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에서의 첫 학기 첫날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처음 캠퍼스를 거닐던 그 날,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고, 선선히 불어오던 가을바람이 상쾌하던 날이었다. 대학교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부푼 설렘을 가지고 수업을 들었고, 교수의 한 마디도 놓치기 싫어 쉴 새 없이 빳빳한 새 공책에 필기했다. 수업이 끝나고서는 많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함께 기숙사 라운지에서 어떤 수업들을 들어야 하는지, 어떤 교수가 점수를 더 잘 주는지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밤이 되면 친구들과 여기저기서 열리는 이벤트에 가서 선배들을 만나고 자기소개를 하고, 그렇게 지쳐 돌아와 시끌벅적한 하루를 마치곤 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쏟아지는 인간관계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며 나의 1학년은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갔다.
2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버클리로 돌아온 나는 막내에서 어느덧 선배가 되어 있었고 형, 오빠라는 생소하기만 했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았던 신입생의 몽롱함은 이제 더 이상 없었고, 대학에서의 생활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버클리의 내 방이 한국보다 더 편하고 내 집처럼 느껴졌고, 나의 시야 또한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에 온 신경을 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려 노력했던 전과 달리, 진짜 나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고 고민했다. 자연스레 학업에도 더 열중하게 되었고, 나만의 균형과 중심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가치들을 저울질하였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것인지, 심지어 내가 길 위를 걷고 있기는 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동시에 그저 앞에 놓여있는 것들을 잘 해내자는 마음으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나는 4학년이 되었고, 돌아보면 지금의 나는 전에 비해 훨씬 차분하고 어찌 보면 무덤덤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들려오는 수많은 가십거리나 온갖 소문들 역시 언제쯤 한번 들어봄 직한 이야기들이었으며, 그저 자연스레 벌어지는 일이려니 하게 되었다. 쏟아지는 과제와 시험의 스트레스에도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으며, 매번 툴툴거리면서도 그저 할 일을 할 뿐이었다. 2, 3학년 동안 스스로 던졌던 수많은 질문에도 어느 정도 나만의 답을 찾게 되었고,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문득문득 예전이 그리워질 때가 있어도, 이제는 지금의 내가 더 좋다. 이유 없이 신나고 즐거웠던 1학년, 눈앞의 일에 정신없이 몰두했던 2학년, 끝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던 3학년. 이 시간이 쌓여 현재의 나를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믿으니 말이다.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무게가 생겨났다. “넌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어?” 라는 질문이 친구들을 만나면 으레 묻게 되는 안부 인사처럼 되었으며, 멀게만 느껴졌던 취업, 연봉과 같던 단어들이 피부로 와 닿기 시작했다. 실제로 알고 있던 많은 사람이 학생에서 직장인이 되어 학교를 떠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 역시 학생이 아닌 것만 같다. 학생과 직장인의 애매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 또 미국에 남아 일을 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불평불만과 충고들을 비교해가며 앞으로의 나의 삶을 설계해 나가야만 했고, 학업에만 열중하면 되었던 지난 3년과 달리 인생은 나에게 훨씬 더 멀리서 큰 그림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직 졸업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았지만, 이제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취업뿐만 아니라 대학원 진학 등 다양한 갈림길이 있지만, 또 다른 인생의 중요한 출발점을 정해야 한다는 압박은 어느 4학년에게나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여태껏 버클리에서의 삶이라는 건축물을 차근차근 지어왔다면 이제는 그에 대한 나 스스로의 평가를 하는 시간이 되었고, 또 남들의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A4 용지 한 장의 이력서에 4년간의 생활을 차곡차곡 채워 넣고 이를 바라보면서 아득한 후회와 아쉬움,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의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무언가 그럴듯하고 전문적인 단어들을 잔뜩 써넣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비해 내가 한 일들은 왜 이리 단순한 것인지. 해놓은 일들이 많은 것만 같았는데 막상 그 종이 한 장을 알차게 채우기는 왜 이렇게 힘든 것인지. 취미로 했던 전공과 관련 없는 동아리 활동들은 왜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것만 같은지. 온갖 고민과 함께 나 자신을 포장한다.
나뿐만이 아닌 모든 버클리의 4학년 학생들이 비슷한 종류의 고민을 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학교생활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고, 학업에도 신경 쓰면서 학생이 아닐 때의 내 모습을 그려가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아직 자신은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 좋은, 많은 옵션을 만들기 위해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여 평가하다 보면, 무언가 더 앞서가고 있는 듯한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 못한 것, 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끝이 없으니 말이다. 누가 어느 회사에 들어가서 엄청난 고액의 연봉을 받는다더라는 식으로 들려오는 이야기, 주변의 시선이나 기대는 그러한 후회에 불을 붙인다. 다른 전공을 택할걸, 학점에 좀 더 신경을 쓸 걸 과 같이 수도 없는 고민에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필자는 혹여나 그런 헤어나올 수 없는 비교의 늪에 빠져 나 자신을 잃지 말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적절한 비교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끊임없는 열등감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완벽히 준비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화 <미생>에서 김동식 대리는 계약직 신입사원 장그래에게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을 하나하나 열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고, 오히려 성공은 자신이 그 순간에 부여하는 의미에 달린 문제라고 말이다. 아직 뚜렷이 이룬 것 없이 사회에 나가야만 하는 것 같은 불안함과 두려움들. 어찌 보면 4학년이라면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또 하나의 문일 뿐이다.
함께 고민하고 걱정하는 4학년으로서, 열심히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칭찬의 박수를, 뒤처졌다고 생각되어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용기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비록 사람마다 다른 경험과 생각을 하고 있을 테고 나 스스로 역시 수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나 혼자만의 고민이라고, 또 혼자 뒤처져있다고 자책하지 말자. 지난 3년의 대학생활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이, 이 머리가 터질듯이 복잡한 마지막 1년 역시 더 성숙하고 단단한 우리를 만들어 줄테니 말이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친구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 가사를 덧붙이며 이 글을 마친다.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넌 행복해야해 행복해야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
- 브로콜리 너마저 <졸업>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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