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서리

Posted by 희씨
2019.04.15 14:41 EDITORIAL/문예 :: Literature





저녁시간 돌아오면 꺼져있던 집안의 조명을 스스로 켜야 하기 시작했을 나이부터 나는 마트에서 팔짱을 끼고 걸어 다니는 연인이라던가 이것저것 사고 싶다 조르는 아이와 귀찮다는 얼굴을 한 아이의 엄마라던가 하는 것에서 풍기던 가정의 온기를 좋아하게 되었었다. 서로 다른 모양과 색을 가진 간장들 중 무엇을 사야 하는지 같은 그다지 이해가 가지 않는 고민을 하고 있는 어머니라던가 여자사람친구를 뒤로하고 몰래 여섯 개씩 묶여있는 검은 기네스 캔 들을 들고 와 카트에 넣을 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상대방의 눈빛 같은 것이 재미있고 좋았던 기억에 사실 별다른 이유가 없을 때에도 기분 전환 겸 마트 같은 곳을 들르고는 했었고, 오랜만의 나온 해외였던 삿포로에서 나는 비슷한 이유로 도심에 있던 한 지하상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지갑을 열기 위해 설계된 건물의 유려한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전자기기 매장에서 기분 좋게 손안에 들어오던 값비싼 일제 카메라 같은 것을 구경하던 내 시야 한편으로 커다란 TV 화면이 들어왔다. 깨끗하고 매끈한 화면 속 태평양 안에서 떼지어 움직이는 이름 모를, 빛나는 비늘을 가진 작은 물고기들이 보였고, 언젠가 본 다큐멘터리에서 바다 물고기가 떼지어 다니는 이유는 본능적으로 가장 안전한 무리의 가운데로 파고들어가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기억나 결국 사람이란 것과 크게 다를 게 없구나 생각했다. 생각한 것을 말에서 거르지 못하던 나이일 때는 왜 너는 그런 재미없는 생각만 하고 사느냐 누군가가 내게 묻기도 했었다 (너도 그렇게 웃기지는 않은데, 그렇게 대답했어야 했는데). 하늘색 와이셔츠를 입은 직원이 친절한 얼굴로 무언가를 내게 물었고, 도와줄 것이 있느냐는 질문이겠구나 싶어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나는 오고 가는 수줍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성격이란 타고나는 건지 내 십대 시절의 영웅들은 당당한 카뮈가 아닌 샐린저 같은 어떠한 장막 뒤에서 싸움을 이어가는 수줍은 영웅들이었고, 어쩌다가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기타 치는 것을 가르쳐 달라던가 같이 커피를 마시러 가자든가 하는 일이 생기면 당연히 좋으면서도 수줍음에 곤란한 표정을 지어버리고는 하던 그런 멋없는 남학생이었었다. 그래도 책 읽는 것 음악 듣는 것을 참 좋아해 매일같이 방안에 틀어박혀 세상의 또 다른 모퉁이 어디에선가 쓰인 글귀 같은 것들에 푹 빠져있을 때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던 친구들과 어울리며 또 그 나름의 탈선이 있기도 했었는데, 그 작은 웅덩이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탓인지 세상이란 곳에 처음 나와서 느낀 대단한 괴리감에 많이 움츠러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때문인지 항상 낯선 여행지에서의 그 느낌은 그렇게 새롭지 않은 것으로 느껴졌다.


 

 


건물을 나섰을 때 마주한 한 여름 삿포로의 밤거리는 대단히 화려하지도, 황량하지도 않은 평범한 일본의 여느 도시라는 인상을 주었다. 한창 취기가 오른 회사원 둘이 어깨동무를 한 채 횡단보도를 건너고, 원피스에 가죽 재킷을 걸친 내 또래의 여자가 가로등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고, 노부부가 손을 잡은 채 조용히 식당을 나서고 하는 식이다. 항상 일본은 재즈와 잘 어울린다고 느꼈었다. 일면식 없는 누군가 외롭다거나 힘들다고 말하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의 부담감을 느끼기 마련인데 재즈는 외로우니 가만히 놔둬달라는 그런 일말의 당당함이 느껴져서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다. 그런 부분이 아무래도 개인의 형편이나 취향에 따라 허례의식 없이 살아가는 일본식 개인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고, 어찌 되었던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별다른 생각 없이 둥둥 떠다니기에 참 편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나라는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싶었을 뿐이었으나 그것이 그렇게도 어려웠다는 헤세의 말이 떠올랐다. 아마 독일 사람들은 이곳에 비해 오지랖이 넓은 편인가 보다 싶었다. 뭐 결국에는 이곳에 연고라고는 없는 외부인의 독단적인 해석일 뿐이다. 


횡단보도에서 내 앞을 지나친 버스의 유리창에 내 전신이 비쳤다. 좋게 표현해봐야 서툴고, 집착 있고, 딱히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항상 내게 손을 내밀어 주던 사람들은 내 인생의 다른 부분들에서 항상 존재했던 것 같다. 그들은 때로는 잔뜩 허세를 부리며 양주 냄새와 담배연기 자욱한 어두운 뒷골목 같은 음지로, 때로는 길가의 모두와 인사를 나누며 햇살이 잔뜩 내리쬐는 부유한 도심 같은 양지로 나를 이끌었으며, 나를 친구라고 불러주었고, 쓸쓸하게 길거리를 노닐던 내게 새로운 인연을 찾아주려 했었다. 그런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부단히 더 웃고 자주적으로 살아보려 노력했으나, 사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나의 본성이라는 것은 무리에서 이탈한 들짐승 같은 것 이어서 그 중심을 잡는다는 것에 다른 사람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살아왔지 싶다. 결국에는 처음 만난 이에게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 건네는 법을 배운 내가 대견하다가도, 내가 나를 숨겨야 할 필요성을 느낄수록 나는 점점 내가 희석되고 있다고 느낀 기억들 또한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구름 낀 하늘 아래 서울보다는 모노톤이고, 암스테르담보다는 다양한 색조의 이 거리는 하루키가 별이 달린 양을 찾아 헤매던 그 거리다. 삿포로 맥주의 별을 단 커다란 간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 디퓨저처럼 거리에 분산된 빛을 희미하게 내리쬐고 있다. 누군가와 대화할 일이 없어 페르소나를 상실해버린 이 이국에서의 밤은 약간의 비현실성을 가지고 있는데, 신기하게 길동무가 생기는 날이면 이런 슬픈 비현실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아쉬움은 생겼던 것 같다. 펜과 종이 뒤로 숨지 않으면 사실 타인에게 비웃음을 주로 사는 이야기이다. 내게는 그 비웃음이 그렇게도 고통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휴대폰 액정 속의 지도를 보며 열심히 찾아온 작은 재즈 바의 문을 열고 반갑게 인사하는 가게의 직원에게 그보다 밝은 미소로 인사했다. 서비스직 일지 언정 그렇게 웃음이 멋진 사람을 마주한다는 일은 그 하루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힘이 있었고, 나는 기분 좋게 병맥주를 하나 주문하며 공연 중이던 밴드 앞에 조용히 앉았다. 노래 중이던 가수가 목례해주기에 또 참 친절한 사람들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웃으며 인사를 되받았다. 그렇게 맥주를 몇 모금 마시며 오랜만에 들었던 드럼 세션이 인상 깊었었다. 대단한 전문가는 되지 못하지만 나는 그렇듯 변칙적이지만 과하지 않은, 깨끗한 스네어 소리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게 가만히 나무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하늘에서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멍하니 노란 별이 그려진 맥주병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 빗소리에 놀라 그 옆 유리 밖에 비친 한밤중의 거리로 시선을 옮겼다. 하나둘씩 우산을 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 나라의 사람들이 보였고, 군무를 추는 물고기 떼 마냥 파란색, 빨간색 신호에 맞추어 움직이는 저들의 바다와, 담배연기 자욱하고 별다른 말이 없는 이 공간에서 한량 짓을 하고 있는 나의 바다는 극명한 온도차가 있어 보였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이 진동하며 아직 세상의 어딘가에는 나와 하얗고 얇은 실로 연결된 인연이 남아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외로웠다. 외로워서 제발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다. 바다의 모서리와 같은 이 공간에는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구나 하고, 그냥 그 순간에는 그렇게 느꼈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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