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첫 겨울. 갑자기 부산해진 바깥소리에 놀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나는 나를 만류하던 룸메이트를 뒤로한 채 운동복에 검은 재킷만을 걸치고는 호기심에 좁은 기숙사 방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 그 붉은 숫자가 하나둘씩 줄어가는 걸 가만히 바라봤고, 어느새 열린 문을 또 한번 나서며 언뜻 본 밖의 거리가 수많은 경찰차들이 어지럽게 흔들던 적색과 청색 불빛으로 물들어 있음을 보았다. 어디선가 한 여자가 확성기를 입에 대고 지르던 고함이 나의 귓가에 선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숨을 쉴 수 없다,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그렇게 외롭게 외치고 있었다.
거리에 나서니 저만치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앞이 보이지 않아 까치발을 들던 뒤쪽 무리를 헤치며 조금씩 앞으로 나서니 태어나 처음 본 전투 경찰들이 곤봉을 든 채 미동조차 않고 있었고,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 조용히 건물 외벽에 기대 경찰들을 지켜보던 나는 우연히 지나치던 한 친구를 불러 세워 어떤 상황인지 아느냐 물었다. 인종차별 같은 것에 대한 시위인 것 같다, 그저 근처에 주차된 자기 차를 지키러 나왔다 말을 늘어놓던 친구는 어느새 또 다른 친구를 만나 금세 어딘가로 사라졌고, 무언가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에 나는 홀로 같은 자리에 서서 조금씩 고조되던 상황을 다시 지켜보고 있었다. 확성기의 그 여자가 보였다. 백인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타인의 싸움을 싸우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집으로 돌아가라던 말을 반복하던 경찰의 확성기가 점차 잠잠해지더니 한 줄로 선 진압대가 곤봉을 쥔 채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싶어 반대쪽을 바라보니 또 다른 진압대가 있었고, 나갈 길을 찾지 못해 멀뚱히 서있던 내 앞의 또래 흑인 학생은 경찰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그리고 답례로 곤봉을 뻗던 그 경찰 또한 흑인이었다. 또래의 가슴팍에 꽃히던 검고 흉측한 곤봉에 정신을 차린 나는 옆 주택가로 뛰어가던 한 무리를 따라, 쫓긴다는 두려움에 생각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막다른 길을 마주해, 함께 갇혀버린 학생들과 상황이 정리되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고함소리가 들렸고, 옅은 최루탄 냄새를 맡았다. 그래도 아직은 젊은 밤이었다.
시간은 거리를 다시금 잠잠하게 했다. 그렇게 피로해진 몸으로 그 골목을 다시 빠져나와 기숙사로 터벅터벅 걸어가다 고무 총알이 든 산탄총을 둘러맨, 몇 시간 전 내게 물러서라 소리치던 경찰들이 피자를 들고 서로에게 농담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끝내 도착한 기숙사 앞에서 담뱃불을 붙이고 있자니 갑자기 내 앞에 선 차 한대에서 한껏 술에 취한 학생들이 낄낄거리며 하나둘 내렸다. 긴장이 풀려서 였을까, 갑자기 몰려오던 피로함에 반만 핀 담배를 길가에 던져 밟고는 다시 방으로 향했다. 슬리퍼 바람으로 뛴 바람에 까진 발이 쓰라렸다. 자고 있던 룸메이트를 깨우지 않으려 조용히 침대 안으로 들어갔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흑인 학생의 흉곽을 찌르던 그 흑인 경찰의 모습이, 그 아이러니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매서웠던 겨울의 갑작스러운 폭력성에 혼란을 느낀 나는 아침 홀로 버스를 타고 마리나로 향했다. 두터운 재킷 주머니에 손을 꽃은 채 잎사귀가 떨어진 나무들 사이로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목적 없이 걸음을 옮기다 아직은 낯선 땅에서 느낀 이질감에 끝없이 변화하는 삶에 대한 회의감, 그리고 적막함을 느꼈다. 말주변 하나 없이 사람들과 공감하지 못하던 나는 무언가 잘못된 실수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외로움 또한 느꼈다. 최루탄 냄새가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걷다 어느덧 보이던 물가에 가만히 서 저 멀리의 붉은 다리를 바라보던 내 귓가의 이어폰에서는 밍거스가 더블베이스를 치고 있었고, 60년대 흑인 재즈에서 공민권운동이라는 뭔가 진부한 교차점을 찾은것 같아 피식하고 홀로 웃었다.
인종 간 우월주의와 차별이라는 부조리에 반항하던 60년대의 젊은 흑인 음악가들은, 각자의 양복과 드레스를 꺼내 입으며 시대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때로는 음악 속에 담아냈다. 지독히도 솔직한 그 표현 방법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가슴 여미도록 아름다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오십 년 세월이 지난 뒤의 같은 그 음악은 그저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를 싸우던 나 또한 타인이나 이념 따위를 위해 싸울 수 있는가를 묻게 했다. 삶의 의미에 대한 결론을 아직 내리지 못한 나의 적 없는 싸움은 무자비하게 또래를 내려치던 검은 곤봉으로부터의 도망이었는지, 미래에 대한 끝없는 불확실함, 혹은 홀로 바다를 바라보며 느끼던 외로움이었는지.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젊은 우리의 삶은 마치 불협화음과 엇박자 속의 재즈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다소 무질서하지만, 또 돌아보면 그만의 아름다움을 내포한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듯한 생각이 들 때 시위대 사이에서 확성기를 들고 엄포를 놓던 그 여자를 기억해 낸다. 가끔은 그렇게 '아니다', '틀린것이다' 하고 종을 울리는 용기또한 필요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실상 오늘날 나의 모습은 곤봉이 두려워 정신없이 도망치던 그 구경꾼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은 되지 못한다. 노력하고 있다, 그뿐이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이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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