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 후, 달콤한 여름 방학도 지나고 샌프란을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항상 여름이 끝나면 고등학교에서 새 학기를 시작하려고 미국 동부 버몬트로 가는 비행기를 탔었는데, 새로운 곳으로 향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중학교 때 대학교를 다니던 언니한테 과외를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대학생이라는 타이틀이 나에게는 너무 막연한 존재였고 멀게만 느껴져서 더 반짝였었다. 그리고 마침내 길고 길었던 고등학교 4년도 지나가고 내가 대학생이된다니 꿈만 같았다.
'나의 시대가 왔다.'
근거없는 신입생 패기에 사로잡혀 상상에 잠겼다. 캘리포니안 선샤인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짭쪼름한 바다 냄새가 나는 캠퍼스에서 두꺼운 원서를 팔에 끼고 걷는 상상. 교수님과 열띤 토론을 나누고 도서관에서 밤을 새워 공부하고 낮에는 친구들과 잔디 위에 누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상상. 모두들 버클리에 입학하기 전에 한번 쯤 품어 본 로망일 것이다.
하지만, 처음 버클리에 도착했을때의 쨍쨍한 날씨는 익살스러운 낚시에 불과했다. 1년의 반은 쌀쌀하고 변덕스럽게 비가 오기도 하며 맑은 날은 꼭 시험 기간에 임박해서만 온다. '오랜만에 해가 쨍쨍..그런데 나는 메인스택' 이런 유형의 페이스북 상태는 비일비재하다. 바다 냄새는 커녕, 코를 찌르는 쓰레기 냄새가 대학가의 중심지인 텔레그래프에 진동을 한다. 처음 학기에는 돈 달라고 무섭게 달려드는 호보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그들의 고함에 소스라치게 놀랄 때도 있었다. 주의를 당부하는 각종 범죄에 대한 포스트가 기숙사 일층에 붙어있는 걸 보고 놀라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 지긴 한다. 상쾌한 아침공기를 맡으며 학교에 가기는 정말 정말 힘들다.
그러나 학교 몇 주가 지나고 나면 '버클리 타임'에 익숙해져서 여유를 부리다가 클래스에 늦게되고 빠지게 되면 이제는 아침 클래스를 등록할 마음이 사라진다. 특히 주말에 술자리를 가게되면 월요일 아침 아픈 머리를 이끌고 중국어 클래스에 가야할 때도 있었다. 다들 아침에 언어클래스가 있다고 하면 정말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었는데,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주 5일 클래스에 두 번 이상 빠지면 점수가 깎일 수도 있다는 선생님의 단호한 얼굴이 텔레그래프의 호보들보다 위협적인 것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아침에 세수조차 하지 못한 채 드위넬로 달려가보니 아침 공기에 대한 욕심이 싹 사라졌다 .
그리고 도서관에서 밤을 새는 일은 데드윅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자금난에 고생하는 우리 공립학교는 도서관을 매일 밤 열어둘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루한 수업에 지친 몸을 이끌고 도서관에 가서는 졸기 십상이다. 화장실에 몇번 왔다갔다하고 마주치는 친구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자리로 돌아오면 벌써 밤 11시. 도서관이 닫으려면 3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 책장을 펴고 숙제를 하다보면 슬슬 집에 가야할 때다. 으스스한 밤길을 혼자 뚫고 기숙사에 돌아갈 생각에 막연해질 때 쯤, 친구들 중 누군가가 "레잇 나잇!"을 외친다. 모두들 이대로 집에 돌아가기는 아쉽기도 하고 출출했는지 한명도 빠짐없이 기름기 가득하고 포화지방이 충만한 야식을 위해 다이닝 홀로 향한다.
나의 단골메뉴는 매콤한 치즈가 얹어진 치킨 스트립! 오늘도 역시 나의 favorite 치킨을 한 입 베어물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때마다 다양하게, 남들 연애사, 가십들, 시험얘기 또는 수업에 대한 얘기를 한다. 하지만 끝은 언제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말들로 수렴하게 된다. 서로에게 위로와 따듯한 격려도 잠시, 뿔뿔히 흩어져 기숙사로 터벅터벅 걸어온다. 친구들의 위로와 뚱뚱한 음식들도 채워 주지 못하는 공허함에 아쉬움을 느끼며 하루를 끝낸다. 무거운 몸을 눞혀 겨우 눈을 감고 나면 어느새 알람소리가 울리고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야 한다. 반복적인 일상에 몸과 마음은 날이 갈수록 지쳐가지만 시간은 똑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한 학기가 겨우 지났을 뿐인데 고등학교 시절의 나와는 다른 것같다.
'한 5년은 늙은 느낌이야'
이런 환경에 대한 우울함에 푹 잠겨 늘어지게 잠만 잘때도 있었지만 언젠가 새로운 날이 시작되리라는 희망만은 잃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의 목표와 계획이 확연해 지는걸 바란다기 보다는 나의 열정과 진로도 서서히 뚜렷해 지길 원했던 것이다. 운이 좋게도 그런 날들이 나에게는 찾아와 주었다. 정신없이 2학기를 보내면서 또 다시 지쳐갈 무렵, 나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 아침에 눈을 떴다. 전날 밤 벌컥 들이킨 레드불 때문일까. 알람소리를 최고치로 해놔도 들릴까 말까한 내가, 알람소리없이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기적이다. 이른 아침부터 눈을 찌르는 햇살에도 기분이 상쾌하기만 했다.
왠지 특별한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에 휩싸인다. 길거리 호보들은 내가 건낸 잔돈을 받고 활기찬 아침인사로 보답했다. 사람들이 바글대는 드위넬의 강의실도 그 날따라 반갑기만하다. 오랜만에 앞 줄에 앉아 교수님을 지켜보는데, 양말을 바지 밑단 위로 올려입은 모습에 인간미를 느낀 나는 웃음이 피식 나버린다. 혼자말을 중얼중얼 거리며 심오한 개그를 하시는데 이해할 수 없지만 다른 학생들의 웃음이 나에게도 전염이 된거같았다. 수업을 마치고 나와서 메모리얼 글레이드를 가로지르는데, 내 발치에서 재롱을 부리는 귀여운 다람쥐와 풀 밭에서 프리즈비를 주고받는 사람들도 완벽해 보인다. 내가 생각하던 대학의 로망의 한 조각이 수줍게 모습을 비추었다.
즐거운 하루가 끝나갈 무렵, 친구들의 전화에 즉흥적인 일탈을 꿈꾸며 삼원주막으로 향한다. 늦은 밤인데도 학교 주변에는 술집이 없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범죄가 잦은(?) 위험한 옆동네, 오클랜드까지 가야한다. 이제는 익숙해진 술게임들을 제쳐두고 우리들만의 얘기, 추억을 만들어간다. 술기운에 한층 업된 친구들과 택시를 타고 다시 버클리에 돌아올때면 훈훈함에 취해 헤어지기 싫어지는데, 어느 새 낯익은 텔레그래프에 접어들면서 우뚝 솟은 버클리의 시계탑 Campanille가 보인다. 밝은 조명에 빛나는 시계탑이 등대인 마냥 우리들의 마음을 진정시켜준다. 오클랜드에서의 모험도 끝이나고 집에 돌아왔다는 신호다.
미우나 고우나 일년동안 정이 들어버린 버클리는 내 마음 속 또 다른 집으로 자리 잡았다. 모든 유학생들이 그렇듯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다른 모습과 의미를 가진 집 (home) 이 여러개 존재 할 것이다. 처음에는 기대와는 너무 달라 낯설기만 했었지만 어느 덧 적응하기 시작했고, 익숙해지는 과정 속에서 버클리를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본 적이 많았었는데, 대부분의 문제들은 내가 바라보는 눈에서 오지 않았나 싶다. 내가 겪은 특별했던 하루가 어쩌면 나의 긍정적인 마음가짐 하나에 달라 졌었던 것이었을수도. 기분 좋게 기상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면서 항상 같은 거리, 같은 수업, 같은 교수님을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 봤을 때, 이미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냄새나고 구질구질한 거리에서도, 변덕스러운 날씨 안에서도, 잠이 슬슬오는 교실에서도 잘만 쳐다보면 사랑스러운 것들이 꿈틀거리며 관심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신입생으로 처음 입학해서 우리와 가진 모든 기대를 부응하지 못하는 캠퍼스를 탓하지말자. 우리가 바꿀 수 없다면 조금 더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포용할 수있는 능력을 길러야한다. 새로운 환경속에 예전의 집이 그리워 질 때면 우울함에 너무 오래 빠져있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길거리에서 대마냄새가 진동을하고 시위가 끊임없는 이곳 버클리는 우리가 보듬아줘야 할 새로운 집이기 때문이다. 신임생 시절을 돌아보면서, 버클리 안에서 여유를 찾는 모습이 신기하다.
버클리에 처음 도착하면 기대와 현실의 차이에 실망할 수도 있다. 시끄러운 타운인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버클리에서 훌쩍 떠나버리고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을 해본 이제는 여러분의 1년 선배로서, 그 차이를 쉽게 단정짓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 나 자신도 아직은 이곳 안에서 나만의 세계를 확립하지는 못했지만 슬슬 환경과 어우러지며 보금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힘든 날들이 찾아오면 친구들과 서로 격려어린 충고를 해가면서 버클리를 더 사랑하길 바란다. 어느샌가 우리의 일부분이 되어버릴 곳을 아끼고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예전 집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친근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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