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Posted by 희씨
2019.04.01 17:21 EDITORIAL/문예 :: Literature


내 귀를 휘감는 경쾌하고 발랄한 재즈 음악,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쉬지 않고 커피를 뽑아내는 커피 기계들, 커피 한 잔씩을 붙잡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 나는 카페 블루 도어에 앉아있다. 캠퍼스 남단에 있는 작은 카페, 과제든 시험공부든 무언가에 집중해야 할 때 자주 오는 곳이다. 

내 앞에는 커피 한 잔과 샐러드 한 접시가 놓여있다. 올 때마다 항상 시키는 것들. 커피는 가장 저렴한 하우스 커피, 샐러드는 시저 샐러드여야 한다. 오늘은 오랜만에 차가운 커피를 시켜봤다. 내가 차가운 커피를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뜨거운 걸 잘 못 먹기 때문. 음식이든 음료든 뜨거운 걸 시키면 다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고충이 있다. 나 혼자일 때는 상관없지만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는 내 커피를 호호 불고 식기를 기다리면서 상대방이 음료를 마시는 것을 멀뚱멀뚱 지켜봐야 한다. 내가 비로소 먹기 시작할 때면 상대방의 음료는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아 있다. 

오늘은 혼자 왔는데도 차가운 커피를 시켰다, 날씨가 많이 풀렸기 때문. 날씨가 쌀쌀하다 싶으면 따뜻한 커피를 시킨다, 쌀쌀함의 기준은 옷을 두세겹 입어도 바람이 내 옷을 뚫고 살을 찌르는지. 웃기게도 차가운 커피를 시킨 걸 많이 후회 중이다. 나온 지 10분 만에 다 마셔버린지라 빈 잔만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다. 10분이 걸린 것도 반 정도를 나온 지 1분 만에 다 마셔버리고 내 속도에 내가 놀라 속도를 많이 늦춰서 나머지 반을 9분에 걸쳐 마신 덕분이다. 뜨거운 커피를 시켰으면 식을 때까지 기다리느라 훨씬 오래 걸려 마셨겠지. 

커피를 어렸을때부터 좋아했다,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 나는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4년 중 2년을 서울 동부 소재의 작은 외국인 학교에서 보냈는데 학교 규모가 워낙 작아서 제대로 된 체육관이 없었다. 그래서 운동부 연습과 경기들을 진행하기 위해서 근처의 체육관을 빌렸었는데 체육관 바로 앞에 마침 작은 카페가 있었고 그 카페는 내 단골 카페가 되었다. 배구 연습이나 경기가 있는 날에는 항상 그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 먹었다. 연습이 아니라 경기가 있는 날에는 경기가 주는 긴장감에 카페인의 효과가 더해져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게 느껴지기도 했다. 

커피를 마시면 아직도 고등학교 운동부 시절이 종종 생각이 나곤 한다. 제대로 된 체육관 조차 없었던 작은 학교였지만 오히려 작은 규모와 적은 학생 인원 덕분에 기회는 더 많았다. 내가 더 큰 학교에 다녔더라면 내가 원하던대로 배구도 하고 농구도 하지 못했을 거다. 맨날 벤치에만 앉아있거나 아예 팀에 들어가지를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겠지. 

맨날 지기만 하던 우리 배구팀이 최종 대회에서 결승전에 올라간 그 날은 절대 잊지 못한다. 더군다나 결승전에서는 2:0으로 지던 상황에서 두 세트를 연달아 이겨 마지막 세트까지 갔다. 마지막 세트는 정말 매초가 긴장감이 넘쳤고 동점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이날엔 분명히 커피를 안 마셨는데 심장은 커피를 10잔을 마신 것처럼 빨리 뛰었다. 관중석의 침묵이 내 심장 소리를 더더욱 크게 들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경기는 패배로 끝났고 커피보다 10배 이상 씁쓸했던 패배로 지금까지 나의 기억에 남아있다. 씁쓸한 패배, 씁쓸한 기억, 나는 커피만큼 씁쓸한 이 기억을 정말 좋아한다.

우리 엄마가 내가 커피를 마신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셨을 때의 반응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나는 혼을 내실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벌써부터 커피를 마시느냐고. 정작 돌아온 반응은 놀라움, 그뿐이었다. 나도 커피를 좋아하는지 몰랐다고, 앞으로는 집에서 같이 마시자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그날부로 나는 매일 아침 우리 집을 메우던 커피 냄새의 일부가 되었다. 

그렇게 부모님의 아침 잡담 시간은 온 가족 커피 타임으로 진화하게 되었고 지금도 집에 가면 늘 그랬듯이 아침은 식탁에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놓고 온 가족이 마주 보고 앉아서 시작한다. 

내가 성인이 되면서 생긴 “와인 타임”이라는 라이벌과 함께 “커피 타임”은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하시는 시간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내가 평소에 말이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다 보니 이 시간이 내 소식을 듣는 시간이 되었다고 할까? 커피를 마시면서 마주 보고 앉으면 무슨 말이든 말을 하게 되어있다. 사실 요즘은 “와인 타임”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다, 내가 술에 취하면 말이 더 많아지니까. 그래도 오리지널인 “커피 타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커피를 마시면서 앉아있다보면 대화를 하게 되어있는데 반대로 대화를 해야겠는데 그냥 얘기하자고 하기는 모호할 때 커피를 마시자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에게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오해인 건지 뭔지 서로 아무것도 약속한 게 없는 사이인데 연락을 독촉하기 시작했다. 클럽에서 처음 만나서 그냥 몇 번 밥 먹고 얼굴 본 사이, 갑자기 약속한 적이 없는 것을 요구해온 그녀에게 화부터 났지만 얘기를 하면서 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뜨거운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우리 그냥 그런 사이라고, 물 흘러가듯이 가는 즉흥적인 그런 사이, 그리고 나는 무언가를 약속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함에 커피를 쭉 들이켰다. 커피는 항상 좋은데 커피를 마시는 건 항상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날 밤 그녀와 횟집에서 소주를 한잔했다. 아니 한 잔이 아니라 한 병, 아니 여러 병 했다. 네 병까지 기억이 난다. 철이라던 대방어 회의 맛이 그렇게 끝내줬다. 미국에서 많이 못 먹는 해산물, 많이 먹어두기로 했는데 정말 많이 먹었다. 

눈을 떠 보니 그녀의 방, 띵한 머리,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희미한 빛. 시간을 확인하고 그녀를 깨워 출근시켰다. 연락하라는 소리와 함께 택시의 문이 닫혔다. 그날 이후 연락은 많이 줄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 처음은 아니었다. 역마살이 낀 건지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무른 적이 없었고 우정도 사랑도 많이 떠나보냈다.

떠나가는 택시를 보면서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갑작스런 미국행 이후 2년 동안 내 절친이 되어줬던 스타벅스. 힘든 적응 기간과 어려운 학교 공부, 스타벅스가 없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거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가게를 나섰다. 클랙슨을 울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차들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커피 한 모금, 담배 한 모금.

씁쓸한 게 참 맛있다. 

커피는 참 신기한 음료다. 내가 이걸 왜 마실까 생각하면서도 계속 마시게 된다. 커피의 시큼하고 씁쓸한 맛이 참 좋다. 삼키고 나서도 입 안에 남아있는 그 씁쓸함이 참 좋다. 커피 한 모금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면 동시에 기억 한 조각이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간다. 술이 후회를 남기고 담배가 냄새를 남긴다면 커피는 기억을 남긴다. 

미래의 나는 커피를 마시며 오늘을 기억할까?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카페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왔을때는 텅텅 비어있었는데… 내 손가락 끝은 아직도 텅 빈 커피 잔을 음악에 맞춰 두드리고 있다. 

작게 한숨을 쉬고 결국 일어서는 나,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One house coffee please, large s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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