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 그리고 겨울에 관해

Posted by 데미안
2016.02.17 19:05 EDITORIAL/문예 :: Literature

Seiman C, Flickr


1월, 어느새 해가 진 삼성동 빌딩 숲 속 어딘가, 십 년간의 외국 생활과 이러저러한 이유 탓에 한국의 겨울을 볼 일이 없었던 나는 열두 살 무렵 마지막으로 본 진눈깨비 사이에서 다시 한 번 밤하늘을 쳐다보며, 그 밤하늘 색과 비슷한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비스듬히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지하철역 상가에서 천원 몇 장을 건네고 사서 낀 검은 털 장갑이 생각보다 두터워 라이터를 켜기가 어려웠고, 오른쪽 장갑을 벗어 시린 손과 담배를 코트로 가린 채 다시 한 번, 두 번 라이터의 부싯돌을 돌렸다. 어느새 불붙은 담배는 어두운 거리에서 홀로 붉게 빛났고, 몰려오던 피곤함에 벽에 기대선 나는 담배 연기 너머로 지나가던 이름 모를 여인들과 몇 초간 눈을 마주친다던지 하는 그다지 쓸모없는 일로 더딘 시간의 움직임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수줍게 미소짓던 눈도, 알 수 없던 슬픔에 찬 눈도 있었다. 슬픈 눈을 한 그녀는 내 눈에서 어떤 감정을 읽었을지, 비슷한 슬픔이었을지, 그 슬픔에서 느끼던 익숙함과 안도감이었을지, 아니면 그 안도감에 취해 느끼던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무관심이었을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밤늦게 고등학교 친구와 술 약속이 있던 나는 여느 그것과 같은, 작게 틀어진 텔레비전 소리와 빈 맥주 캔 뿐이던 나만의 거실에 무료함을 느끼며 약속 시간보다 몇 시간 먼저 집을 나섰고, 모처럼 홀로 한 외출에 사람의 발길이 뜸한 거리를 걸으며 나 같은 사람의 공허함을 채워줄 - 아마 존재하지 않는 - 또 다른 서울을 찾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다 추위 속 매캐한 담배연기에 가슴이 답답해진 나는 널브러져 있던 벽돌에 꽁초를 문대며 가던 길을 계속 갔고, 어느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뒷골목으로 걸음을 옮기다 지나친 한 놀이터에서 나란히 노란색, 파란색 파카를 입고 맨손으로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 있는 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보았다. 손이 시리지는 않을까 멀찍이 서 나는 그 둘의 부모를 찾으려 두리번거렸으나 보이지 않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는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 무단히 애쓰며 둘 근처로 다가가 녹슨 그네에 앉았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그저 나에게 별 관심이 없던 것인지 추위 속에서 오직 제 성을 쌓는 것에만 몰두하던 둘에게 집이 어디냐 물으려던 찰나 나는 둘의 모래성이 내 기대보다 훨씬 크게 지어져있음을 인지했고, 평온한 동심 속의 둘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Alex Barlow, Flickr


색 바랜 그네에 앉아 몸을 앞으로, 뒤로 밀며 그 모래성을 바라보다 어릴 적 초등학교 뒤편에 있던 열 평 남짓한 작은 정원을 기억해냈다. 매일 학교가 끝나고 홀로 거닐던 그 정원 안에는 상추와 배추 같은 것을 기르던 바보 같은 터가 존재했고, 그 옆의 작은 플라스틱 우리 안에는 새하얀 토끼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한 여자아이가 그 우리 옆에 쪼그려 앉아 토끼를 구경하던 것을 보고는 밭에서 상추를 뜯어와 그 아이에게 건네며 토끼에게 먹이라 전했었다. 흙투성이가 된 내 운동화를 보며 미소 짓던 여자아이는 토끼는 먹는 모양새가 우습다며 나를 옆으로 불러 세웠고, 그렇게 우리 둘은 초록색 작은 우리에 얼굴을 들이밀고 코를 씰룩이며 먹이를 씹어 먹던 토끼들을 구경하다 갑자기 재채기를 하는 한 녀석을 보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그 누구보다 해맑게 웃었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아이와의 별 의미 없는 추억은 왜 이리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을까.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같이 나이 들어버린 그 여자아이는 나같이, 조금 전 골목길에서 조우한 짙은 화장 속 슬픈 눈의 여자같이, 서울 어딘가에서 정처 없이, 목적 없이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걷고 있지는 않을까. 


만일 각자의 슬픔을 안은 채 검은 마스카라와 담배연기 사이로 십 년 후 그 아이와 우연히 마주한다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하던 쓴 생각에 무릎 위에 놓았던 두 손에 약간 힘을 주었다. 아직 짙게 내리던 눈은 근처 가로등에 노랗게 비치고 있었고, 동떨어진 놀이터에는 간간이 근처를 지나가던 외로운 차 소리, 그리고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듯 흙을 바라보며 소곤거리던 내 옆 두 아이의 작은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시간이 늦어져 둘에게 말을 걸으려던 찰나 저만치에서부터 들리는 한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남자아이는 먼저 일어나 여자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저 성을 건드리지 말라 당돌하게 말했다.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던 나를 뒤로한 채 둘은 자신들은 부르던 목소리를 따라 사라졌고, 나는 홀로 앉아 마침 하늘서 내리던 눈에 조금씩 하얘지던 그 모래성을 바라보고 있다 약속시간에 가까워짐을 깨닫고 이내 자리를 떴다. 마냥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었기에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 모래성에 손을 대겠지' 하는 나 자신만의 생각을 하고 피식하며 담배 한 개비를 켰다.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향하기 위해 올라탄 지하철 2호선의 창밖으로 보이던 눈 내리던 풍경은 유난히 청명했다. 마치 마일스의 트럼펫 소리 같았다.


Yoonki Jeong, Flickr


잠시 후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지나가던 사람들을 구경하던 나의 옆자리로 친구 녀석은 말없이 다가와 라이터를 찾았다. 너무 많이 피게 된다며 제 라이터를 들고 다니지 않던 녀석이었고, 그러면서 담배는 두 갑씩 가방에 넣어 다니는 모습이 우습다는 내 말에 놈은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예전과 똑같아 보인다고 말했다. 근처 재즈 바에 들어가 기네스 두 잔을 시켜놓고는 서로의 과거 얘기를 늘어놓으며 잠시 옛 추억에 잠겨있었고, 이야기가 수그러 들 때쯤 나는 아까 길에서 본 두 아이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아이 둘을 보았다고, 너는 그만큼 어릴 적 생각이 나냐고, 우리는 언제 이렇게 복잡한 인간이 되었냐고. 말없이 술을 기울이던 친구를 바라보다 답을 기다리기를 포기한 나도 맥주를 한잔 더 따라 마셨고, 바 안은 드러머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던 라이드 소리, 그 위에 얹혀있던 영롱한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실 우리네 삶은 복잡하면서도 아직 가슴 여미도록 간단했다. 


새벽녘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 앉아 검은 코트로 몸을 감싼 나는 조금 취한 눈으로 창밖을 보며 빠르게 지나가던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유흥가의 네온 라이트는 어지러울 정도로 내 시야를 흔들었고, 멀리서 바라본 대로변 고층 빌딩의 창들 너머로 보이던 셀 수 없이 많던 밝은 형광등은 밤에 익숙해져있던 내 두 눈을 가혹하게 자극했다. 환하게 빛나던 도시에 별을 잃은 밤하늘 속 유려히 홀로 자리를 지키던 새하얀 초승달을 바라보다 '삶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따위의 갑갑한 생각에 피곤한 두 눈을 감았다. 약간 열려있던 택시의 창문 틈새로 들이치던 겨울 공기가 꽤나 차가웠지만, 십 년 전 마지막으로 느껴본 것과 비슷한 추위에 향수를 느껴 그 창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부르튼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존재하지 않던 누군가의 품을 찾으며 꿈 없는 잠에 들었다. 


유년시절을 그리워하며 피는 담배조차도 나이 먹는 과정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저 삶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다 모호해진 선악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있던 나 또한 잠든 모습마저도 나이 먹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천천히 풀어가던 실타래의 실이 길게 늘어질수록 그 줄은 더 쉽게 얽히기에 어느새 삶은 조금 더 어려워지고, 무거워지고, 색채를 잃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좁은 택시 뒷좌석에서 몸을 뒤척이며 안식을 찾고 있었다. 쌓아 올리고 쌓아 올려도 애석하게 무너지기만 하던 나의 모래성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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