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이 되고 싶었던 편입생 시리즈를 쓰게 시작된 결정적인 이유는, 사실 지금부터 이 글에 써내려갈 작년 여름에 일어난 어떤 한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 사건은 처음 버클리에 들어온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었고, 이후에는 그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들었으며, 좀 더 시간이 지나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 위축될 것이 없어진 이후에는 이런 일들을 일으킨 그 녀석의 심리가 궁금해졌다. 지적 호기심이었거나, 쓸데 없는 정의감이었거나, 그 일이 벌어지던 그 해 여름 내가 할일이 너무나 없어서 새로운 건수를 찾아 남아도는 나의 잉여 에너지를 투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건이나 대립에는 근본적인 원인들이 존재한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든, 그 원인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을지언정, 처음의 원점으로 돌아가보면 그런 사건이나 대립을 만드는 주체는 언제나 존재한다. 이번 일의 경우에 그 주체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한 신입생이었다. 나중에 알게된 것이지만 그 신입생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같은 신입생들 사이에서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런 점에서 기인한 자신의 단점, 깎아내려진 존엄성, 그리고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우월한 입장에서 공격할 수 있는" 편입생들을 타겟으로 수 많은 욕설과 비방, 그리고 평소에 잠재적으로 편입생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신입생들을 끌어모아 자신의 편으로 만드려고 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잘못된 방식에 정합성을 부여해줄 수는 없었다.
그의 행동에서 나는 두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하나는 그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음지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요구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음지에서 자신의 익명성을 믿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버클리 사회를 선동하는 것이었다. 이 시리즈의 첫 글에서도 밝혓지만 나는 선동을 싫어한다. 선동은 자신의 대척점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공격하기 위해 관계없는 대다수의 일반인들에게 잘못된 지식을 주입하고, 또 그들을 조종해서 의미없는 대립을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대립은 대립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그런 대립들의 결과는 결국 의견이 갈라진 사람들의 상처, 증오, 비난, 그리고 깨어진 인간관계들 뿐이니깐. 따라서 나는 그의 행동을 테러리즘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지능적으로 버클리의 한인들이/ 모이는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익명 게시판등의 자신의 신원을 숨길 수 있는 곳에서 신분을 숨긴 채 편입생들을 향한 근거 없는 비방을 일삼고 있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그가 멍청한 것인지, 준비가 덜 된 것인지, 너무나 과격한 표현들을 써가며 편입생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했기에 같은 신입생들 조차도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시 버클리는 깨어있는 곳이다.
그와는 대척점에 서 있을 지도 모르는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자 한다. 편입생이었지만 나의 경우에는 같은 학교 출신이 없었기에 처음의 버클리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의지할 곳이 없는 황량한 무법지대 같은 곳이었다.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억지로 모임에 참석하고, 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친밀감과 유대감을 온몸으로 사정없이 눈물을 흘리는 외로은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한 자취생활은 그런 외로운 감정들을 증폭시킬 뿐이었고, 예를 들면 학교에 대한 서류들의 절차같은 기본적인 사항들에 궁금한 것들이 있어도 이곳 저곳 물어보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입장의 편입생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 시점의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알 방법이 없었다.
운이 좋았던 점은 이곳에 나와 함께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알았던 신입생 친구들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의 외로움과 슬픔을 뒤로한 채 그 녀석들 덕분에 나는 약간의 인맥을 만들 수 있었고, 이윽고는 마음을 열어주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나는 편입생이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은 전부 신입생들이었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회색분자일 것이고, 이별과 만남의 관계에서 본다면 이방인일 것이며, 어느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박쥐같은 존재였을 수도 있지만, 그 시절의 나는 적어도 편입생과 신입생을 구분한다는 개념 자체를 가지고 잇지 않았기에 새롭게 만난 좋은 친구들과 함게 있을 수 있었다는 것, 마음의 따스함과 유대감, 사랑, 신뢰를 느끼면서 버클리 생활에 점차 적응해 나갔다. 나의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중한 친구들이 생긴 것이다. 이 쯤에서 잠시 애정 표현을 하면,
I LOVE BERKOP AND KUNA
I AM WHO I AM BECAUSE OF BELOVED YOU's
FOR THOSE ALL WHOM I HAVE MET AT CAL
♡ㅋㅋ
그리고 어느 정도 학교의 시스템에 알아갈 무렵 신입생과 편입생의 대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에 적응해가며 어렴풋이 눈치 채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을 줄이야. 이제 나는 분쟁을 조장한 어떤 신입생의 심리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지금부터 올리는 자료들은 나와 신원을 밝힐 수 없는 제 3자가 함께 작업한 자료들이며, 전적으로 사실에 기반한 것임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또한, 이 자료들이 지나치게 특정인물을 향한 공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독자들에게는 스크롤을 내리기를 권장한다, 이 자료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열쇠가 될지, 글을 쓰는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 열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진실은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녀사냥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녀사냥을 시도하는 녀석이라면 마녀사냥으로 되갚아 줘도 된다고 생각한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분란을 혼자 조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결정한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죄없는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똑같이 그에 대한 업보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적용된다.
그의 가장 큰 잘못은 지나치게 익명성을 믿고 자신의 주제를 모른 채 이런 일들을 벌였다는 것이다. 자랑아닌 자랑을 하자면 나는 버클리 한인들이 가장 많이 접속하는
KUNA의 제작자이자 웹마스터, 그리고 이곳 버클리오피니언 웹사이트의 제작자와 회장을 맡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존에 존재하던 KUNA의 싸이월드 웹사이트의 익명 게시판에서도 비슷한 일들을 저질러서 간접적인 역추적방식으로 최종 4명의 용의자 선상에 올라있던 이름에도 올라가 있었고, 또한 그곳의 일을 거론하자면 내가 사랑하는 한 동생이 - 그의 행동에 정합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 후배들을 위해 학교 시험에 관련된 자료를 올렸을 때, 그 시험을 담당하는 교수에게 익명으로 이를 신고하여 - 전 글에 썼던 테스트 뱅크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 성적의 불이익을 받게 한 전적이 있었다. 이런 개인적인 원한을 사 놓은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분란을 조장하는 것은 그는 - 내가 보기엔 - 딱히 편입생을 메인 타겟으로 삼아 비난하는 것이 목표가 아닌, 버클리 내의 한인 커뮤니티에 분란을 조장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 같다. 그 목표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어쨌든 그는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만약을 위해서 말해두지만, 위 자료에 적은대로 웹마스터는 암호화된 유저들의 비밀번호를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컴퓨터 사이언스나 암호학, 보안에 관련된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이해하겠지만 MD5라는 암호 체제는 아직도 완벽한 복호가 불가능 상태임을 미리 말해둔다. 어쨌든 자료에 나온대로 그는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익명성에 대한 지나친 과신으로 인해 이렇게 고리를 남기고 말았다. 데이터베이스를 열어본 결과 그는 모든 개인 정보를 허위로 작성했고, 이런 허위 정보를 담은 계정을 일곱 개나 만들었다. 이는 쿠나의 웹마스터인 입장에서도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내가 만든 사이트를 능욕하다니ㅡㅡ
그렇게 그가 남겨 놓은 실마리를 기반으로 제 3자와 나는 구글링을 시작했다. 나중에 밝히게 될테지만 EECS (Electrical Engineering and Computer Science) 전공 치고 그는 자신이 인터넷에서 한 행동이 가지고 올 수 있는 파급력에 대해 너무나 낮게 평가한 것 같다. 여기 저기 구글링을 한 결과 그는 자신의 흔적을 너무 많이 남겨 놓았다. 예전 버클리오피니언 웹사이트에서도 겨울 방학 시즌에 남겨놓은 편입생 비방성 글들의 IP는 모두 남가주 (Southern California) 를 표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생각지 못한 제 4자의 존재를 알아 도움을 받게 되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도 UC 버클리의 입장에서는 편입생이었는데, 이는 그가 다른 UC 캠퍼스 - UCLA - 에서 편입을 했기 때문이다. 이 분란을 조장한 신입생이 여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겠지만, UC 대학들의 편입 시스템은 커뮤니티 칼리지들과만 연결되어있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 타 학교에서 버클리로 편입해온 모든 편입생들을 - 이를테면 편입생들 중에는 다른 UC나 CC들 외에도 UIUC나 Cornell이나 Stanford, UPenn 같은 타 대학 출신들도 포함 - 비난한 것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에게 적을 알지 않고 비난을 일삼았으니 자업자득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나, 그리고 도움을 주었던 제 3자와 제 4자는 그의 신상 공개를 간접적으로 유도했고, 결국 그는 - 역시 이것도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 자신의 흔적을 보여주고 말았다.
잡았다.
연락처를 알아내고 정리한 정보들의 일부를 모두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는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부정한 채 자신은 절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당신은 누구냐고 왜 이런 짓을 결백한 자신에게 하냐며 되려 화를 냈다. 그렇지, 앙탈이 빠지면 섭섭한거지. 그래서 그가 더 이상 자신의 과오을 부정할 수 없도록 모든 자료들을 재구성하여 다시 보냈다. 하지만 그는 죽어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한 말은 이랬다.
"그거 제가 한게 아니고, 저희 집에 사는 UC얼바인 다니는 사촌 동생이 한거에요"
할 말을 잃었다.
뭐 이런놈이 다있어. 어떻게 얼바인에 다니는 동생이 버클리의 Math16 이나 Math54 같은 클래스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참고 자료:
신입생이 되고 싶었던 편입생 :: 序, 잊을만 하면 나오는 편입생 떡밥) 나는 그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는 것에 더 화가 나고 있었다. 좀 더 개인적으로 그를 알아본 결과 그는 내 친구의 친구의 동생이라고 한다. 세세한 얘기까지는 할 수 없지만 불우한 가정사라던지 여러가지 일들이 그를 이렇게 비뚤어지게 만들었겠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잘못을 관계도 없는 사촌동생과 자신의 어머니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었다. 버클리에 다니는 생각이 있는 학생이면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조금은 버클리라는 곳에 실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남들을 비판하기 전에 내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가만히 있었고, 그렇지 못한 그는 이런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가했던 그해 여름, 합격받은 인턴십 자리들도, 들어야하는 여름학기 과목들도 뒤로 한채 유흥에만 일삼았던 약 세달의 나날들, 그래봐야 룸메이트랑 맨날 집에서 술만 마셨다. 한가했기 때문에 나온 여유해서 발산할 곳 없는 잉여 에너지들을 정합성이나 정의감이라는 긍정적인 단어들로 포장하여 나는 그의 정체를 밝히는데는 성공했지만, 한편으로는 본질적으로 내가 기대했던 것, 그를 잡으면 편입생과 신입생 사이의 갈등아닌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든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원하던 것을 이루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이 글을 읽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지만, 여러분이 여름이라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면 보다 글을 쓰는 나보다는 유익한 시간을 가지길 권한다. 올해 여름, 나에게는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리워하는 것은, 증오를 발산하여 누군가를 추적하는 것보다는 몸과 마음에 훨씬 더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일 수도 있다. 판단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하게 될 것이다. 위에 적은데로 나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그저 독자들의 평가를 기다릴 뿐이다.
다음 글은 이런 대립들을 뛰어넘어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노력들에 대해 쓰고자 한다. 상대방의 슬픔을 느끼고, 그 눈물을 마시는 건 그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만,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아간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한다고 믿는다. 그 노력 속에서, 아마도 대부분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걸었던 기대가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