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괴리감’ 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국어사전은 ‘괴리감’의 뜻을 이렇게 정의한다.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진 느낌.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진 느낌. 단어의 뜻 자체에서도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난 괴리감이 완벽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의미와 어감이 통하는, 그런 완벽한 형태의 언어.
처음 이 단어를 알게 된 건 에픽하이 2집의 수록곡 <11월 1일> 에서였다.
2.
괴리감은 천재성의 그림자/ 가슴이 타 몇 순간마다 술잔에 술이 차
- 에픽하이 <11월 1일> 중
초등학교 시절, 좋아하던 남자아이와 어떻게든 공통분모를 만들어보기 위해 듣기 시작한 국내힙합, 그리고 그중 제일 많이 들었었던 에픽하이. 아날로그 감성이 짙게 배어있는 전주가 좋아서 즐겨듣게 된 이 곡이 고 유재하와 고 김현식을 기리기 위한 추모곡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책을 좋아하기도 했고, 많이 읽어보기도 했던 터라 초등학생치고는 꽤 많은 어휘들을 안다고 자부했었던 나에게도 가사에 나오는 ‘괴리감’이라는 단어는 생소했다. 국어사전에 쓰여있는 뜻을 읽어봐도 무슨 뜻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확실히 ‘친밀하다’, 그리고 ‘같다’ 라는 의미와 반대되는 뜻인 것 같긴 한데 말이다. 그저 타블로가 “괴리감은 천재성의 그림자” 라고 가사를 적었으니, 천재들이 불가피하게 가지게 되는 어두운 특징같은거겠느니 얼렁뚱땅 넘겼던 기억이 난다. 이 단어가 훗날 내 삶의 얼마나 큰 부분들을 수식하게 되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채. 그렇게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지금 어른이 되었다.
3.
일반적인 소설의 구성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이루어진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한 권의 소설로 비유한다면, 아마도 이 책의 위기이자 절정은 고등학교 시절을 배경으로 할 것이다.
용인외고는 내게 ‘괴리감’이라는 단어의 뜻을 처음 몸소 체험하게 해준 곳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 남양주에 위치한 작은 시골에서 봄가을이면 어김없이 풍겨오는 비료냄새와 함께 등교하던 소녀가 꿈과 열정만으로 외고 국제반에서 견뎌내는 일은 사실 그리 녹록치 않았다. 오기 하나만으로 도서관이나 열람실에서 가장 늦게 나가고, 가끔씩은 쉬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쪼개가면서도 공부하고. 새벽 3시에 열람실에 혼자 남아 마지막에 불을 끄고 갈 때마다 만감이 교차했다. 내 자신의 노력에 대한 기특함, 그리고 한 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는 회의감. 무엇보다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건 꿈과 성공에 대해 마냥 나이브하기만 했던 내 자신이었다. 좋아하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정작 내가 처한 현실에서 이상까지의 거리는 까마득했다. 잡을 순 있을까, 아니, 애초에 닿을 수나 있을까. ‘괴리감은 천재성의 그림자’ 라던 노래 속 그 가사처럼, 이 괴리감은 내 천재성에서 오는 걸까. 아니, 어쩌면 괴리감은 부족한 내 자신이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좇는 과정에서 오는 게 아닐까.
애초에 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내 인생 가장 치열했던 3년은 하버드와 프린스턴의 합격레터와 함께 끝을 맺었다. 모두들 내게 꿈을 이룬 것이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꿈이 현실이 된 것이라면, 더 이상 괴리감이나 거리감 따위는 느끼지 않아도 되겠지. 이제는 그 외롭고 동떨어진 감정을 예전보다 덜, 아니면 아예 못 느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4.
대학교 3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나는 그 어느때보다 더 외롭고 고독하다. 무엇보다 날 괴롭게 하는 건, 현실과 이상 그리고 관계 등에서나 느끼던 괴리감을 이젠 내 자신으로부터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22살이 되어서야 나는 내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취향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고정되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달달한 케이크라던가 아이스크림같은 것을 좋아할 거라는 기대. 하늘하늘 레이스나 쉬폰 따위가 달린 옷들을 좋아할 거라는 기대. 시끌벅적한 사람들 무리에서 이목을 이끌고 음주가무를 즐길 것이라는 기대,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외향적인 사람일 거라는 기대. 이중 사실 내가 정말로 원하고 좋아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달콤한 음식을 싫어하고, 여리여리한 원피스를 싫어하고, 시끄러운 장소와 사람이 많은 곳이 싫고, 활발하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도 싫다. 남들이 보는 나는 진짜 내 자신과 너무도 상이하다. 그렇지만 애초에 ‘나’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만약 모두가 나를 A라 생각하고, 내 자신만이 내가 A가 아니라고 느낀다면 나는 A인가, 아닌가?
이렇게 싫어하는 것은 수도없이 많은데. 정작 좋아하는 건 며칠을 골똘히 생각해봐도 쉬이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끊임없는 질문 끝에 한달 뒤 내가 얻은 답은 딱 하나였다. 아메리카노.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
본질이 뭐니, 너는 누구이니, 보기에 너무도 거창한 질문에 내가 심사숙고끝에 내릴 수 있는 답은 참 간단하기 그지없다. 아메리카노.
나의 정체성과 아메리카노. 이 둘 사이의 거리는 얼마쯤일까.
5.
하지만 최근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굳이 ‘나’를 설명하는 것이 하나일 필요는 없다, 내가 가진 모든 특징들이 통일성을 가질 필요 역시 없고.
그러니까 ‘괴리감’ 이라는 것은.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진 느낌이라는 것은. 어둡고 우울한, 내가 외면해야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닌, 양가감정(ambivalence)와 같은 모순되는 것들이 ‘공존’ 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 역설적이지만 생각보다 단순한 이 괴리감의 존재를 내 삶의 일부분으로 인정하려 하는 중이다.
<11월 1일>에서 괴리감을 표현하는 ‘천재성의 그림자’ 라는 말도 결국엔 그림자의 어두운 면을 말하려던 게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이 그저 천재성과 함께 존재하는 당연한 ‘그림자’의 존재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같은 가사와 같은 단어가 시간이 지나가면서 동일한 대상에게 얼마나 다른 의미들을 주게 되는지가 새삼 놀라웠다.
나는 귀를 기울였지 내면에/ 언제나 외면했던 Me, myself, and I/ 삼자대면해
- 에픽하이 <Map the Soul> 중
글의 시작에서 언급했던 같은 가수 에픽하이의 다른 노래를 인용하며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이 글의 제목을 붙일 때 번뜩 떠올라 영감을 주었던 <Map the Soul> 이라는 곡이다.
어쩌면 나는 이제야 원래 존재하고 있었던 내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절대적인 하나의 성격이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Me, myself and I 이렇게 각자 다르지만 또 같은 ‘나’ 의 조각들이 하나로 맞물려 있는 것일수도.
그리고 지금 24살의 나는 이제 이혜령이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막 한글을 떼기 시작한 아이처럼 서툴고 느리지만, 어느것도 미리 단정짓지 않고 유연하게 생각하며. 내가 생각했던, 남들이 바라봐왔던 내 자신의 모습과 다르더라도 ‘괴리감’에 좌절하지 않고 그 모든 차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여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