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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사회 :: Current Issues

2014회 말 타임 아웃

2014년의 프로야구는 조금 특별했다. 야구야 원체 결과를 예상하기 힘든 스포츠라지만, 올해는 조금 더 예측불허의 경기들을 만들어갔다. 벌써 몇 년째 굳히기에 들어가고 있는 삼성의 독주체제와 언더독 선수들의 급부상. 그리고 프로야구 전체 판도를 한 마디로 일축시켰던 '역대급' 타고투저 현상까지 어느 하나 놀랍지 않았던 것이 없다. 올해 팬들을 열광시키고 또 좌절하게 한 요소들을 진단해보며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 가을야구 레이스, 그리고 한국 프로야구의 발전 방향에 대해 가볍게 말해보고자 한다.

 

너무 잘 때리는 타자들?

 

올해 프로야구 얘기를 시작하면서 '타고투저' 현상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6월까지 3할 타자가 30명이 넘고, 4할 타율을 끌고 온 선수가 나왔던 올 시즌의 프로야구는 던지는 쪽보다 때려내는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해 보였다. 연일 두 자리 수 점수를 뽑으며 투수진을 무너뜨렸던 타자들은 올해 왜 이렇게 잘 쳤던 걸까. 

50 홈런 고지를 눈 앞에둔 '올해의 타자' 박병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81&aid=0002459113>

가장 눈에 띄는 이유는 늘어난 외국인선수 보유한도다. KBO(한국프로야구)는 올해 2003년 이후 12년 만에 외국인 카드를 두 장에서 세 장으로 늘렸다. 기존의 2명 등록∙2명 출장 규정이 3명 등록∙2명 출장(신생 구단 NC KT 2년간 4명 등록∙3명 출장)으로 바뀌며 구단마다 외국인 타자를 한 명씩 타선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철저하게 팀 스포츠인 야구에서 선수 한 명 바뀌는 게 그렇게 큰가 싶을 수 있겠지만, 투수입장에서는 제일 못 치는 타자 한 명 대신 제일 잘 치는 타자를 상대하게 된 셈이다. 실제로 NC 다이노스의 외인 타자 에릭 테임즈는 '테임즈가 홈런 치면 승리한다'는 팀 징크스를 만들어낼 정도로 팀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적응이 되지 않은 투수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고, 더 많이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

 

보유한도와 함께 연봉제한까지 풀린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외국인 선수 대상의 연봉 총액 30만 달러 제한과 재계약 연봉 인상률 25% 제한이 풀리며 KBO 구단들이 빅리그 (MLB, 미 메이저리그) 경험이 풍부한 대어들을 들여왔다. 이면계약으로 연봉제한을 넘기며 외인 선수들을 영입해오던 것이 야구판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지만, 공식적으로 제한을 푸는 것은 또 다른 얘기인 것이다.

 

지겨운 일등과 꼴등

 

그래도 단순히 '타자들이 더 잘 쳤다'라고 하기엔 석연찮은 점이 많은 시즌이었다. 모든 타자들이 다 똑같이 잘했다면 일등은 또 당연히 삼성이고 꼴등은 또 당연히 한화일 리가 없다. 사실 생각해보자면 몇 년째 1위 팀과 꼴찌 팀이 시즌 초부터 확정적인 지금 프로야구의 성적표는 지극히 부자연스럽다. 긴장감 없는 승부가 반복될 이유도, 한 팀의 전력이 타팀을 완벽하게 압도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메이저리그에도 전통적인 명문, 확실한 전력적 우위에 있는 강팀들이 존재하는데 한국프로야구라고 특정팀이 강세를 보이면 안 되는 것이냐 묻는다면 MLB KBO의 구조적 차이를 조명해봄으로써 명확한 답을 낼 수 있다.

 

첫째로 연고지간 격차. 미국은 연고지를 구단이름으로 사용하며 (LA 다저스, 보스턴 레드삭스 등) 구단 경영에서 기업적인 성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자금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손을 벌릴 스폰서 대기업이 지정되어 있지 않은 그들은 이윤과 수익성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요컨대 메이저리그팀 단장의 최우선 책무 중 하나가 페이롤 관리일 만큼 그들은 자금의 유동성과 수입지출에 큰 신경을 쓴다. 연고지로 삼는 도시의 규모에 따라 '빅마켓' '스몰마켓'으로 구분을 짓는 메이저리그에서 빅마켓 구단(보스턴, 뉴욕, LA 등의 대도시 연고 구단)의 유니폼 판매, 구장 입장료, 중계료 수입은 스몰마켓팀의, 그리고 타국 리그 구단의 수입과 궤를 달리 한다. 이런 이유로 구단 자금력에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가 벌어지게 되고, 자연스레 수급되는 선수들의 연봉과 클래스에 차이가 생긴다. 단적인 예로 메이저리그 페이롤 1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238,841,005) 30위 휴스턴 애스트로스($44,474,300)의 페이롤 규모차이는 2,000억원 가량으로 천문학적이다. 휴스턴의 팀 전체 연봉이 LA 다저스 팀 내 연봉 1, 2위 잭 그레인키($28,000,000)와 애드리안 곤잘레스($21,857,143) 단 둘의 페이와 맞먹는다는 점은 잔인할 정도다. LA 다저스가 전통적인 서부의 강호로 자리잡은 건 전세계 모든 스포츠 팀 중 최고액 팀 연봉이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LA의 막대한 인구와 자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4년 LA 다저스의 천문학적인 팀 연봉
<http://espn.go.com/mlb/team/salaries/_/name/lad/los-angeles-dodgers>

KBO의 구단들은 기업이름을 구단이름으로 사용한다(롯데 자이언츠, 넥센 히어로스 등). 국내 프로스포츠를 봐온 팬들에겐 위화감이 없을지 모르겠으나, 구단 자체가 삼성, 엘지 등의 국내 기업들의 자회사 격으로 운영되는 사실은요컨대 SK Wyverns SK의 자회사로 편성되어 있다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로 인해 국내 구단들은 철저한 이윤 창출보다는 기업 이미지 메이킹 및 홍보적인 측면에 무게를 둔 운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국내 구단들의 광고로 점철된 유니폼이 그 사고방식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팀 이름으로 내걸린 기업들에게 기댈 여지가 있는 구단들은 필사적으로 이윤창출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됨과 동시에 그 자금력의 수준이 비등비등하다. 팬 층의 규모차이에서 비롯되는 구장 입장료 수입은 물론 중계료 수입, 기업 광고료, 어느 하나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에서 부산을 빅마켓으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연고지 규모의 차이로 인한 자금력 우위가 두드러지지 않아 빅마켓이라 부르기 민망한 점이 없지 않다.)

 

실제로 한국에서 2010 - 20134년간 평균 페이롤은 SK 71억으로 1, NC 41억으로 9위에 해당되지만 그 차이가 스타 선수 두 세 명 분의 계약금에 해당하는 30억 원 정도로 준수하다. NC가 세 명의 외인 선수들을 보유한 점까지 감안한다면 실제 페이롤의 차이는 더 적을 것이다. (각 구단의 발표된 페이롤에 외인 선수의 연봉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69억 원 가량의 평균 페이롤을 기록한 기아 타이거즈는 꾸준한 하향세 이후 극심한 부진을 겪고 있고, LG 역시 한 동안 리그 3위 규모 페이롤에 걸맞지 않은 성적을 내오는 등 프로야구에서 페이롤의 차이는 성적표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고 말하기 어렵다. 저임금 구단으로 유명한 넥센, 한화 마저도 평균 50억 원 이상의 페이롤을 유지해온 점을 고려할 때, 최소한 국내 프로야구에서 돈 없어서 성적 못 낸다는 말은 핑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는 선수 수급의 차이다. 미국은 1 5000개의 고등학교 야구팀이 존재하고, 등록되는 선수는 45만 명 가량된다. 거기에 하위리그까지 합치면 400여 개의 대학교에 만 명이 넘는 선수가 소속되어 야구를 하고 있다. 미국 인구가 우리나라 인구의 6배를 조금 웃도는 수준임을 감안해도 아득하게 많은 숫자다. 이 많은 선수 풀에서 재능 있는 선수는 매년 여러 명씩 나오기 마련이고, 드래프트 우선권을 쥐고 있는 하위 팀에 큰 어드밴티지가 있다고 보기 힘들다. 특히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타 팀에서 FA 선수를 사오거나 뛰어난 스카우팅 시스템으로 전세계에서 재능들을 데려오는 빅마켓팀들의 팀 빌딩 앞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100개도 안 되는 국내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성장하고 있는 선수들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고, 즉시 전력감이나 눈에 크게 띄는 유망주는 세 손가락에 꼽힌다. 때문에 드래프트에서 하위권을 기록한 팀들이 가져가는 어드밴티지는 꽤나 크다고 볼 수 있다. 특히나 외국인 선수의 기용이 두 명으로 제한되어 국내에서 선수 수급을 계속해야 하는 프로야구 실정상 뛰어난 유망주의 확보는 몇 년 안으로 구단 전력증강으로 이어져야 자연스럽다.

 

이런저런 정황들은 프로야구 순위가 굳어지는 게 부자연스럽다고 말해주는데, 왜 또 1위는 삼성이고 9위는 한화인가? 소나타를 타고 페라리에게 레이스를 졌다면 드라이버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겠지만, 비슷한 스펙의 차로 맨날 지기만 하는 드라이버라면 질타 받아 마땅하다. 책임론 좋아하는 한국인으로서 회초리를 맞을 드라이버를 지목하라면 필자는 주저 없이 감독을 지목하겠다.

 

결국엔 감독이다

 

6 10. 올 시즌 팬들의 기억에 남은 악명 높은 경기가 있었다. 성적이 나락으로 떨어지던 한화와 기아의 진흙탕 싸움은 타 팀 팬들의 인내마저 시험할 정도로 수준 낮은 경기력을 보여 많은 프로야구팬들의 공분을 샀다. 양팀의 감독들은 무려 18명의 투수를 투입하고, 다음날 선발 투수까지 모조리 끌어 쓰며 16-15의 졸전을 기록했다. 한국 시리즈 우승자 타이틀을 놓고 벌인 승부가 아닌, 6월의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페넌트 레이스 경기에서.

 

투수가 없다.” “실책이 많다.” “프로야구의 질이 떨어졌다.” 올해 6월 쏟아져 나왔던 기사들의 논점이다. 실제로 야수의 실책이 경기를 망쳤다거나, 투수의 의지력이 프로답지 못하다는 평가는 야구팬들 사이에서나 칼럼에서나 흔한 말이다. 실망스러운 경기 직후엔 특정 선수를 욕하고, 주의를 주어야 한다는 반응이 지배적일 만큼 사람들은 선수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 싶어한다경기를 망친 선수하나 뺀다고 다음 경기가 좋아지면 감독 입장에서야 참 편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선수가 흐름에, 흐름이 선수에 영향을 받는 기이한 케미스트리를 가진 스포츠가 야구기 때문이다.

 

요컨대 덥고 습기 찬 날씨는 어린 투수의 제구력을 흔들어 놓는다. 불안한 제구는 볼넷을 낳고, 주자를 내보낸다. 살아나간 주자는 수비 시간을 늘린다. 투수와 포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야수들의 집중력은 흐려진다. 생각이 많은 포수와 제구가 불안한 투수는 타자를 빨리 처리 하지 못하고 인플레이 볼을 생산한다. 이때 집중하지 못한 야수들의 실책은 늘어난다. 안타와 실책이 겹쳐 한 회 만에 돌이킬 수 없는 점수차가 생긴다.

 

영화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의 한 장면 같지만, 사실 프로야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졸전의 패턴이다. 팬들은 절망하며 실책을 범한 선수를 질타한다. 정신 차리라고, 프로다운 수비를 하라고. 점수를 내준 실망감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은 어느 야구팬이나 같지만 냉철하게 잘잘못을 따지자면 야수보다 감독의 잘못이 크다. 투수는 야수의 실수로 무너지고, 야수는 투수의 느린 호흡에 지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다만 일반인의 눈으론 캐치할 수 없는 그 흐름을 읽으라고 두는 게 감독이다. 투수가 야수 때문에 못 던지고, 야수가 투수 때문에 못 잡으면, 그 상황은 더 이상 선수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벤치의 사인으로 공을 정해주면 배터리의 호흡은 빨라진다. 투수의 부담을 덜어줌과 동시에 야수들도 공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상황에 투수가 맞지 않다면 바꿔 줄 수 있고,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할 때는 주심에게 어필해 시간을 끌 수 있다. 오묘한 케미스트리를 읽고, 흐름을 조절하는 게 감독이다. 앉아서 구경만 하다가 팬들과 입을 모아 선수를 나무라는 감독들은 자격이 없는 것이다.


경기중 주심의 판정에 강하게 항의하는 기아 선동열 감독
<http://blog.naver.com/bobpool327/30147225197> 

다시 6 10일로 돌아가보자. 어떤 변명을 가져다 붙여도 감독의 판단착오가 겹친 탓이다. 특히 8 2점 리드에서 오랜만에 좋은 구위를 뽐내던 투수 임준섭을 내리고 마무리 어센시오에게 아웃카운트 다섯 개를 맡긴 기아 선동열 감독의 판단은 동점 홈런과 그 이후 선발투수 김진우의 고갈, 한승혁의 패전으로 이어져 올 시즌 최악의 투수교체라는 멍에를 쓰게 되었다. 단순한 투수 교체 타이밍 미스를 넘어 감독이 승기를 완전히 꺾어버린 가슴 아픈 판단이었다. 선수 육성에서의 문제점 또한 같은 경기에서 드러났다. 9회 초에 끝난 경기에 18명이나 되는 투수가 필요했던 이유는 긴 이닝을 던져줄 투수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발 투수가 컨디션 난조로 많은 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내려와야 하는 경우는 충분히 생길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뒤에서 몇 이닝씩 던져줄 수 있는 롱 릴리프 투수. 긴 시즌을 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유형의 투수임과 동시에 한화와 기아 모두 갖추지 못했던 부분이다. 이미 부임 첫 시즌이 아닌 양 팀 감독은 준비 부족이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유연해져야 한다

 

하위 팀일수록 좋은 원석이 많이 들어오는 게 한국 프로야구다. 양상문 감독이 탑 클래스 유망주로 인정 받지 못하던 장원준과 강민호를 리그 최정상급 선수로 키워냈듯, 다른 감독들도 선수 육성에 조금 더 힘을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올해 가장 존재감을 내보인 신인 야수라면 대다수의 팬들은 삼성의 박해민을 뽑을 것이다. 3년 연속 한국 시리즈 우승팀에서 최고 신인이 나온 현실은 타팀의 원석들이 제대로 제련되고 있지 못하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올해 삼성의 페넌트 레이스 우승은 확정적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이미 삼성의 유아독존 페이스가 향후 몇 년 간 프로야구 긴장감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는 상황에, 2위 넥센과 3 NC의 올 시즌 돌풍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넥센 타선의 최고 무게감은 무명시절부터 넥센 구단이 키워낸 박병호고, NC는 이제 2년 차를 밟은 어린 구단이다. 이 둘의 선전이 우연이라기보다는 국내 프로야구에서 신인육성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목이라는 생각과 함께 구단 프런트들이 올 시즌 초와 같은 FA 사재기보다 신인 발굴에 앞장서 더 치열하고 짜릿한 프로야구를 만들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