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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9

21. 공기에 배어있는 짙은 향수만큼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다. 특별히 다를 것 없는 단조로운 하루 속에 난데없이 코로 훅 들어오는, 익숙한 “그 날의 향”. 엄마와 토요일 장날 순대를 사러 102동 앞으로 내려가던 내리막길에서 맡았던 냄새, 매미가 찌르르 울던 여름날 친구와 폴라포 하나씩 입에 물고 집에 가던 하굣길에서 맡았던 냄새. 유난히 소소하고 유난히 사소해 알록달록한 기억의 프랙털 저편에 숨어있던, 소소하고 사소하게 행복했던 순간들. 그날의 태양 역시 오늘의 태양과 분명 같은 놈이었을텐데. 햇빛의 땅 캘리포니아, 눈이 시리게 밝은 이곳의 태양은 날 슬프게 하는구나. 한창 초점 잃은 눈으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버스가 도착해 나를 태우고, 나는 버스의 정해진 경로를 따라 이동된다. 형언할.. 2018. 10. 24.
스무 살 최정윤 [cover] [1] 1.열아홉의 나는 달을 사랑했다. 쳇바퀴 돌 듯 굴러가는 반복적인 일상의 흐름 속에 지친 채, 불 꺼진 깜깜한 방을 더듬어 찾아간 침대에 몸을 뉘고 나면 밤하늘이 내게 쏟아졌다. 제주의 밤하늘이었다. 어두운 듯 태양의 빛을 살짝 머금고 있는 검은 하늘에 끝없이 펼쳐진 별들의 발자국, 그리고 외로운 달을 바라보는 것은 내 하루의 마지막 일과였다. 달빛이 나를 감싸 쉬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다음 날 하늘에 달이 없으면 묘연한 그 행방을 고민하다 잠이 들곤 하는. 나는 달에 많은 것을 말하고 많은 것을 보였다. 2.참, 돌이켜보면 그랬다. 열아홉의 나는 나의 밤하늘을 살짝 들췄을 때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핑크빛 구름, 따사로운 바람, 무지갯빛 오로라 따위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 2017. 12. 2.
건빵과 별사탕 [cover] 언제부터인가 내 옆자리에 네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부스스한 머리로 잠에서 깼을 때, 누가 더 많이 먹는지 내기를 하고 올챙이처럼 볼록 나온 배를 두드리며 한숨지은 후 격한 운동으로 죄책감을 달랠 때, 끊임없이 몰아치는 과제와 시험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댈 때 그리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종일 잠만 잘 때. 그 모든 순간에 언제나 나는 너와 함께였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변함없이 우리 두 명은 서로의 4년간의 대학 생활을 가득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순진했던 걸까 멍청했던 걸까. 언제나 너로 가득 차 있던 내 옆자리가 공허해진 요즘, 그 텅 빈 자리를 바라보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한숨을 쉬고 있는 나 자신을 매일 마주하고 있다. ‘롱디’ 그리고 ‘고무신’이라는 단어들을 별것 아니라.. 2017. 11. 2.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그대들에게 정신없는 한 학기를 끝마치고 맞이한, 찬바람이 기분 좋던 12월 겨울 방학에 오랜만에 책 선물을 받았다. 책 중에서도 특히 표지나 일러스트가 “예쁜” 책을 좋아하는 내가 취향 저격당하게 한 이 책은, 현실적인 동시에 로망 가득한 소설을 쓰기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짧은 글 모음집, 이었다. 페이지 한 장 한 장이 평범하지만 잔잔한 깨달음이 남겨지는 짧은 글귀와 귀여운 일러스트로 채워져 있어 가볍게 읽히지만 자주, 많이 들여다보게 되고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되는 책이다. 워낙 책을 두고두고 반복해서 읽는 걸 즐기는 나에겐 매우 반갑고 고마운 선물이었다. 물론 유명한 작가의 글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이 제일 특징적이겠지만, 이 책의 특별함을 하나 더 꼽아보자면, 바로 책에 수록된 글이.. 2017. 2. 14.
봄날, 벚꽃 그리고 우리 꼭! 음악 재생 후 읽어 주세요컴퓨터로 읽으면 더욱 좋습니다 벚꽃.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봄날의 분홍빛 축복은 금방 또 다시 바람에 휘날려 사라지겠지만, 그 잔상만은 늘 우리의 기억에 남아 봄을 추억하게 만든다. 매년 따뜻한 바람이 불어 올 때 즈음 화사하게 피어나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그 벚꽃은 야속하게도 사랑했던 옛 연인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져 가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무언의 약속을 잊지 않기라도 한 듯 돌아오는 그 모습을 볼 때면 우리 마음 속에 왠지 모를 설렘이 피어나곤 한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완연하게 핀 벚꽃들 사이를 걸어 봤던 건 고등학교를 막 입학했을 즈음의 봄이었다. 깊은 산 중턱에 위치해 그만큼 계절의 변화가 선명하게 드러났던 우리 학교는 .. 2016. 3. 5.
순수함, 그리고 겨울에 관해 Seiman C, Flickr 1월, 어느새 해가 진 삼성동의 빌딩 숲 속 어딘가, 십 년간의 외국 생활과 이러저러한 이유 탓에 한국의 겨울을 볼 일이 없었던 나는 열두 살 무렵 마지막으로 본 진눈깨비 사이에서 다시 한 번 밤하늘을 쳐다보며, 그 밤하늘 색과 비슷한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비스듬히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지하철역 상가에서 천원 몇 장을 건네고 사서 낀 검은 털 장갑이 생각보다 두터워 라이터를 켜기가 어려웠고, 오른쪽 장갑을 벗어 시린 손과 담배를 코트로 가린 채 다시 한 번, 두 번 라이터의 부싯돌을 돌렸다. 어느새 불붙은 담배는 어두운 거리에서 홀로 붉게 빛났고, 몰려오던 피곤함에 벽에 기대선 나는 담배 연기 너머로 지나가던 이름 모를 여인들과 몇 초간 눈을 마주친다던지 하.. 2016.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