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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문예 :: Literature

흙냄새, 사람냄새





my favorite thing about you is your smell

you smell like
earth
herbs
gardens
a little more 
human than the rest of us

          -    Rupi Kaur






[1]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저녁이었다. 런던의 밤거리는 여덟시가 넘어서도 따뜻한 불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고, 처음으로 홀로 나선 여행에 들뜬 나의 설렘은 그 불빛에 혹했다. 이상하게 그날은 우산 없이 맞는 빗방울이 차갑기보다 포근했고, 온종일 시내를 누벼서 지친 두 발목의 저릿함마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분에 휩싸일 만큼 나는 런던에 잔뜩 취해있었나 보다. 며칠 안 남은 그곳에서의 시간이 아쉬웠던 마음도 있었던 걸까. 숙소로 향하다 말고 들고 있던 지도를 너덜너덜해진 모서리를 따라 대충 접어서 찬바람에 아려오는 손과 함께 점퍼 주머니 깊숙이 찔러넣은 채, 옥스퍼드 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토록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그토록 그리운 냄새를 찾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2]




    유독 눈에 띄는 건물 양식에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킨 터줏대감임이 한눈에 보이는 Liberty 백화점. 그곳 일 층에는 꽤 널찍한 꽃집이 있었다. 작은 화분 속에서 신기하게 잘 자라고 있는 나무도 보였고한 손은 엄마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에는 분홍빛의 튤립 한 송이를 들고 있는 꼬마 아가씨도 보였다. 그 예쁜 풍경을 좀 더 구경할 겸, 잠깐 비와 추위도 피할 겸, 나도 그 꽃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가 와서 그런지 꽃향기가 더 진하게 풍기는 듯했다. 혹은 행복해 보이는 꽃집 안의 사람들 덕에 꽃향기가 더 진하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짙은 꽃향기의 중심에는 가게 주인처럼 보이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흙이 잔뜩 묻은 맨손의 할아버지는 작은 테이블에서 분주히 허브 모종을 정리하시다가 문이 열리면서 울리는 종소리에 고개를 들고 내게 활짝 웃으며 인사해주셨다. 새하얀 백발의 수염과 부드럽게 주름이 잡히는 반달 눈에서 산타클로스가 생각나는 그런 미소였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이 맞는 것이, 주인 할아버지는 정말 산타클로스였던 것 같다. 반갑게 맞아주신 할아버지와 테이블에 기대 몇 마디 나누다가 내 탄생화 버베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셨을 때였다. 백화점 방향 입구에서 한 여자아이가 총총걸음으로 달려오더니 자신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높은 테이블을 잡고 까치발을 들어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게 그러셨던 것처럼 다시 한번 활짝 웃으며 꼬마 손님을 맞으셨다.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 할아버지께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오늘이 엄마 생신인데 엄마가 제일 좋아하시는 장미를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아이가 대견하셨는지, 꼬마를 번쩍 안아 들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함께 노란색의 장미를 골라 오셨다





[3]




    아이를 테이블에 앉혀놓고 할아버지께서 꽃을 포장하시는 동안 나는 아이에게 엄마는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 하며 소곤소곤 백화점 안에 계시다고 하는 걸로 보아 엄마 몰래 온 눈치였다. 엄마 몰래 왔으니 당연히 돈도 없었을 것이다. 역시나, 정성스럽게 포장된 꽃을 받아든 아이는 스웨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더니 가장 아끼는 반지라며 할아버지 손에 쥐여 드렸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엘사 얼굴이 그려진 장난감 반지였다. 할아버지와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크게 소리내어 웃었고, 아이는 뿌듯한 얼굴로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고맙다고 말씀하시고는 잠깐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고 꽃집을 나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아이는 내게 엄마 생일파티 계획을 들려주었고, 마치 자신의 생일파티인양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한창 재잘재잘 떠들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한 손에 케익 상자를 들고 들어오셨다. 반지를 아이 손가락에 끼워주고는 케익을 건네주면서 할아버지는 엄마의 깜짝 생일파티가 성공하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아이에게 작별인사를 하셨다.





[4]




    할아버지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 대신 10 파운드화 한 장을 테이블 위에 두고 나도 꽃집을 나왔다. 창문으로 백합 화분에 물을 주고 계시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문득 화려한 꽃들보다 다시 묵묵히 일하고 계시는 할아버지 손가락 사이사이의 흙에 더 눈이 갔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 화려한 백화점 건물 안에 때 묻은 앞치마를 둘러매고 방금 들어간 다음 손님도 환하게 맞아주시는 할아버지가 가장 빛나 보였다. 어떤 손님이 들어오든, 미소 한 번 짓지 않고 그 꽃집을 나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 같았다. 그곳의 꽃향기를 만드는 건 꽃이 아니라 꽃을 품고 있는 흙이었고, 그곳의 행복을 만드는 건 백화점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손님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할아버지의 정이었다. 이슬비 내리는 런던의 겨울밤과 참 잘 어울리는 산타클로스 한 분이셨다.


    꽃집에 여러 식물이 있듯이,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도 있고, 여린 꽃도 있다. 매혹적인 허브도 있고, 강인한 선인장도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눈에 띄진 않지만 우직하게 담아내고 있는 흙을 닮은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이 늘 그리웠다. 치열하고 각박한 하루하루를 살아도 인간다움의 불씨를 지키고 그 적당한 온도를 주변에 나눠주는 사람. 실수와 결함, 무능과 나약함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 정신없는 하루 중에도 말없이 다른 사람에게 행복한 1분을 선물하는 그런 사람. 이런 게 진짜 사람냄새인가 싶은 그 냄새가 좋아서 나는 꽃집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며 나만의 산타클로스에게 흙내음과 가장 닮은 향수를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진 출처:


[1] https://crated.com/art/20607/trafalgar-square-rain-by-heidihermes?product=FP&size=12%7C18&frame=BF&edge=250MA

[2] http://www.travelettes.net/liberty-the-shopping-emporium-of-london/

[3] http://umad.com/img/2015/5/yellow-rose-wallpaper-background-10351-10765-hd-wallpapers.jpg

[4] http://betterhousekeeper.com/2015/02/16/10-different-ways-you-can-use-coffee-grounds-in-your-home-from-fertilizing-your-garden-to-deodorizing-your-f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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