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포토]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무시하고,
자신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입으로만 선한 악마입니다.”
유독 안타깝고 슬픈 소식이 많았던 작년 연말, 하나의 기사에 필자의 가슴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또 한 명의 어린 학생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에 더해, 세상을 저버리려 하기 전 남긴 유서에 담겨있는 어른을 향한 불신과 실망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학교폭력 사건의 수와 성장기 청소년의 자살 시도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어린이들이 어른에게 가지는 신뢰와 믿음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해당 학생은 몇 달의 시간 동안 같은 반 학생들에게 성적, 육체적 폭력을 당해왔다. 그리고 그에 대해 두려움과 불편을 지속해서 학교와 담임 선생님에게 표출해 왔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위해 나서주지 않았다. 문제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를 벌하려 하지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가해 학생의 어머니 역시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아이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식에게 자신이 피해 학생의 부모에게 약속한 대로 ‘주의를 주는 것’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교단에 서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니.
현재 필자는 공립 초등학교 부속 유치원에서 오후반 교사로 일하고 있다. 학교란, 유치원생처럼 어릴수록, 아이들이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보내는 곳이다. 하물며, 저녁 6시에 마치는 오후반이 끝날 때까지 남아있는 아이들은 주중에 부모님을 보는 시간보다 선생님과 보내는 시간이 더 길만큼 학교는 아이들의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장소다. 아이에게는 집 밖에서 접하는 첫 사회생활이며, 그 세계에 중심으로 보이는 선생님은 부모님 대신이 되는, 그 안에서 믿고 따르며 제일 큰 영향을 주는 존재일 것이다.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본다 해도 이 사실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학교 안에서의 제일 어른은 선생님이었고, 선생님의 말씀은 곧 그 울타리 안에서의 법이었다. 그런 선생님이 막상 되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컸다. 자주 일어나는 상황 중 하나를 예시로 들어보겠다. 유치원생을 가르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싸우는 아이들을 말려야 하고, 다친 아이들을 치료해야 하며, 온종일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지내야 한다. 이제 막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고, 나눔과 기다림을 터득해 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는 중재자는 역시 선생님이다. 주로 싸움과 중재 패턴은 이렇게 흘러간다.
한 아이가 공을 가지고 놀고 있다. 다른 아이가 그 공에 관심을 보이며 아이를 따라다닌다. 원래 공을 가지고 있던 아이는 그 아이와 공을 나누고 싶지 않다. 싫다고 소리치거나 “안 줄거야!”라고 외치며 도망간다. 공에 관심을 보이던 아이는 이제 약이 올라 끝까지 그 아이를 추격해 공을 뺏으려 한다. 공을 뺏기기 싫어 끝까지 저항하던 아이는 결국 화난 다른 아이에게 주먹으로 머리를 꿍 맞는다. 머리를 맞은 아이는 나쁜 친구가 있다며 나보고 그 아이를 혼내달라고 한다.
이 상황을 차례대로 정리해놓고 나면 결국 둘 다 잘못된 행동을 한 상황이다. 한 명은 나누지 않고 욕심을 부렸고, 한 명은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그럼 보통 시간을 들여 각 아이의 슬픔과 화를 공감해주고, 그 아이가 잘못한 점을 이해시킨다. “이 공을 가지고 노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너만 계속 가지고 놀고 싶었구나? 하지만 그만큼 다른 아이들도 이 공을 재미있어하고 가지고 놀고 싶을 거야. 같이 가지고 놀기 싫다면, 공평하게 한 번씩 차례를 가지는 건 어떨까?” “친구가 너에게 공을 나눠주지 않아서 화난 것은 당연하지만, 주먹으로 친구를 때린 건 당연하지 않아.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건 그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야. 앞으로는 주먹보다 먼저 말을 사용하자.”
하지만 아무리 고운 말은 사용해서 찬찬히 이해시킨다고 한들, 5살짜리 아이들이 얼마나 빨리 배우고 성장하겠는가? 그 이후로도 세 번 네 번씩 같은 이유로 싸우고 울며, 똑같은 설명을 하게 만든다. 이런 일은 차라리 논리적인 진행 상황이라도 있지, 가끔은 이럴 때도 있다. 간식 시간에 옆에 앉아있는 아이가 마술을 보여준답시고 몇 번이고 한 아이의 어깨를 때리는 것이다. 그럼 그 아이는 맞을 때마다 와서 그 행동을 일러바치고, 나는 때린 아이에게 가서 그 행동을 타이른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 아이는 다른 아이에게 같은 장난을 쳤을 때는 안 좋은 반응이 아니었다며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반응이 좋든 좋지 않든 누군가를 때리는 행동은 그 사람을 다치게 하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다섯 번쯤 반복하고 나면, 심적으로 매우 피폐해지며 무섭게도 이미 할 만큼 했으니 다음에 또 온다면 그때는 그냥 눈감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여섯 번째로 마술사 아이에게 맞았다고 일러바치러 온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네가 자리를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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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상황에서 맞는 아이의 자리를 옮기는 것은 내가 더는 똑같은 말로 마술사 아이를 타이를 필요 없고, 그 아이가 더는 맞지 않아도 될 합리적인 솔루션이긴 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 마술사 아이는 주변 다른 아이를 손쉽게 다음 표적으로 만들 수 있고, 맞은 아이들의 심리적 상처는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이 상황이 유치원생의 장난을 넘어선,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이 같은 반 학생에게 가하는 큰 심리적, 육체적, 성적 폭력이라면? 우리가 한순간 피곤해서, 짜증 나서, 귀찮아서 무심코 넘긴 상황 하나가 도움을 청하러 온 학생의 마지막 용기였다면? 마지막 믿음이었다면?
너희는 아직 자라고 있어, 너희가 해결하기엔 힘들 수 있어, 너희는 아직 미숙해, 라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가르침을 준 건 어른이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우리는 그것을 잡지는 못할망정 못 본 체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학교는 특히나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하기 위해, 아직은 완벽히 성장하지 못한 아이들을 준비시키고 보호해 주기 위해 있는 공간이다. 게다가 그 공간 안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는 어른인 선생님은 학교에 있는 동안만큼은 아이들의 보호와 성장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선생님이 할 일이 많아 부담이 크고 여유가 없어서 아이들의 힘듦을 헤아려주지 못할 정도라면, 그 아이들은 자신이 지는 무게를 얼마나 더 무거워하고 힘겨워하고 있을까. 유서 속 저 말을 남긴 채 세상을 등지려 했던 6학년 아이는 얼마나 큰 고통과 상처를 받아왔을까. 얼마나 큰 노력과 믿음이 무시당했을까. 그렇게 든든한 미소로 힘들 땐 언제든 얘기하라던 어른들이 얼마나 많이 그 차가운 등을 보였을까.
물론, 선생님도 어른이기 전에 사람인지라 충분히 힘들 수 있다. 가끔 “네가 자리를 옮겨”라며 문제를 잠시 회피하는 나와 같이, 얼마든지 한두 번은 눈감은 채 넘어가고 싶을 수 있다. 그러니 언제나 먼저 힘들어 보이는 아이들에게 다가가라는 소리도 아니고, 잘못된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매번 찾아가 훈계를 하라는 소리도 아니다. 그저 도움을 청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때는 외면하기보다 그 아이가 하는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라는 것이다. 피곤하더라도 한 번만 더 손을 잡아주고 편이 되어주라는 얘기다. 애초에 그렇게 하려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 본보기가 되는 어른이 될 의지가 있어서 선생님이 된 것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면 왜 굳이 선생님이 되어 한 반의 아이들을 무관심으로 대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특히나 앞으로 교육자의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았으면 좋겠다. 나는 아이들과 친하게 잘 지내고 종일 아이들과 보낼 자신이 있으니까 같은 이유로, 평생 벌어 먹고살 수 있는 공무원직이라는 이유로 교육을 쉽게 보고 발을 들인다면, 느끼게 될 것이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말투 하나하나가, 어제와 달라 보이는 표정 하나하나가 아이의 하루에 해를 띄우기도 하고 먹구름을 덮기도 하며, 아이가 세상과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에 변화를 주고, 받아들이는 생각의 깊이를 달리한다는 것을. 그리고 두려워질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 맞는 사람인지, 이 부담을 견뎌낼 정도로 올바른 사람인지. 나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기 때문에, 꾸준히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하여.
필자는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학교폭력을 근절시킬 능력이 있는 교사도, 아이는 이렇게 이끌어야 한다며 모든 학부모와 교사를 가르칠 자격이 있는 교육 전문가도 아니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를 듣고 최대한 밝은 미래로 그들을 끌어주고 싶은 생각에 선생이 되기로 한, 본인 역시 많은 연습과 성장이 필요한 어른이다. 그렇기에 더욱 노력할 것이다. 한 명이라도 그 목소리가 무시당해 뒤처지지 않도록, 짧게라도 필요한 학생 모두에게 나의 진심 어린 관심과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당신도 그래 주길 바란다. 선생님이라면 가까이에서 힘들어하는 학생에게 한 번이라도 더 진심으로 다가가자. 교육의 길을 걷고 있지 않은 그저 보통의 어른일 뿐이라도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자. 주변에 위태로워 보이는 아이가 있다면 부디 한 번만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주길 바란다. 당신이 그 아이를 외면하지 않는 유일한, 혹은 슬픈 결심을 한 아이가 마주치는 마지막 어른이 될 수도 있으니. 아이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믿을 수 있고 듬직한 존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의식적으로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주자. 그 아이들이 내미는 손을 무시하지 말고 가능한 한 힘껏 잡아주자.
유언 속 악마라는 단어가 희미해질 수 있도록.
기사 출처:
http://www.civic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88
사진 출처:
[커버포토] http://www.sheknows.com/parenting/articles/1136711/subtle-signs-of-bullying
[1] http://www.picturebook-illust.com/upload_board/new_Gallery/ThumbNail/t/thumb_20182131401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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