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은 유명한 첼리스트 하면 누가 생각나시나요? 제가 아는 분들은 고작 한국의 장한나, 195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 요요 마, 그리고 2007년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첼로의 '대부' 로스트로포비치 입니다. 로스트로비치가 죽음은 음악계의 큰 슬픔과 아쉬움을 불러왔고 한동안 큰 이슈거리였지요. 하지만 로스트로비치만큼의 재능은 가진 여성 첼리리스트가 더욱 더 짧은 인생을 살다가 사라졌을때의 그 슬픔은 얼마나 클까요?
오늘은 수많은 사람들을 첼로의 매력에 빠지게 만들었던 한 비운의 여성 첼리스트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자클린 뒤 프레.
저는 그녀를 아름답지만 흐르는 시간에 어쩔 수 없이 꽃잎을 떨어트리는 꽃에 비유하고 싶네요.
아름다운 꽃이 오랫동안 남길 원하시지 않나요? 하지만 그 꽃들이 멈추지 않는 시간에 흘러 금방 고개를 숙일때'아.. 조금만 더 볼 수 있다면..." 이라고 생각해본적 누구나 다 있을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자클린 뒤 프레의 이야기를 들었을때 느낀것이 아름다운 꽃이 일찍 지는것을 보았을때 받은 느낌과 비슷했어요. 지금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시길 바라며 뒤 프레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http://hahamin.egloos.com/5162398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6054
뒤 프레의 병은 갑작스럽게 찾아온것이 아니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근육통, 피곤함인줄 알았던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뒤 프레의 음악적 감각을 마비시키고 급기야 연주중에 활을 놓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끝내 천재라고 불리우던 뒤 프레는 그녀의 음악성 자질에 대해 비평을 받게 됩니다. 뒤 프레는 쇼핑을 하기를 좋아했는데 어느 날은 쇼핑 도중에 몸이 마비되어 다른 사람이 도와주기전에는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루었다합니다. 이렇게해서 집에 늦게 도착하여 남편인 다니엘 바렘보임이 어째서 늦게 돌아왔냐 물으면 뒤 프레는 좋은 옷이 너무 많아 시간이 오래걸렸다, 라고 대답하였다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뒤 프레는 자신에게 이상한 점이 있다는것을 깨닫고 자신의 병명을 알게되었는데 그때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첼로를 연주를 할 수없던 것이 자신의 감각이 무뎌져서가 아니라 병에 걸려서이기 때문이라 다행이다." 그녀가 가진 음악에 대한 자존심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이지요?
끝내 1973년, 뒤 프레는 연주활동을 중단하고 걷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휠체어에 의지하여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음악생활을 제자들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내지만, 그 마저 몸상태가 악화되어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 대니얼 바렘보이는 더 이상 뒤 프레를 방문하지 않고 그녀의 친구들도 서서히 떠났습니다. 음악을 사랑한, 하지만 음악을 할 수 없는 첼리스트 뒤 프레는 병상에서 14년동안 자신이 과거에 연주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1987년 런던, 42세의 나이로 자클린 뒤 프레는 자신의 남편 대니얼 바렘보힘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자클린 뒤 프레.. 비운의 천재 첼리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6054
만약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어떠한 음악을 연주했을까요? 그녀의 비운이 그저 아쉽기만 합니다.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
지휘자: 대니얼 바렘보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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