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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문화 & 예술 :: Culture & Art

동심의 추억, 옛날 만화, 그리고 어른아이가 된 우리들.

샌프란시스코의 비 내리는 날은 그 어느 곳보다 조용하고 어둡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고독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마음마저 눅눅한 날에 무슨 공부냐며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그 누구보다 비를 싫어하는 필자는 비 내리는 날이면 마법에 걸린 날처럼 성격이 예민해진다. 여느 비 오는 날처럼 책상에 앉아 공상에 잠기며 시간 죽이기를 하고 있는 찰나, 거실에서 룸메이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거실로 나가보니 필자의 룸메이트는 후뢰시맨을 보고 있었다.

그렇다. 필자의 룸메이트는 옛날 만화와 주제가를 보고 들으며 추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필자와 그는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공감대가 맞았다. 궂은 비는 쉴 새 없이 내리며 낡은 도시를 녹슬게 하였지만, 우리의 동심까지 녹슬게 하진 못하였다. 동심의 세계에는 경계가 없다는 걸 느끼며, 독자들에게 이 글이 따뜻한 공감이 되길 바라면서 글을 써본다. 글쓰기에 앞서, 필자는 89년생 훈남이기 때문에 필자가 언급하는 만화는 다소 남성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는 걸 이해해주길 바란다.

1.    파워레인저  

우리를 설레게 하곤 했던 파워레인저. 빨간색 파워레인저가 유난히 키가 작음을 알 수 있다.


권선징악의 교훈을 몸소 깨우쳐주는 지구의 수호자 파워레인저. 사진이 보여주듯 매우 멋있는 캐릭터이다. 다섯 명의 캐릭터가 힘을 합쳐 악당을 무찌르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힘이란 협동과 믿음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으면 기적처럼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어린이들에게 전해준다. 이 오빠·누나들의 특징은 가면을 썼기 때문에 입 모양과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고개를 저으면 보통 악당한테 공격을 당했을 때 아픔을 호소하는 제스처이다. 고개를 끄덕일 때는 합체를 하자는 제스처이다. 미리 합체하면 적을 금방 무찌를 수 있는데도, 굳이 한명 한명씩 달려들다 무참히 실패한 후, 합체하는 이들의 기승전결식 싸움방식은 전국 어린이들의 가슴을 애타게 하기에 충분했다는 평이다. 여담으로 어느 새부터 우리 사상 속에 깊게 뿌리 박힌 “남자색, 여자색”의 논란의 시발점은 이 녀석들 때문이기도 하다. 93년생 이후의 세대들은 벡터맨이 조금 더 친숙하겠지만, 벡터맨은 파워레인저의 아류라고 필자는 감히 단언한다.

2. 꼬비꼬비

그렇다! 천 년 전에 북 치고 장구 치며 나타났다는 도깨비들의 우화, <꼬비꼬비>는 어린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느 시골로 이사 온 깨동이가 우연히 도깨비를 발견하는데, 그 우두머리의 아들 꼬비와 친해져서 서로 변신도 하는 등, 도깨비와 인간의 공존을 맛깔나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메밀묵을 싫어하는 도깨비는 낮에는 기물로 변해 그 자취를 감추다가 밤만 되면 도깨비로 변신해 사고를 치거나, 혹은 한 작은 마을에 모여 마치 시골 반상회 하듯 사소한 수다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은 대한민국 역사에 깊이 박혀있는 대가족문화를 잘 반영한다. 가장 한국의 ‘얼’이담겨있는 만화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팥죽을 무서워하는 도깨비들의 리얼액션은 필자도 영향을 받아 아직까지 팥죽을 못 먹는다. 꽃심이의 조용하고 순종적이며 온화한 이미지는 20세기 후반까지 존재했던 전형적인 한국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

3. 핑구

 

 

너무 오래된 만화라서 1993년 이후에 태어난 친구들에게는 다소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1995년 스위스에서 만들어진 만화이며, 한국과 일본, 미국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요즘 <뽀로로>니 뭐니, 떠들썩한데 원조 펭귄 캐릭터는 핑구였다. 필자가 유치원생 시절 어린이집에 어머니가 일 마치시고 데리러 올 때까지 친구들과 함께 봤던 만화인지라 더욱더 감회가 깊은 만화. 핑구는 말이 없다. 괴상한 언어를 가끔 쓰는데 딱히 특정 언어를 구사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놀라거나 흥미가 있으면 주둥이를 내밀어 나팔을 불거나 슬픈 일이 생기면 눈물을 흘린다. 이러한 시청자의 상상에 맡기는 제스쳐 유의 만화는 어린이들의 창의력발달에 도움을 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핑구와 핑구의 동생, 출신을 알 수 없는 물개 친구가 보여주는 사소한 일상의 에피소드는 잔잔한 감동과 재미를 주었다. 찰흙으로 만들어진 핑구의 집은 세련되었다. 흡사 르네상스 시기의 건축물을 보는 듯하다. 당시 필자는 찰흙으로 생선을 만들어 먹다가 배탈이 나서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었다.

4. 우리는 챔피언

전국 초등학생들의 필수아이템 미니카

하키채로 미니카를 조종하며 세계레이스 우승을 꿈꾼다는 말도 안 되는 허세 류의 최고봉 만화다. 하지만 그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대한민국 초·중생들은 필기도구는 안 사더라도 가방에 꼭 미니카 하나씩은 챙기고 다녔다. 꽤나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8,000원~15,000원 + 튜닝비) 1년마다 오는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설날만 지나면 동네의 문방구는 마치 게르만 대 이동을 보듯 엄청난 초등학생 인파로 들끓어서 미니카 금지령을 내리는 학교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몇몇은 집에 미니카 트랙을 갖고 있었는데, 그만큼 손님 접대하기 좋은 아이템도 없었기에 엄청난 인맥을 쌓을 수 있었으며 매일매일 네스퀵을 갖고 오는 아이들보다 인기가 더 많았다. 필자도 4학년 때 이모부가 사주신 미니카 트랙의 힘에 부응하사 부반장으로 뽑히는 기적을 만든 적이 있다.

5. 포켓몬스터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다. 당시 만화계의 한 획을 그었던 포켓몬스터는 오후 5시만 되면 전국의 모든 초등학생들을 집으로 귀가하게 하는 교과서와도 같은 매개체였다.  집 나간 십대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 보다 훨씬 임팩트가 컸다. 당시 이 작품을 보았던 현재 대학생들의 뇌리에 포켓몬스터 주제가는 잊으려 해도 이미 애국가처럼 깊이 새겨져 있다. 151가지 종류의 포켓몬이 있었으며, 포켓몬의 순번까지 외우는 무시무시한 아이들도 있었다. 주인공 지우와 그의 친구들이 펼쳐나가는 포켓몬 수집 어드벤처의 인기는 포켓몬 미니어처, 포켓몬 딱지, 포켓몬 인형, 필통, 티셔츠 등 다양한 상품화로 이어졌다. 특히 샤니에서 야심작으로 내놓은 포켓몬스터 빵 속엔 포켓몬 스티커가 있었는데, 이 스티커를 모으려고 대한민국 초등학생들의 슈퍼 행진은 멈출 날이 없었다. 새로운 스티커를 확인하기 위해 사지도 않은 빵을 만지작만지작 거려서 멀쩡한 빵이 없었다. 온라인게임이 유행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디스크 게임이 유행이었는데, 포켓몬스터게임(실버버전, 레드버전, 피카츄배구 등등)은 대한민국 초등학생들로 하여금 컴퓨터 수업시간을 애타게 기다리게 하였다.

6. 그랑죠

도막사라무

건담의 원조, 그랑죠는 진정한 남자다움이란 로봇 장난감을 하나씩 갖고 있어야 한다는 사상을 유치원생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주었다. 그랑죠, 피닉스, 포세이돈이 함께 악당을 물리치는 이 만화는 <마징가Z>를 압도하는 시청률을 낳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캔디>와 함께 동 시간대 라이벌 프로그램이었는데, 남매가 있는 집안에서는 잦은 다툼이 일기도 하였다. 당시의 남학생들은 별을 그릴 때 그랑죠 모양으로 별을 그렸었다. 특히 책상에 그랑죠 문신을 그리며 자신의 예술성을 발견, 홍대진출을 꿈꾸는 학도가 많았다. 훗날 다간과 선가드, 가오가이거 등 다양한 건담 만화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비록 함께 하지 않았어도, 같은 시간에 머물렀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공감한다. 인간은 공감의 동물이다. 사소한 공감에 행복을 느끼는 반면, 그 어떠한 공감이 없으면 외로움에 말라죽는다. 늘 당연할 줄만 알았던 옛 일상의 사소한 회상에도 우리는 가슴이 일렁이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다양한 지식을 얻는다. 그리고 그만큼 현실이란 벽 앞에 상상력과 꿈을 내어준다. 어렸을 적 우리는 깨어 있을 때에도 꿈을 꾸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지금 '어른 아이'가 된 우리들은 잠을 자야만 꿈을 꾸고, 상상한다. 어렸을 적 슈퍼맨은 온데간데없고, 어렸을 적 파워레인져는 장난감 총을 든 어떤 아저씨, 겨울에 만날 것만 같았던 핑구는 찰흙 덩어리로 만든 픽션, 허구, 거짓말, 유치한 것, 옛것, 오래된 것, 낡은 것. 가끔은 유년 시절과 같은 포근한 여유와 함께 바쁜 일상 속에서도 어렸을 적 꿈꾸었던 슈퍼맨과 세일러문을 생각하며 동심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삶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