있다. 이토록 뜨겁고 내밀하게 서로 사랑하듯 “우정 했었는데” 왜 우리는 드라마 속 그녀들처럼 우정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상대방과의 물리적인 환경이 달라지면서 겪게 된 달갑지 않은 변화들이 억울하여 필자는 계속 해서 유학생의 인간관계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유학생들의 교우관계는 유학생이라는 한정된 풀에 갇혀있다. 이 풀에서 좁고도 넓은 유학생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사회는 한국의 대학생 사회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한정된 만큼 상이성 역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필자의 경우엔 이 제한된 상이성이 인간관계를 쌓아가는데 굉장히 편리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어딘가 답답한 교우관계를 우리에게 종용하는 좁고 닫힌 사회. 그러나 이와 동시에 (최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유학생의 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소수라는 인식은 필자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현재의 교우관계에 아주 큰 의미를 부여하게 하고 있는 듯하다. 아주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말한다면,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아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이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보다 더 살얼음판 같아질 수밖에 없다. 남녀관계에서처럼 교우관계에서도 무심히 지나치다 생긴 균열은 파열이 되어버리고,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다. 남녀관계의 사랑처럼 한번 식어버린 애정은 복구되기 힘들다. 필자는 이런 식으로 유학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잃게 되었는지, 얼마나 자주 상처받고 상처를 주었는지 기억할 수 조차 없다.
그러나 이 좁은 사회에서 우리는 전우다. 우리는 모두 버클리맨이다. 우리 모두 한번쯤은 가보았을 어느 강의실에서 정의란 무엇인지, 또는 왜 대공황이 찾아왔는지 와도 같은 말도 안되게 형이상학적이며 난해한 것들을 함께 배운다. 그러나 유학생으로서, 아니 유학생이기에 얻을 수 있었던, 필자에게 가장 큰 재산은 마르크스라면 버핏 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이러한 질문들을 함께 사유하고 답을 하며 서로의 가치관을 알아가고, 때문에 서로의 가치관 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는 전우들을 한 명, 두 명 얻는다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다. 새벽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더러는 새벽까지 야식만 먹다가 마는 경우도 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누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비밀스러운가. 공유된 비밀들과 비밀을 공유하며 서로의 비슷한 경험에 놀라고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신비에 가깝다. 드라마를 본 여자들이라면 모두가 기억할, 불임판정을 받은 샬롯과 그 뒤를 묵묵히 뒤따라 걸어주던 미란다의 우정 역시 오랜 시간 축적된, 서로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된 신뢰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 나의 뒤를 내 친구가 지켜주리라는 오류에 가까운 믿음은 그 친구들의 아주 사소한 식습관과 생활패턴, 말버릇(또는 술버릇, 심지어 잠버릇까지)을 알아가며 서로의 이해를 아주 당연시하게 되는 데서 시작한다. 고찰해보면 이보다 더 부담스럽고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는 것은 사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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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필자는 며칠 전 남성인 친구에게 여자들의 우정이 지니고 있는 그 가냘픈 지속성에 대해 지적 받으면서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생각에 반박을 하기 시작하는 여러 웃는 얼굴들이 떠올랐고 그날밤 그네들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글 역시 그 메일들에서 비롯한 아주 사적인 글이다. 여자들의 우정은 비밀을 털어놓는 데서 시작한다. 그 비밀을 털어놓는 대상을 우리는 이성적으로 정해왔는가? 아니다. 언어로써는 설명이 불가능한 모종의 끌림이 있었고,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우정을 나눌 대상을 고르지 않고 빠져온 것이리라. 이러한 감정은 사랑이 그렇듯이 이성적으로 분석될 수는 있다. 여자들의 우정은 비이성적이며 종이 한 장보다 가벼울 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어느 갱스터무비에 나오는 피 비린내 나는 우정보다 단단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바이다. 신뢰는 무언의 의지이며 상대방을 소중히 하는 감정이다. 어느 맑은 날, 교정을 함께 거닐며 내 옆에 늘 있어주던 그녀들. 어느 슬픈 날, 필자에게 온몸으로 기대던 그녀들. 그 순간 느낀 동질감과 감정이입, 그렇게 쌓인 신뢰라는 훌륭한 감정에게 박수를 보내며, 필자는 오늘도 하루빨리 친구들에게 돌아갈 날과 친구들이 필자에게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사진: cafe.daum.net/hollywoodcou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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