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가장 처음 마주하는 사람은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이다. 언제부턴가 거울 속의 그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것보단, 피곤으로 가득 차 찌푸린 얼굴이나 그날 하루를 걱정하며 울상인 모습으로 마주하는 것에 더 익숙해졌다. 하지만 집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그 얼굴은 사라진다. 의식적으로 눈썹 사이에 자리잡은 주름을 펴보고, 입 꼬리를 말아 올려 미소를 지어본다. 그 얼굴을 마주할 다른 사람들에겐 긍정의 기운을 나눠줄 수 있도록, 다가올 하루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껏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본다.
새로운 얼굴로 마주하게 되는 다음 사람들은 출근 길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서둘리 혹은 여유롭게 걸음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저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거쳐와 어떤 하루를 앞두고 있을까?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을까?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실 우리는 살면서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스치게 되고 알아가게 되지만, 그 중 어느 한 명도 완벽히 알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평생 동안 무슨 생각을 해왔고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내게 어떤 말이나 행동을 바라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나 자신을 보이고 알리는 것에도 자연스레 한계가 존재하게 된다. 상대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선까지, 너무 큰 짐이 되지 않을 선까지, 수많은 잣대들에 비난 받지 않을 선까지, 내가 뱉는 많은 말과 보이는 많은 행동을 재단하고 제한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내 모습은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보는 다른 사람의 모습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해도 될까?
“친절하세요.
당신이 만나는 모든 이들은 저마다 당신이 모르는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어떤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그저 바라보세요.”
영화 <원더 (Wonder, 2017)>는 선천적 안면기형을 가지고 태어나, 비록 많은 사람의 눈에는 평범해 보이지 않는 얼굴일지라도 현재의 얼굴을 갖기까지 27번의 수술을 견뎌낸, 어기 풀먼 (Auggie Pullman)이라는 초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하는 따뜻한 가족 영화다. 1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람을 마주할 때면 우주 비행사 헬멧으로 얼굴을 가리고 집에서 홈 스쿨링을 받던 어기가 5학년을 맞아 초등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가족의 응원과 친구들의 용기를 통해 벽을 허물고 사회에 성공적으로 발을 디디게 되는 내용을 다룬다. 물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어기이고, 어기가 견뎌내는 시련과 극복해내는 과정이 대견하고 감동적이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가 특히나 더 주목하게 된 부분은 어기의 주변 인물의 입장과 심리 상태였다.
어기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인의 재능과 석사 과정을 접어둔 채 어기의 건강과 삶을 위해 집중하고 희생한 어기의 엄마. 본인의 힘듦은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주변의 모두에게 긍정의 기운을 주고 싶어하는 든든한 어기의 아빠. 동생이 태어난 이후로 한번도 우주의 중심이 돼보지 못한, 사랑 받고 싶음을 내색하지 못하는 속 깊은 어기의 누나, 비아. 시작은 작은 친절이었어도 곧 어기의 진실됨에 반해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었던, 좋은 친구 한 명을 위해 깊이 없는 친구 여러 명을 놓는 용기를 내지 못하던 어기의 친구, 잭. 그리고 안전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사랑 넘치는 부모님과 귀여운 남동생을 가진 비아를 부러워하던 안쓰러운 비아의 친구, 미란다.
영화는 어기의 시선뿐만이 아닌, 다양한 인물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어기의 입장에선 볼 수 없고 생각지 못한 부분을 알게 되고, 모든 사람에겐 세상의 중심이 본인이며, 많은 일을 본인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이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들 각자의 사정과 삶이 있고, 나에겐 있어서 힘든 부분이 남에겐 없어서 부러운 부분이 될 수도 있으며, 서로가 보는 좋은 모습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우주 비행사 헬멧 속에 진짜 얼굴을 숨기고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은 어기뿐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변의 아무 걱정 없이 언제나 밝고 행복해 보이는 누군가도, 언제나 인상을 쓰고 내뱉는 많은 말이 부정적인 누군가도, 다 각자의 아픔이 있고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 헬멧 속에 숨게 되는 것일까. 때로는 미소가 되고 때로는 상처 주는 말이 되는 그 헬멧의 이유는 사실 우리의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모든 생각과 진실을 드러냈을 때 부정당하고 외면 받을 것이 두려워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비난 당하고 배척 당했을 때의 상처와 상실감이 무서워서 애초에 드러내지 않고 숨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면을 숨기고 외면 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잘 살아가고 있다고, 그런 모든 경험과 생각이 있기에 현재의 우리가 있는 거라고, 누군가는 받아들이고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는 가장 첫 번째 사람은 본인이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그 누구도 평범하지 않을 거에요.
그리고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 주목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
필자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적 특성 상 학생들에게 칭찬을 자주 한다. 안 좋은 면보다 좋은 면을 중점적으로 봐주며, 하지 못하는 것보다 잘 하는 것을 찾아내 알려주고 이끌어 준다. 입버릇처럼 학생들의 말과 행동과 모습을 칭찬해주던 어느 날, 학생 몇 명이 반대로 필자를 칭찬해 준 적이 있다. 필자가 학생들을 칭찬할 때 주로 보게 되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한 부류는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마워하고, 한 부류는 거짓말 하지 말라며 부정하고 그 말이 왜 거짓인지를 설명한다. 학교 선생님 중에 내가 제일 좋은 선생님이라고, 하루 종일 내 교실에 있고 싶다고 칭찬해주는 학생들에게 필자가 보인 반응은 놀랍게도 부정이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면서,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서, 내가 칭찬을 듣게 될 일이 확연히 줄어들었음을 깨달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내가 어떻게 가르쳤는지, 학생들 앞에서 내 모습이 어땠는지 분석하고 반성하느라 나 자신은 나에게 가장 엄격하다. 항상 잘못한 부분에 집중하며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고민하는 데에 급급하고, 잘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인지는 할 여력도 없거니와, 해서는 안 되는 오만한 행동이라 생각하게 된다. 내가 나 자신을 칭찬해주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대체 어느 누가 나를 칭찬해줄 수 있을까? 남이 해주는 칭찬까지 부정하는 나는,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너는 기적이야 (You are a wonder).”
필자는 항상 이유에 집착하곤 한다. 본인에게 작은 칭찬이나 작은 상을 주기에 앞서 굳이 그 작은 친절을 합리화 할 이유를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찾다 보면 결국 하나를 집어 삼킬 정도로 많은 잘못과 안 좋은 점을 떠올려 버리곤 한다. 하지만, 사실 그 모든 이유 조차 필요 없는 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그저 그 존재 자체가 기적이며, 있는 그대로 대견하고 살아가는 매일이 경이로운 순간이다.
물론, 이 것이 모든 사람이 헬멧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숨고 싶을 때가 있다면 숨어도 좋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도 한 명쯤은 헬멧 속의 모습까지도 보듬고 받아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본인이다.
그러니 매일 아침 거울을 통해 마주하는 나 자신에게 말해주자. 아무 이유 없이도 너는 기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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