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홉 명, 1년을 쉼없이 달려왔다. 학업에 치이고 삶에 치이는 와중에도 쓰는 것이 좋고 읽는 것이 좋고, 나누는 것이 좋아 글이라는 테두리 안에 얼마나 많은 웃음과 대화가 오갔는지. 2018년 늦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을 무렵부터 2019년 여름의 초입이 성큼 고개 내밀어 인사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 서로를 바라보고 곱씹고 생각하며 꾹꾹 눌러 쓴 그대 이름 석 자에 투영된 이야기들.
원기, 소연, 범서, 경훈, 순형, 채리, 재성, 경민, 그리고 정윤을 위한 글.
(누가 쓴, 누구에 관한 글일지 알아맞혀보세요)
-1-
군대를 갓 전역해 까치머리가 아직 자라고 있을 때, 복학생이 되어서도 아직 친목 같은 것에 미련이 남아 들어온 이 동아리에서 어색하게 처음 S와 인사를 나눴었다. 파마기가 있는 긴 머리에, 눈이 굉장히 커서 소녀 같은 인상을 주었고, 그러다가 배경이 비슷한 사람 둘이 으레 그렇듯이 금세 서로 알고 지내는 친구가 있다, 누나의 남자친구를 예전에 어디선가 만난 기억이 있다, 라는 식의 접점을 찾으며 적어도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누나라는 인물은 ‘나는 이건 이렇게 할 거고, 저건 저렇게 할 거야’ 같은 자기 확신과 당당함이 있는 존재여서 항상 닮고 싶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또 행동반경 같은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은 건지 영 좋지 않은 기분에 딱 그런 표정으로 한국 유학생이 많지 않은 도서관을 저벅저벅 걸어 다니고 있을 때면 ‘야 안녕’ 이라며 S가 웃으면 건네던 인사 같은 것에 괜히 혼자 힘든 척을 한 기분이 들어 부끄러웠던 기억도 여러 있지 싶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그만큼 종이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내색하지 않는 이 인물의 상념 같은 것들. 그렇게 근성 없는 내가 먼저 집으로 향하며 ‘누나 고생해’ 라고 인사를 건네자 가방에 달린 검은 원숭이 인형이 좀 마음에 든다며 너스레를 떨며 다시 한번 다른 이의 삶을 조금 밝혀줬었다. 그렇게 조금은 밝아진 표정으로 집으로 향한 기억이 있다.
짧은 글에 어떻게 한 사람을 모두 담을 수 있겠냐 만은 S를 마주하면 왠지 친 누나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앞으로 어디에, 누구와 있던 항상 어딘가 기댈 곳이 존재하고, 소망하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작은 행복들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그런 삶을 지날 것이라 믿는다.
-2-
세련된 스타일에 아름다운 머릿결을 봤을 때는 도시적인 미인이 떠올랐었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으로만 봤을 때는 발랄하고 자유분방할 거 같은 선입견을 가지게 하곤 하는 너였던 것 같네. 막상 너와의 대화를 시작하면 느껴지는 그 순박한 털털함은 더욱 새로운 매력으로서 다가왔던 것 같네. 또한, 너의 글들은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고심을 하며 살아가는지를 느끼게 해주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자유로운 감성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네. 삶에서 짧을 수도 길수도 있는 일년이라는 시간이지만, 활발하지만 가볍지는 않은 너의 행동과 글들에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진보적인 버클리와 보수적인 한국사회를 다 품을 수 있는 너의 모습을 존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로를 하게 된다. 동전의 양면처럼 다른 사회를 겪으면서 개인이 느꼈을 혼란과 답답함은 누구도 똑같지 않기에 그 시간을 이겨내고 더 커지는 모습을 기대할 뿐이다. 앞으로 겪을 시간의 흐름 속에 진보와 보수 양측의 모습이 가지는 부족함이 점점 더 부각됨을 느끼는 시점을 사회에 대한 실망이 아닌 개인의 뿌리가 더 깊어지는 기회로서 받아들이기를 소원한다. 글속에서의 너를 보았을 때는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너라는 이의 모습을 드러내는 줄타기를 충분히 느끼기에 즐겁다. 다양성을 삶으로서 경험한 모습을 좋아하지만, 언젠가 보편적으로 살아갈 내공이 쌓인 삶도 충분히 기대할게.
-3-
그는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한송이의 꽃이 되었다.
자신을 짙은 향기로 포장하고 강렬할 색으로 표현하는 그런 꽃이 아닌 은은하지만 우아한, 꾸미지 않아도 향이 나는 그런 사람.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몸짓, 말투 한마디에 내 몸은 배배 꼬였고 그윽한 눈매에 첨벙 빠져버리고만 싶은 그런 마음, 당신은 내 마음을 알까. 그의 옆에 서있는 내 모습은 항상 물에 빠진 다람쥐마냥 초라해 보였다. 이것은 사랑이었다.
그의 한없이 순수한 웃음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고 그의 진부한 농담에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부진 체격과 각진 체형의 그는 모자를 쓴 모습이 참 잘 어울렸다. 그는 검은색을 참 많이 닮았다. 밝은 매력보다는 어두운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수많은 색깔들과 매력들이 한데 모여 까맣게 섞인 것 뿐일까? 아니면 그를 만날때마다 타들어가는 나의 그을린 마음의 색깔인지도 모르겠다. 그를 만날 때면 두근거리는 나의 심장 박동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리지 않을까 숨죽였고 나도 모르게 헤픈 웃음을 짓고 있지 않을까 걱정했다.
한사코 괜찮다고 말해도 밤에는 위험하다며 오늘도 집에 바래다 준 그와 함께 걷는 도중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집에 다와갈 무렵 그는 오늘도 나에게 덤덤하게 이렇게 말했다.
“잘자”
-4-
운이 좋지 못하다고 느낀 날이었다. 돌이켜 보면 K를 만날 때의 나는 항상 내 얘기만 하기 바빴기에 오늘 그를 만났을 때에는 꼭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줘야지,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어떤 사람인지 묻고 와야지, 하고 다짐한 상태였던 나는 하필 그 날이 새벽까지 나의 연인과 헤어지네 마네, 눈물과 한숨으로 새벽을 채웠던 날임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K를 만나기 30분 전까지만해도 굵은 눈물을 뚝, 뚝 쏟아내고 있던 나였으니 그를 만났을 때의 내 꼴이 얼마나 추했을 지는 나를 위해 시간을 내준 K에게 미안할 정도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K는 남중남고를 나온 사람이었다. 사실은 지금도 여자랑 있으면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어, 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K의 눈은 초승달을 닮았다. 근데 너 오늘 표정이 좀 느낌 없는데, 무슨 일 있어? 아뿔싸, 오늘은 K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저 투명한 웃음과 상대의 미세한 감정까지 캐치해내는 센스라면 남중남고 출신이더라도 여자 꼬시는 데에 문제되는 건 K의 집돌이 기질밖에는 없겠다, 하는 실없는 생각이 문득 든 것도 잠시, K의 걱정어린 시선 끝엔 어느새 어젯 밤 슬픔을 방울방울 토해내고 있는 내 자신이 머문다.
우리는 잔디밭에 누웠다. 내 눈동자에 보랏빛 하늘이 비춰졌고 벚꽃잎은 그 아래 살랑였다. 한참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K는 나의 연인이 본인과 참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며 입을 연다. K의 전 연애, 마냥 좋은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온 것 같았던 K가 자백하는 그의 "어릴적" 실수들. 헤어지지마, 너가 아직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다 너. 지금 헤어지는 건 느낌 없잖아. 미소짓는 그의 눈이 다시금 휘어진다. 잘 구워진 크루아상을 닮았다.
초저녁 하늘이 집어삼킨 노을에 내가 오들오들 떨기 시작할 때 즈음 K가 먼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다. 이제 들어가자. 은근 나와 닮은 듯한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K의 뒷통수에 대고 얘기한다. K, 나는 너가 어설픈 위로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 좋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기 이야기를 나눠주고, 토닥여주는 사람이라 좋다. 집에서 자주 나와, 치킨 뇨끼 먹자. 다음에는 내가 사줄게. 아, 일단 나도 집에서 나와야 하겠지만 말이야.
-5-
이 애는 11시면 잠에 든다. 그리고 6시반이면 칼같이 잠에서 깬다.
나는 아직 새벽의 능률이 내 몸뚱이의 컨디션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이라 그런지, 얘의 잠 습관을 보면 얘가 정말 어른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데드라인 직전에 150퍼센트를 쏟아 부어야 하는 나와는 다르게 이 애는 아주 꾸준하게 학기 내내 균등한 50퍼센트의 노력을 투자한다. 그건 정말 현명하고 어른스러운 습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얘와 대화하다 보면 가끔 얘의 어른스러움에 의심이 갈 때도 생긴다. 얘의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웃음이 가장된 얼굴인지 이 애의 진짜 얼굴인지 얘와 1년을 알고 지내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확실히 아는 것은 헤헤거리며 실없이 웃는 얼굴이 정말 얘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모쪼록 경험을 바탕으로 미루어볼 때 아이의 모습과 어른의 모습을 둘 다 가진 이들은 대부분 아이의 모습을 가장하는 어른인 경우가 많긴 하더라.
내가 이 애를 다른 곳에서 마주했다면 얘는 ‘걔’ 혹은 ‘쟤’의 범주에서 ‘얘’의 범주로 진입하지 못했을 듯 싶다. 그냥 ‘왜 걔 있잖아—‘ 혹은 ‘쟤는 뭐래?’ 같은, 서로 적당의 거리를 유지한 사이로 지내거나 아예 접점이 없어 뭐라 호칭할 단어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거나 뭐 그랬겠지. 얘는 술을 좋아해 내가 얘를 보는 시간의 반은 맥주에 얼굴이 상기 되어있고, 전공도 겹치는 분야가 없고, 사실 외적으로 봤을 때도 우리 둘은 정반대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듯 보이니까. 하지만 동아리 덕에 나는 이 애를 ‘쟤’나 ‘걔’보단 “얘—“라고 부르는 것이 더 편한 사이가 되었고, 그 사실이 소소하게 감사하다. 얘의 어른스러운 모습도, 아이 같은 모습도 나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얘가 변함없이 어른스러웠으면, 또 동시에 변함없이 아이 같았으면 하고 바란다.
-6-
2018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고 한글칼럼 부서는 멤버 교체가 대폭 진행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신입생이 몇 명이나 들어오려나 하고 기대했지만 신입생은커녕 동기들도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부서의 막내가 되어있었다. 어색하게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나름 화목한 부서로 발전해 갔다. 안타깝게도 부서의 화목함과 별개로 따로 특별히 친밀감이 느껴지는 멤버는 없었고 한동안 그도 내게는 그저 같은 동아리 같은 부서의 일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첫 동아리 회식과 몇 번의 대면 이후 내게 그는 말주변이 좋고 재밌는 사람 정도였다. 더욱 친해져도 좋겠지만 딱히 기회가 없어 그러지 못하는, 같은 동아리 일원이라는 점을 빼면 딱히 다른 접점이 없는 그런 사람. 글쎄 그 이후로도 많이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뭐랄까, 내적 친밀감은 많이 올라간 것 같았다. 글을 읽다 보면 그렇게 되더라고; 글을 읽으면 작가가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그의 글들은 유독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글을 통해 그의 어려운 순간들을 같이 헤쳐나가고 그와 함께 여행하고 도전하니 그와 많이 친해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이게 글 쓰는 것, 글 읽는 것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읽은 글들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나름 오래 보아와서인지 그의 이미지는 그를 처음 봤을 때랑은 많이 다르다. 내가 본 지금의 그는 정말 멋지고 진솔한 사람이다. 가끔 그의 지나친 솔직함에 나와 다른 한글 칼럼 멤버들은 웃음을 짓어내기도 한다. 봄 학기가 끝나가는 지금, 그를 더 알아가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그리고 모든 한글 칼럼 멤버들에게 같이 보람차고 알찬 학기를 꾸려 나갈 수 있어서 너무 고맙고 기뻤다고 전하고 싶다.
-7-
그 사람으로 말하자면, 한마디로 ‘요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사전적 의미에서 요물이란, 나쁘게 해석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구어체에선 좋은 의미를 내포한다. 이를테면 매력적일때. 섹시할때. 완벽해서 주체할 수 없을때. 우선 그 사람으로 말할 거 같으면, 어딜가도 뒤쳐지지 않을 준수한 외모를 갖추고 있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분명 보통사람에 비해 눈코입의 간격이 적당하고 잘 정돈되어 위치해 있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지금 당장 그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면 뾰족하고 큼지막한 콧날이 떠오른다. 실제로 그 사람의 코가 그러한지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적어도 내 기억속에선 그렇다. 그리고 볼수록 호감형이다. 그러한 이유에는 출중한 외모가 한 몫을 하겠다만 그 사람만의 화법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지 싶다. 항상 느끼지만 대화함에 있어 상대방을 편하게 만들어준다거나 상대방의 말에 호응을 잘해주는 것이 마치 상냥한 은행원에게 상담 받는 느낌이랄까. 재치와 유머러스함은 덤이다. 이렇게 그 사람만의 특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뚜렷하다. 이를테면 그이의 취미조차 사랑스럽다. 그는 여가시간에 스포츠를 즐긴다며 그 중에서도 야구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사람의 말을 빌리면 하는 것 보다는 보는 것에 더 흥미가 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커리어를 따져보면 또 플레이하는 것에도 소질이 있어 보인다. 그 사람의 또 다른 취미는 도서관에서 숨쉬기이다. 그 사람은 도서관을 각별히 사랑한다. 도서관을 늘 집 같이 생각하는거 같다. 집돌이인 나와 정반대로 그는 도돌이다. 도돌이표 같은 사람. 늘 한결같다. 매주 일요일은 빨래 하는 날이라고 희열을 느끼고 있던 그를 기억한다. 며칠전에 좋은향기를 풍겨서 섬유유연제는 뭘 쓰는지 물어볼 뻔도 했다. 이처럼 사람 냄새를 뿜어내는 그지만 가끔은 또 로봇같을 때가 있다. 깔끔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약속 시간 엄수는 정말 칼 같다. 약속시간에 늦은적이 없다. 매일 반복적으로 정확히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고 취침 할 것 같다. 몸 어딘가에 온오프 스위치가 있을것이라고 예상해본다. 항상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인거 같아서 볼때마다 안심이 되고 평온함을 준다. 그를 알아가면서 가장 충격적이였던 사실은 사귀는 사람이 없다. 이 부분은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음에 틀림없다. 내가 이성이였다면 이 요물과 사귀었을텐데. 아쉽다 많이.
-8-
너도 어른이 되면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기겠지. 엄마는 내게 종종 그런 말을 했었다. 그래서 정말 어른이 되면 사람을 보는 눈이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모든 사람들을 내 기준으로 혼자 판단하고 혼자 결정하곤 했다. 그래서 전체 회식 날 첫만남에서 내린 판단은 “너무 솔직해서 피곤할 사람”이었다. 뭐, 어느정도 내 판단은 맞는 듯했다.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까고 싶은 것은 까야 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에 내가 보았던 그는 그 정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글은 내 판단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내 판단대로라면 그는 그런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서사에는 힘이 있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들을 글에 담아 내기 마련이다. 그의 글에는 공허한 단어들보다 사랑이 고봉밥처럼 꾹꾹 눌러 담겨있었다. 가족에 대한 사랑, 애인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자신이 서있는 장소와 그 시간들에 대한 사랑까지. 타인에게만 솔직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솔직한 사람. 그는 내가 처음 판단했던 것처럼 단지 너무 솔직해서 불편하기만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의 솔직함에 불편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나도 그렇게 생각 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글을 읽었다면, 그리고 또 한번쯤은 곱씹어 봤다면 그가 얼마나 마음 깊숙한 곳에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정이 많은 사람인지 자연스레 알았을 것이다. 그는 이번 한 학기동안 내 오랜 잘못된 습관을 돌이켜 보게 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우선 그가 고맙고, 그가 무슨 일을 하게 되던지, 어디에, 또 누구와 있던지 간에 글을 계속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에게 야, 읽어봐하고 대수롭지 않게 보내주었으면.
-9-
당신과 모두를 처음으로 본 어느 가을날,
원래의 나라면 당신을 보았던 첫날의 옷과 그 색깔을 기억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나에게 당신의 기억이란, 그 특유의 미세하게 떨리는 듯한 그 목소리가 전부였다.
“저기.. 그 분 알아요? 그 사람 닮았어요.”
그랬다. 나에게 당신의 첫인상이란, 하고 싶은 말을 담담하게 하는 사람.
그 담담한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에 채도가 없어서 차분한 듯 했다.
떠올려 보면 당신이 입고 있는 그 옷도 무채색에 가까운 것들이 많았고,
당신에게서 색이 선명했던 때는 밝은 날에도 여느 어두운 밤에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의 사진도, 당신이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흰색과 검정색으로만 표현된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낙엽이 있던 때의 나는 그런 당신이 조금은 어려웠다.
내가 당신의 해맑은 웃음을 처음 보게 되었던 것은 우리가 잔뜩 취해버린 어느 날.
비가 많이 오던 날에 바람이 겨울에 가까워진, 그 날 당신의 웃음은 해맑았다.
장난과 애교가 섞여 넘치던 그 표정과, 티없이 번지는 웃음의 눈가와 입꼬리가.
마이크를 손에 꼭 쥐고서는 아직은 집에 안갈거라는 투정마저도 당신이 쓰는 글과는 너무 달라서
나에게도 저런 동생이 있었다면 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순하고 맑아서 나와 지옥에 같이 갈 당신.
채도 없는 당신의 흐림에 의도치 않게 가려진 순수한 영혼이라,
나는 당신의 그것이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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