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연히 너의 사진을 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SNS를 구경하던 중 친한 지인의 게시물에서 오랜만이지만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너였다.
너는 연애 시절부터 그 흔한 SNS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헤어진 후 너의 모습은 아직도 헤어진 그 날에 멈춰 있었다. 내 기억 속 너의 모습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너의 모습을 보니, 우리가 헤어진 후 오랫동안 접어 두었던 연애 기간의 모든 기억이 마치 빨리 감기 한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1]
친구를 따라 우연히 들어가게 된 동아리. 첫 모임 날, 문을 열고 들어간 그 순간, 내 첫사랑은 시작되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 따위는 영화에서 만들어 낸 허구일 뿐이라고 비웃던 나에게 보란 듯이 너는 반례가 되어주었다. 그 날 이후로 나의 일과는 너로 시작해서 너로 끝났지만, 너의 인생에는 변함없이 나란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처음 해보는 짝사랑은 지겹도록 아팠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감정과 가장 슬픈 감정을 같은 시간에 느낄 수 있다니. 오랜 기간 짝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일상생활이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짝사랑은 아팠다. 모든 이에게 친절했고, 당연히 모든 이에게 인기가 많았던 너는 내가 다가가기엔 큰 산 같은 존재였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상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주위에 가까운 이들에게 조언을 구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는 절대 안 된다는 말. 나와 정말 가까웠던 한 친구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했었다. “네가 그 여자와 만날 확률은, 시곗바늘이 반 시계 방향으로 돌 확률하고 비슷할 거야.” 그날 이후로 나는 신에게 단 하루만이라도 시계를 반대로 돌려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기적을 바라며 너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네가 나를 봐줄 때까지. 매일 도서관을 함께 가기 시작했고, 기숙사에 너를 데려다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관심도 없던 너의 일상에 점점 나의 자리가 생기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 너는 도서관에서 나를 위해 너의 옆자리를 잡아 주기 시작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안했다. 당시 너에게 나의 위치는 함께 공부하는 친구, 혹은 집에 갈 때 말동무 정도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던 건, 어느 날 네가 아무 생각 없이 던졌던 말 한마디였다. “나는 연애라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 지금 나에게 우선순위들이 너무나 많은데, 연애를 하면 내 우선순위들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 그러나 이미 나의 우선순위는 너였고, 너와 함께 있어야만 내 다른 일들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중요한 일들은 네 생각에 눌려버렸으니까.
그 얘기를 들은 후 나는 고백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매일매일 너를 바래다주는 길에 내 마음을 고백하는 일을 참아야 했고, 그래야만 지금의 사이라도 지키며 너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그릇은 크기가 있고, 아무리 큰 그릇이더라도 물을 붓다 보면 언젠가는 넘치게 되어있지 않던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로 함께 공부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나는 내 마음의 그릇이 가득 찼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하는 연락의 빈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자주 연락하면, 내 마음을 숨기지 못할 것 같았던 이유 하나 때문에, 그리고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은 나와 다를 것이라는 생각 하나 때문에. 언젠가 우연히 너와의 카톡을 보던 중, 나의 카톡에는 물음표가 가득하고, 너의 카톡에는 점과 느낌표만 가득하다는 걸 보게 되었다. 그 카톡을 본 뒤, 나는 너의 마음에 대한 물음표가 생겼고, 결국 연락을 줄여서 네가 느낄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는 느낌표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연락을 줄일수록, 나는 깨닫게 되었다. 연락을 줄인다고 마음마저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연락을 줄이자, 너에게 오는 연락이 더욱 간절해지고 가끔의 연락에 마음을 더 싣게 될 뿐이었고, 널 향한 내 마음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그래서 난 결국 이 어려운 문제의 해답을 찾았다. 너에게 고백하는 것. 너에게 시원하게 차여서 더 이상 친구마저 되지 않는 것, 혹은 하늘에서 기적이 일어나 시계가 반대로 돌아가는 것.
[3]
참아왔던 고백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결국 너에게 고백했다. 어쩔 수 없이 얘기는 했지만, 나는 너무나 불안했다. 혹시 이제 더 이상 너를 보지 못하면 어쩌지. 혹시라도 차이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하고 말이다. 불안에 떨고 있던 나에게 넌 대답을 주는 대신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너는 조심스레 나에게 한쪽 손을 내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그 날 이후로 넌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에게 사랑이 되어주었다. 3년간의 연애 동안, 우리는 누구보다 행복한 커플이었고, 누구보다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너는 언제나 내 이상형이자, 이상향이었고, 나의 첫사랑이자, 나의 마지막 사랑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졸업 한 뒤 시작된 장거리 연애. 3년간의 아름다웠던 시간이 무색하리 만치 우리의 사랑은 빠르게 식어갔다. 사랑을 쌓아가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사랑을 버티기 시작했고, 진한 사랑은 나도 모르는 사이 지난 사랑이 되어버렸다. 결국, 그렇게 우리는 이별했다.
이별한 뒤에 난 너무도 아팠다. 사랑에 언제나 이기적이었던 나는, 이별한 뒤에도 이기적이었다. 나의 아픔을 참을 수 없어 울고, 너를 욕하고, 우리가 사랑했던 기간을 부정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결국 부정당하는 건 내 존재였다. 너와 함께했던 모든 기간 동안 내 인생은 너였고, 너를 지운 내 과거는 흔적조차 없는 빈 공간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사랑은 시간이 잊게 해준다고, 혹은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거라며 다른 사람을 만나보라 권유했다. 운 좋게도, 백지였던 나를 아름답게 물들여준 네 덕분에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었고, 그 덕분에 몇몇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너로 가득한 내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공간은 없었고, 너를 비우는 시간이 필요했다. 3년을 만났으니 석 달이면 되겠지 했던 너를 비우는 기간은, 결국 1년이 되었고, 3년이 되었다.
[4]
너와 헤어진 지 3년쯤 되던 어느 날,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술자리가 무르익자 자연스레 너의 이야기가 나왔다. 친한 친구들을 내 눈치를 봤지만, 나는 이상하리 만치 아무렇지 않았다. 너와 헤어질 무렵 친구들의 말처럼, 시간은 결국 나의 아픔을 해결해주었고, 이제 나는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는 말을 비웃을 수 있을 만큼 예전의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사진 속 너를 다시 마주했다. 사진 속 너의 모습을 보자마자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랑과는 다르지만, 아프지도 않지만, 특별한 느낌.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련함” 정도라면 이 기분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필름처럼 지나간 너와의 기억을 되돌아보니, 우린 참 특별한 사랑을 했고, 흔한 이별을 했던 것 같다. 다행히 너는 나에게 아름다운 첫사랑이자, 인생의 스승이자, 반가운 인연으로 남았다. 나에게 너도 그런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너와 헤어지고 마음이 정리된 뒤에도 지금껏 나는 새로운 연애를 하지 않았다. 물론 설렘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연애하기엔 너무 바쁘고 치열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사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오늘 너의 사진을 본 뒤, 나는 사랑에 빠져 있던 행복한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었고,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이별한 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너에게 사랑을 배운다.
출처:
[1] https://i.ytimg.com/vi/NM-NtrpB7Q8/maxresdefault.jpg
[2]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32D283C55DE711621
[3]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23FEF4856823C110B
[4] http://mblogthumb4.phinf.naver.net/20160203_103/huniblog_1454498652698BEr53_PNG/KakaoTalk_20160202_171015199.png?type=w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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