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모든 이들에게 고함

Posted by 초유니
2013. 10. 6. 21:05 EDITORIAL/문예 :: Literature

부서진 모든 이들에게 고함


여기, 슬프다는 말로 시작되는 시가 있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그리고 그 긴 시의 끝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청춘이라 불리는 화려한 극장에 설레이며 입장한 지 반십년 쯤 지나고서야 깨달은 건 그거다.
아, 이제 내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고장난 이들이겠구나. 마음 한 쪽이 들리지 않는다던가, 그 시야가 많이 흐릿하다던가, 한 구석이 조금 어긋났다던가, 혹은 마비가 와 자유로이 옮겨다니기가 불편하다던가... 새삼스러울 건 없는 일이다. 보통의 존재로 태어난 신생아의 평균 신장은 약 오십 센티미터가량 되고, 대한민국 남녀의 평균 키 수치는 백육십몇 센티미터정도 된다. 태어나 일 미터도 넘게 성장하던 그 긴 시간동안 늘어나거나 찢어지지 않은 채 온전히 동그란 마음을 갖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쯤이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딪히고 수많은 말들에 물어뜯겨 많이 지쳐버린 모양새를 하고 있어야 정상이다. 험악한 모서리 투성이인 대신 네모반듯하게 밸런스나 잘 맞으면 다행인 일이고.
정말 그렇다. 아픈 마음을 위한 온갖 신경정신학적 이름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붙여지는 요즘 사회에서 꿋꿋하게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기란 사막에서 장미 찾는 정도의 확률을 요구한달까.


왜 이렇게 우리 청춘들의 마음이 예쁠 수가 없다고 강조하려 하느냐 물으신다면, 나 또한 그 부서진 이의 뒷모습에 손을 얹어본 일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이 시의 화자는 부서뜨린 사람이지 부서진 사람은 아니다. 그는 심지어 한번도 누구를 위해 누구를 사랑해 본 일 없음을 고백하며,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이라는 도덕심의 경쟁에 뛰어들었음을 후회하며 자기 연민에 젖은 채 시를 마친다.
이 한국형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분명 매력적이지만, 나는 그에게 무례하게도 이 시를 접할 때마다 그 부서진 채 떠났다는 이의 뒷모습에만 눈길이 간다. 반복되었을 지겨움에 한 쪽이 기울어진 그 절망감을, 지키고자했던 높이만큼 세게 부는 허망함에 흩날리는 자존심을, 뒤통수를 맞고 비틀대어 어딜 향하는 건지 물음조차 던지지 못할 그 가라앉음을 떠올린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슬프다고 읊조리는 나쁜 화자의 후회섞인 자조가 거울마냥 그에게서 떠나가는 이의 망가진 뒷모습을 비추어 선명한 여운을 남긴다는 사실이.
또 궁금하지 않은가. 그 부서진 이는 또 어느 신전을 향해 느릿이 느릿이 나아갔을까.



어쩌면 그 먼지투성이 뒷모습은 나 스스로의 모습일수도, 정말 나에게 왔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일수도, 혹은 내가 아직 만나지조차 못한 모든 사람들의 모습일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부딪히고 긁히고 상처났던 못난 마음을 품고서도 내 앞모습이 온전해 보이기를 원하고 더 예쁜 마음을 찾아 나서는 이가 비단 나 하나만은 아님을 안다. 나는, 혹은 우리는, 아직 많이 외롭고 서투르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부끄러울 일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어했던 어느 유명한 작가의 믿음처럼 우리는 인생 하나를 통째로 미래를 위한 리허설만 하다가 본 공연은 시작도 못 한 채 날려버릴 수도 있겠지만, 뭐 어떤가. 내일의 나는 내가 처음 겪는 새로운 경험일 것이고, 모든 처음은 혼란스럽고 실수투성이여야 그 이름값을 치르는 법이니. 어찌되었건 해 봐야지. 커튼은 8시가 되면 늘 그 막을 올리니까. 그리고 해 봐야 한다. 관객들 중 어떤 사람이 내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있는건지는 공연이 끝나고 난 후에야 알 수 있을 테니.


하여 지나간 사람에 부딪혀 부서진 모든 이들에게 고한다. 우리는 모두 포유류가 아니라 달걀임을. 알은 깨어져야만 새 생명이 되고, 누군가의 아침 식사가 되고, 콜럼버스의 철학이 된다. 누군가는 달걀을 바라보며 샛노란 병아리의 삐약임을 들을 테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새로운 도전을 위한 생각에 나침반을 꺼내 들 지도 모를 일이다ㅡ 그리고는 그 나침반으로 계란 끝을 조금 부서뜨려 테이블 위에 세워보이겠지.
허나 
사람들이 당신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 기대한다 하여서 지레 겁먹지 말자
깨지기 전까지의 달걀은 그저 하나의 동그라미일 뿐이며, 그 끝부터 조각조각 깨어짐이 시작되어야 비로소 품고 있던 무언가가 첫 숨을 들이킬 수 있게 됨이


그러므로 당신은 망가지지 않았다
. 지금의 당신이 부서짐조차도 온전함을 위한 준비과정임을 이해했길 나는 간절히 바란다. 깨어진 당신의 어깨 끝이 부끄러울지라도, 작아진 당신의 정수리가 무겁게 목을 내려누를지라도 고개를 들고 새로운 눈 한 쌍을 찾아 씩씩하게 걸어가길 나는 의심없이 권한다.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의 앞 모습을 비춰주고, 당신의 마음에 꼭 들어맞는 그런 틀을 가진 사람을 찾아가길. 그리고는 그 사람과 눈을 ㅡ 눈의 모양을 한 마음을ㅡ 맞추는거다. 입맞춤보다 더 떨리는 환희를 기대해도 좋다. 어쩌면 내게서 떨어져 나간 마음의 조각들이 헨젤과 그레텔의 쿠키조각이 되어 상대방에게로 나를 이끌었다는 확신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다. ‘떠나간 그 사람이 되어 자괴감 속에 부유하기에는 절뚝이는 당신의 앞모습마저 너무 화사함을 깨닫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부서진 당신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접착기제는 감정에의 홍수도, 어설픈 부정과 외면도 아니다. 그저 당신과 깨어짐마저 닮아있는 또 달리 부서진 타인일 뿐이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도,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고도 말하지 말라.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길 바란다. 그리고 기뻐하라. 당신은 부서짐으로써 더 완전한 당신에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사진출처: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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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ickmin
    • 2013.10.06 21:23
    진짜 좋다...
    • name
    • 2017.11.11 04:09
    대학 첫 학기때 나는 이 글이 막연히 좋았는데 이제 벌써 온전하게 이해하고 공감까지 하는 나이가 됐네요 갑자기 이 글이 생각나 읽으려고 일부러 버콥 사이트를 방문했어요 언니 잘 지내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